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개론] 연기와 무상

2019-04-25     장휘옥, 김사업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난다. 
여래는 그 인연을 설하신다. 
모든 것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한다. 
이것이 위대한 사문의 가르침일세.” (연기법송)

|    연기(緣起) — 불교 교리의 핵심
중생인 우리는 탐욕과 집착, 어리석음에 의해 촉발된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행복에는 항상 ‘괴로움’이라는 부작용이 따른다. 불교에서는 중생의 생각과 행동이 작동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8가지로 요약하여 ‘8세간법’이라 부른다. 이 8가지를 축으로 하여 중생의 생각과 행동은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8가지란, 이익(得)과 손해(不得), 명예(譽)와 불명예(非譽), 칭찬(讚)과 비난(毁), 안락(樂)과 고통(苦)이다.

나의 이익과 명예, 칭찬과 안락은 끝없이 얻으려 하고, 나의 손해와 불명예, 비난과 고통은 결코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이 탐욕과 집착이 태풍의 눈이 되어, 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바람을 일으킨다. 탐욕과 집착으로 일어난 이 생각과 행동으로 나를 지키고 유지하려고 평생 애를 쓰고 또 쓰지만 괴로움은 수시로 고개를 들고, 늙음과 병과 죽음은 소리 없이 다가와 어느새 창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꽃을 따는 데 정신이 없는 사이, 
죽음은 그를 꼼짝도 못 하게 제압한다. 
꽃을 바라는 마음 아직 채워지기도 전에.
꽃을 따는 데 정신이 없는 사이, 
죽음은 그를 낚아채 간다. 
잠든 마을을 홍수가 휩쓸어 가듯이.
(『법구경』 제 48·47송)

후회 없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평생을 홀로 사신 지인 한 분이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고독사하셨다. 세상을 떠난 1주일 뒤에야 경비원에게 발견되었다. 평생의 재산과 명예를 다 두고 그렇게 가셨다. 함께 살아왔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치매 증세를 보일 때면 누구라도 출가하기 전 석가모니의 심정이 절절히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나야말로 늙어 갈 몸이고 똑같이 늙음을 피할 수 없다. … 
내가 이렇게 보았을 때 청춘에 대한 나의 교만은 산산이 부서졌다.
(『앙굿따라 니까야』 3·38·2)

불교는 노(老)·병(病)·사(死)를 비롯한 모든 괴로움의 영원한 소멸인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돈과 명예에 대한 맹목적 추구와 획득은 한편으로는 행복도 주지만 그것으로 인해 분쟁과 스트레스·좌절도 초래한다. 마약을 하면 당장은 편하지만 부작용이 있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도 괴로움이라는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이다.

열반은 ‘부작용이 없는 영원한 행복’이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바르게 알고(정견)’ ‘바르게 늘 자각하여(정념)’ 게으름 없이 실천·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열반의 동의어로 ‘해탈’이라는 용어가 대신 사용되기도 한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열반은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세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생에서 열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열반을 실현하는 데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석가모니 당시 야사(Yasa)는 재가자였지만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열반에 이르렀다. 재가자 야사가 열반에 이르렀다는 것은 거의 모든 부파가 인정한 사실이었다. 경전에는 장래 열반에 이를 것이 확정된 재가 신자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재가자도 열반이 가능하다는 인식은 인도불교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해탈을 지향하고자 할 때, 무엇부터 바르게 알고 자각해야 할까? 연기(緣起)이다. 불교사 전체를 통하여 불교 교리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 단 하나만 말하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연기’다. 연기는 불교 교리 전체를 꿰는 실이요, 정수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세계 사상사의 견지에서도 실로 귀중한 사상이며, 앞으로도 인류에 크게 공헌할 사상이다.

연기를 중심으로 불교사상사가 전개되어 온 만큼 실로 다양한 연기설이 있다. 12지연기, 업감연기, 아뢰야연기, 법계연기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어느 특정 연기설에 국한하지 않고 연기 일반의 핵심만 말하고자 한다.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연(緣, pratītya)’은 ‘조건에 의해’를 뜻하고 ‘기(起, samutpāda)’는 ‘일어남, 생겨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는 ‘조건에 의해 생겨남’, ‘원인에 의한 발생’을 뜻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생겨날 만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라디오를 켜면 소리가 난다. 없던 소리가 생겨난 것이다. 소리가 나는 것이 연기의 ‘기(起)’에 해당한다. “소리가 왜 날까?”를 설명하는 부분이 연기의 ‘연(緣)’으로, 소리가 날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라디오 소리가 나기 위해선 실로 무수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중에서 세 가지만 예로 들어 보자. 전파를 보내는 방송국이 있어야 하고, 전파를 수신하는 라디오라는 기계, 그리고 라디오를 켜는 사람의 동작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쟁이 나서 방송국이 파괴되었다고 하자. 그런데도 계속 나는 라디오 소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방송국이 파괴되면 왜 나던 소리가 멈출까? 라디오 소리는 방송국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나기 때문이다. 만약 라디오 소리가 방송국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방송국의 파괴와 관계없이 소리는 계속 날 것이다. 
따라서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해 조건이 갖추어질 때만 생겨나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결과물인 그것도 함께 변하거나 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기’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이지만,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지금 살펴본 대로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함께 변하고 소멸한다’이다. 이때의 조건을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이라고 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연기의 이치에 따라 생겨나고 소멸한다. 연기의 이치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만고불변의 진리다.

멀리 숲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가 날 만한 조건이 갖추어져 소리가 난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항상 있다가 지금 홀연히 여기에 나타나서 소리가 난다고 하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을 것이다. 

이 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을 때, “그 소리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그 소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이 갖추어졌기에 소리가 났다가 인연이 다했기에 그냥 소멸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연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그 바람 소리가 정말 마음에 든다고 해서 똑같은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방금 전 바람 소리와 지금 바람 소리는 다르며, 설사 녹음을 해 놓았다고 해도 실제 그 바람 소리와 녹음기에서 나는 소리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소리라는 것이 변치 않고 어딘가에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다시 불러올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러나 소리는 인연이 다하면 소멸할 뿐이다.

이처럼 소리는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를 한문으로 표현한 것이 ‘불래불거(不來不去)’인데, 불교 성전에 자주 나오는 용어다. 고정된 A라는 소리가 변치 않고 어딘가에 항상 있다면 소리는 오고 갈 수 있다. 그러나 소리는 조건이 갖추어지면 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연기의 소산물일 뿐이라서 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불래불거’는 소리는 연기한 것이며, 항상 변치 않고 고정된 채 늘 존재하는 소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이다. 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불래불거’다. 그렇다면 ‘나’란 무엇인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었을까? 현재의 나를 만든 인연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앞으로 진행될 설명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모두 바람 소리와 같이 연기한 것이다. 나 자신도 연기한 것이요, 기쁨과 슬픔도, 태어남과 죽음도 모두 연기한 것이다. 물질적·정신적인 무엇 가운데 연기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뭔가가 연기했다는 것은 조건(인연)이 갖추어졌기에 생겨났다는 것이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모든 것은 조건이 갖추어졌기에 생겨난 것이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구절은 골수에 새겨 되씹고 되씹어서, 내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이 구절처럼 보이고 느껴지도록 사무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에는 좋은 것은 끝까지 손에 쥐려 하고 싫은 것은 절대 수용하지 않으려는 집착이 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없어지는 연기의 소산물 아닌가? 떠나보낼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는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진리를 등진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탐욕과 집착은 연기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괴로움과 얽매임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석가모니 재세 당시 그의 연기의 가르침을 듣고 제자가 된 이들이 많았다.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로 꼽히는 사리불과 목건련도 그랬다. 두 사람은 마가다국의 같은 고향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친했으며 발군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성장해서는 회의론자 산자야의 문하에 함께 출가했다. 스승 산자야는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고 자신의 제자 250명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석가모니 최초의 제자 5명 중 한 사람인 앗사지(Assaji, 馬勝)가 탁발하고 있을 때, 그의 청정하고 단아한 모습에 감명받은 사리불이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며 그 가르침은 무엇인지 물었다. 석가모니의 제자라고 밝힌 앗사지가 스승의 가르침을 ‘연기법송(緣起法頌)’이라 일컬어지는 게송으로 읊었다. 이 게송을 들은 사리불은 목건련과 함께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데리고 석가모니에 출가했다. 연기의 내용을 간결하게 표현한 ‘연기법송’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난다. 
여래는 그 인연을 설하신다.
모든 것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한다. 
이것이 위대한 사문의 가르침일세.

|    무상(無常)과 그 초월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고, 지금 누리고 있는 부와 명예와 건강도 때가 되면 매몰차게 떠난다. 내가 이 세상에 살 수 있는 날도 그리 길지 않다. 여기까지만 예를 들어도 가슴 한구석에 ‘무상하다!’는 감정이 피어오를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참으로 무상하다.

초기 경전에는 ‘무상(無常)’이라는 말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어떤 이론적인 설명도 없이 불쑥 나온다는 점이다. 초기 경전에서는 무상의 이유나 근거를 파고드는 일이 없다. 무상은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불교 용어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한다. 제행무상은 ‘제행은 무상이다’로 풀어서 읽는다. 여기서 무상(無常)이란 ‘항상성(常)이 없다’, 즉 ‘끊임없이 변한다’는 뜻이다. 제행에서 ‘제(諸)’는 ‘모든’을 의미하고, ‘행(行, saṃskāra, saṅkhāra)’은 ‘인연·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 즉 ‘연기한 것’을 뜻한다. 불교에 따르면 모든 것은 연기한 것이므로 ‘제행’은 결국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제행무상’은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를 뜻한다. ‘행(行)’이란 용어는 오온(五蘊)이나 12지연기에서도 나오는데, 그 의미는 약간씩 달라 복잡하다.

‘왜 끊임없이 변하며 무상한가?’에 대한 답을 굳이 찾는다면 모든 것은 연기하기 때문이다. 조건이 지속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무상할 수밖에 없다.

이 무상한 세계로부터 도피할 곳은 없는가? 없다. 있는 것은 무상한 세계뿐이다. 죽은 자가 없는 집은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이 잘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무상한 세계 말고 영원의 세계가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상의 초월도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무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연꽃이 의미가 있는 것은 맑은 물이 아니라 진흙탕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데 있다. 오갈 데 없는 무상의 진흙탕에서 영원이라는 꽃 한 송이는 어떻게 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라. 아무리 거부해도 있는 것은 생멸 변화하는 무상한 세계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다. 진리대로 산다는 것은 무상한 세계를 무상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영원한 평안과 대자유는 없다.

석가모니 당시에 가우따미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한창 재롱을 부리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우따미는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 아이를 살려 낼 약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이의 시신은 부패하기 시작하여 냄새가 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고 내려놓지 못했다.

“이 아이를 살려 낼 약이 없습니까?” 이 외침은 무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절규다. 석가모니는 가우따미에게 살려 낼 약의 원료가 되는 겨자씨를 얻어 오라고 했다. 겨자씨는 흔한 조미료였기 때문에 어느 집에나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죽은 자가 한 사람도 없는 집에서 얻어 와야 한다고 했다.

가까운 사람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적이 없는 집은 한 곳도 없었으므로 결국 빈손으로 돌아온 가우따미에게 석가모니는 눈이 번쩍 뜨이는 질문을 던진다. “아직도 겨자씨가 필요하느냐?” 실로 캄캄한 무지를 일깨우는 천금 같은 한마디다. 가우따미는 대답한다. “아닙니다. 이제 필요 없습니다.” 이 대답에서 우리는 무상을 초월한 가우따미를 본다. 마침내 가우따미는 아이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아이를 화장하고서 장례를 치른 뒤 출가했다. 그러고는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가 부여안고 있는 것은 비단 죽은 아이만이 아니다. 실패에 따른 좌절, 누군가에게서 받은 모욕, 배신감 등 마음속에 응어리져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모두 죽은 아이에 해당한다. 원하는 것의 영원한 지속을 바라는 마음이 무상한 현실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에 응어리가 맺힌 것이다. 원치 않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은 해야겠지만, 이미 벌어져 끝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가우따미가 죽은 아들을 내려놓듯이, 우리도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한 응어리를 마음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무상 속에서 영원으로 승화하는 첫걸음이다.

방금 전의 바람 소리가 듣기 좋았다고 해서 또다시 들을 수 있겠는가? 지나간 바람 소리를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목을 매달면 매달수록 골병만 깊어질 따름이다.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 때문에 애석하게도 지금 불고 있는 청량한 바람 소리는 놓치고 만다.

무상은 몽매의 타성에 빠진 우리들을 일깨우는 스승이기도 하다. 미국의 저명한 불교학자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생에는 세 명의 천사가 내려온다. 첫 번째는 늙음, 두 번째는 병듦, 세 번째는 죽음이다. 이 셋을 만나지 않고서는 인생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우리는 노·병·사로 대표되는 무상을 직시하는 것을 통해 집착과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 석가모니가 이 세상을 떠나며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은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거나 방심하지 말고 정진하라.”였다.    

장휘옥ㆍ김사업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