[특집]이해를 지혜로 바꾸는 체득의 기술

2019-05-28     보일 스님

|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속도와 정보
최근 몇 년 사이에 TV, 신문, 인터넷에서는 인공지능, 유전자 가위 기술, 무인자동차, 가상·증강현실 구현 기술,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생소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모든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등장하는 공통된 키워드는 ‘4차 산업혁명’이다. 이 4차 산업혁명의 정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흥미로운 견해로서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닐 거센필드 교수에 따르면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세계, 즉 아톰(ATOM)으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정보의 총량과 인터넷 세계, 즉 비트(BIT)로 이루어진 가상 세계를 구성하는 정보의 총량이 대등한 수준 또는 일치하는 세상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 4차 산업시대.”라고 정의한다. 과연 온라인 세계의 정보량이 현실 세계의 정보량과 대등해질 수 있을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살펴보자. 현대인들은 출퇴근길의 지하철 안, 건물 휴게실, 길거리 등에서 각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하루에도 수많은 볼거리, 읽을거리, 들을 거리 등을 찾아 인터넷을 헤매고 정보를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전통적인 일상, 즉 가족이나 친구들과 대화하고 운동하며 놀러 다니는 시간보다 온라인상의 공간에 머무는 시간, 또는 게임 등을 통한 가상 현실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온라인상에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더 방대하고 다양한 정보가 있고, 접근이 쉽고, 더 재미있고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개인의 욕구를 현실 세계에서 더욱더 쉽게 실현해 줄 수 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하려면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수많은 활자와 영상 또는 사진이 뇌리를 스쳐 가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사이버공간’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이제는 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가상 공간과 현실 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넘어서 사실상 가상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비유처럼 장주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가 없었듯이 꿈과 현실의 구분이 사라진 것과 같은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상태인 것이다.

가장 최근의 뉴스 중에서 주목되는 이슈는 아마도 5G 시대의 도래일 것이다. 데이터의 전송 속도가 대폭 빨라져서 초고용량의 영상도 끊김 없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5G는 초연결, 초고속, 최실시간 영상 처리 서비스라고 정의된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이용하던 기존의 4G LTE보다 최소 열 세배 이상, 최대 1,300배 빠른 속도의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실감이 나지 않으니 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요즘 사람들이 즐겨 찾는 초고화질의 풀HD 영화의 용량 12기가바이트(GB) 크기를 단 1초 만에 각자의 스마트폰에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된다. 단 1초 만에 말이다. 이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인프라가 되기 때문이다. 초고속 통신 기술을 통해 원격의료, 자율주행 자동차, 사물인터넷, 증강현실 기술 등이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게 된다. 이 기술은 이전에 단순히 지하철에서 유튜브 영상을 버퍼링 없이 보는 정도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제주도의 환자를 로봇수술을 하는 경우처럼, 전송되는 방대한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고도의 정밀 작업까지도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율주행 자동차의 경우 돌발상황에 대해 실시간으로 정교한 제어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이전에 불가능하거나 어려웠던 수많은 문제가 가능해지고 해결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눈부신 혁신과 그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되는 것에 대해 마냥 경이로운 눈빛으로 찬사를 보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과연 기술의 혁신이 인간을 무지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겠냐는 날 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매일 방대하고 무의미한 정보들을 소비하면서 더욱더 많은 새로운 정보를 갈구하는 우리의 반복적 정보 소비 습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는 과연 어제 하루 동안에 인터넷을 통해 보고 읽은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계속해서 정보에 굶주린 아귀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것, 신기한 것, 기발한 것을 찾아 인터넷 공간을 유랑한다. 마치 폭류처럼 밀려오는 정보들 속에서 앞 정보를 인지하는 순간, 동시에 바로 뒤이은 정보에 밀려서 이전 정보의 기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렇게 방향성을 상실한 정보의 소비는 그 휘발성 또한 강하다. 재밌고 자극적이지만 그 기억이 오래가지 않는 속성이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 뒤의 공허함과 황량함 등 때문일 것이다. 결국 마음의 고통으로 귀결된다. 부처님께서는 바른 집중 없이 우왕좌왕하는 이 모습을 마치 “물에서 건져 올려 마른 땅에 던져진 물고기가 이리저리 팔딱거리는 것.”에 비유하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디지털 시대의 정보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살아갈 것인가. 인터넷상으로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열람하는 일을 영어로 ‘웹서핑(Web surfing)’이라고 하는데, 세차게 밀려오는 물결을 두려워 회피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 파도를 타고 서핑을 즐길 것인가. 불교적 해법은 어떤 것일까. 티베트 속담에 ‘미친 말을 다스리기 위해서 다리를 부러뜨릴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타고 평원을 질주할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는 말이 있다. 폭주하듯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나가는 4차 산업 시대를 살아가면서 정보를 지혜롭게 이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    체득의 기술 - 바른 집중과 자비
부처님은 팔정도의 가르침 중에서 ‘바른 집중(正定)’을 말씀하셨다. 빨리어로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라고 한다. 집중이란 모든 의식 상태에 존재하는 하나의 심적 요소를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한곳을 향해 겨냥돼 있음(心一境性)’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집중(사마디)뿐만 아니라 ‘바른’ 집중이라는 점이다. 집중이라고 해서 다 같은 집중이 아니다.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중고생들을 상대로 바른 집중에 대해 강의하다 보면, 게임에 빠져 있는 어린 학생들이 종종 이렇게 대답한다. “스님, 저도 게임을 할 때 엄청나게 집중해요. 놀라울 정도로요.”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며칠 밤을 샌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거칠게 하고 반복적으로 공격 성향을 증장시키는 행위를 집중이 바르다고 볼 수는 없다. 누군가를 암살하려는 킬러의 집중이 바른 집중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형태의 바르지 못한 집중은 부처님께서 말하는 ‘사마디’의 특성을 갖추지 못한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 바른 집중은 선한 마음 상태에서의 집중인 것이다. 물론 본래적 의미의 바른 집중이 되려면 더욱 순수한 알아차림의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지만, 일단 여기까지의 수준에서 얘기해 보자.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기에 앞서 잠깐이라도 이 정보에 대한 선택이 바른 것인지 사유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멈춤’이다. 이 정보가 과연 내게 정말 필요한 정보인지, 아니면 그저 호기심 또는 시간 보내기용으로 습득하고자 함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아주 잠깐이라도 멈추자. ‘아주 잠깐’ 말이다. 그다음, 이 정보가 내게 필요하다면, 과연 이 정보에 대한 소비나 생산이 과연 타인에 대한 ‘자비’로 귀결되는 행위인지 생각해 보자.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악성 댓글이 정신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부처의 제자들로서 유용한 생각의 방향이 될 수 있다.

|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지식이 진정으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득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나 갖고 있다. 진정한 앎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관적 편견이나 편향성 없이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들이 열광하는 스포츠 중 하나인 축구로 비유해보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 FC의 전설적인 축구 감독 빌 샹클리는 ‘폼(경기력)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앎에도 클래스가 있다. 이기적 욕망 속에서 소비하고 망각하는 휘발성 지식이 아닌, 바른 집중을 통해 자비로 귀결되는 지식의 습득이야말로 궁극적 앎 또는 최상의 앎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현재 소비하는 정보에 대한 앎의 클래스는 어디쯤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정보와 지식은 넘쳐나더라도, 궁극적 앎이라는 클래스는 영원하다. 이 앎은 존재의 세 가지 속성 즉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을 기반으로 한 앎이다. 이 무상, 고, 무아에 대한 분명한 통찰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자비심과 한 쌍을 이룬다. 중요한 것은 습득된 정보에 대한 각자의 앎이 궁극적으로 나와 남을 이롭게 함인지 즉, 자비로 귀착될 것인지의 여부이다. 기준은 간단하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이 애매함과 혼란스러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자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4차 산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체득의 기술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 방향은 개인과 공동체의 이기적 욕망을 증장시켜 가는 행로가 아닌, 타인에 대한 자비와 연민으로 귀착될 수 있는 방향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과학 기술도 공성(空性)이 관통하는 대상이다. 그 자체로서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어떤 생각을 투사하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부처님은 결국 자비를 말한다. 우리가 과학 기술의 도구들을 만들고 이용하려 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자비로 귀착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 욕망의 증장을 위해서인지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하나의 통찰로서 다시금 ‘자비’를 상기해보자. 인터넷 댓글을 다는 행위 속에서 나의 이 생각이 자비로 귀결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비방하는 업을 쌓아가는 행위인지를 생각해 보면 답은 한층 명료해질 것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감(교수사). 현재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기본교육과정에 있는 학인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있으며, 주로 동아시아 불교, 그중에서도 6~7세기 중국과 한국불교의 사상적 교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이외에도 일선 교육 현장에서 새로운 시대의 출가학인들에게 불교를 효과적으로 소개하는 방편으로서 불교와 인공지능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의미에 지속적 관심을 두고 있다. 최근의 연구로는 「인공지능 챗봇에 대한 선문답 알고리즘의 데이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