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인도 7 망가져 가는 바쟈 굴원

부처님이 나신 나라, 인도 7 망가져 가는 바쟈(Bhaja) 굴원을 슬퍼하며

2007-09-15     이거룡

까를라(Karia) 굴원에서 바쟈 굴원까지는 이십리 길,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다. 봄베이서든 뿌나서든 아침 일찍 나선다면 이 두 곳을 하루 만에 돌아볼 수도 있다. 말라블리(Malavli) 역을 사이에 두고 까를라 굴원은 북쪽에 그리고 바쟈 굴원은 그 반대편에 있으니, 어느 곳을 먼저 가든 반드시 다시 역으로 돌아와야 그 다음 목적지로 갈 수 있다.

아침에 이 역에 내렸을 때는 먼 곳부터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하여 먼저 까를라 굴원으로 갔던 것이다. 정오경에 까를라 굴원을 내려왔다. 뜻밖에도 아침에 타고 왔던 릭샤가 산 아래 초입에 그대로 서 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할 것 같아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누차 일러두었던 릭샤가 세 시간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 빈차로 돌아가봤자 태울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드물게 오는 외지 사람의 몇 푼 선심이 그를 기다리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속절없는 그의 기다림이 안쓰럽고, 또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다.

괜스레 죄인된 기분으로 릭샤를 돌려 바쟈 굴원으로 향했다. 아침에 내렸던 역까지 왔더니 뜻하지 않게 건널목에 화물열차가 길게 드러누워 길을 막고 섰다. 기차가 고장난 것이다. 내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한 릭샤왈라는 연방 ‘No problem’이다. 어디 ‘No problem’에 속은 적이 한두 번이던가?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열차가 길을 비켜섰다.

역에서 바쟈 굴원으로 가는 길은 골곡이 심하다. 그렇지 않아도 무게 중심이 위로 쏠려 가뜩이나 불안한 오토릭샤에 앉았자니 오금이 다 저린다.

서부 데칸의 굴원 가운데서 가장 초기의 유적에 속하는 것으로 전해지는 바쟈 굴원은 모두 15개의 굴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12번 차이띠야(chaitya, 塔院)굴이다. 이 탑원은 내실과 외부를 차단하는 벽이나 문이 전혀 없기 때문에 바깥의 먼 거리에서도 실내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내실로 들어설 때 오른편의 석조 발코니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목조 가옥의 전형적인 발코니를 본뜬 것이다. 티크 목재의 서까래를 사용한 독특한 형태의 내실 천장도 이 탑원이 고대의 목조 사원 양식을 따서 디자인된 것임을 증명한다.

깊이 20m, 폭 10m 정도의 크기로 조성된 내실은 까를라의 것보다는 작지만 결코 왜소한 편은 아니다. 지붕은 아치형으로 둥글게 만들었고 스투파가 안치된 가장 안쪽은 돔(dome)이 조성되어 있으며 27개의 석주로 지탱하게 하였다. 스투파의 최상부에 놓인 정육면체에 가까운 평두(平頭,harmika)나, 따로이 주두(柱頭)를 조성하지 않은 내실의 석주는 인접해 있는 까를라 굴원의 그것에 비하여 단순하고 보다 투박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선뜻 눈에 띄는 세련된 기교와 정제된 아름다움은 없지만, 그 생긴 품이 시원 시원하고 힘차다.

탑원 좌우로 조성되어 있는 다른 승원들은 그다지 볼 만한 것이 없고, 그 모두가 빼어난 탑원의 여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답사는 볼품없는 곳까지도 간다는 데 의미가 있는 법이라 여기고 오른편으로 난 비탈길을 따라 돌아가면 일군의 스투파를 볼 수 있다. 굴 내부에 5기, 그리고 바깥에 9기, 모두 14기의 스투파가 안치되어 있다. 더러는 여러 기의 스투파를 한 곳에 모신 불적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처럼 석굴 안에 여러기의 스투파를 모신 경우는 드물다.

직경 3m 내외의 스투파들은 모두 바위 벼랑을 굴착하여 조성한 것으로 외부의 석재를 가져다 쌓아 만든 것이 아니다. 스투파의 꼭대기에 조성된 여러 가지 형태의 평두 양식도 눈길을 끈다. 더러는 평두 위에 버섯모양의 일산(日傘)을 조성한 것도 보이고 또 더러는 계단식의 역(逆)피라미드형 평두도 보이는데, 이것은 탑원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양식이다.평두 양식에 기준을 둔다면, 모르긴 해도 이 스투파군은 탑원보다 나중에 조성된 것이다.

내친 걸음에 남쪽 끝으로 조금 더 돌아가면 겉보기에도 허름한 굴원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원래는 탑원으로 조성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된 자그마한 굴원이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이 탑원의 전실 정면과 측면에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있다. 불상은 물론이거니와 구상적인 이미지의 조각이라고는 거의 없는 바쟈 굴원에서는 특별한 탑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힌두사원으로 통할 정도로 조각의 내용이나 그 양식이 힌두사원을 닮아 있고 그 꾸밈도 화려하다. 내실은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어 문틈으로 겨우 들여다 보았더니 벽에는 불상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벽감이 보일 뿐 고요하다. 내부의 훼손을 막고자 쇠창살을 만들고 자물쇠를 채운 것은 이 나라의 문화재 보호능력이 지니는 한계라 할 것이지만. 금세기 역량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씁쓰레하다.

답사를 마치고 다시 탑원 앞으로 돌아왔더니 가관이다. 토요일 오후의 행락객들이 탑원마당으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더러는 마당에 또 더러는 탑원 안 시원한 그늘에 퍼지르고 앉아 점심을 먹는다. 한껏 음악을 켜놓고 몸을 흔들며 소란을 떠는 작태가 한심하다. 이 굴원이 애초에 선견지명이 없어 봄베이와 가깝게 앉은 죄치고는 지나친 형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그렇지 이천년이란 세월이 어디 짧은 세월인가?

온갖 풍우에도 썩지 않고 용케 견뎌온 저 서까래며 돌기둥이 어찌 생명없는 나무토막이며 돌덩이라 할 것인가? 그저 한순간에 세웠다 한 순간에 허물어버릴 수도 있는 콘코리트 건물정도로 여기지 않고야, 어찌 저토록 천연덕스럽게 점심 보자기를 끌러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귀가 따갑도록 음악을 높이고 난리법석을 떨 수 있겠는가? 원래는 인공이었으되 이미 자연이 주는 무게와 감동을 지닌 저 생명이, 허연 속살을 드러낸 채 마구잡이로 짓밟히는 저 딱한 생명이 슬프다.

굴원을 내려가려 하니 문득 무한강산의 우리 가람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수일 동안 데칸의 석굴사원들을 돌며,‘장엄하여라,’‘아름답기도 하여라’하였더니, 이제 문득 내 나라의 고풍한 가람이 그리운 것이다. 이 같이 장엄하게 깍아 만든 굴원이야 없지만, 장엄한 산, 해묵은 노송들이 시원스레 뻗어올라 있고, 청정한 솔바람 소리 실려오는 내 나라의 절집이 어디 그만 못하겠는가.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향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