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들] 남원 귀정사 중묵 처사

지치고 힘들 때 내게 기대 언제나 네 곁에 서 있을게

2019-04-25     김우진

남원시 산동면 대상 마을. 귀정사가 자리한 곳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시골의 조용한 동네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이라 세상과 단절된 기분마저 든다. 그곳에 도시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살던 사람들이 찾아가기 시작했다. 저마다 하나씩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치유해보겠다며 귀정사로 향했다.

사진:최배문

|    주지에서 관리인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귀정사를 찾아 담당자를 만났다. 중묵 처사. 스스로를 처사로 칭하고 종무실장 역할을 하는 중묵 처사는 14년 전 처음 귀정사에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재정비한 일등공신이다. 흔적만 남아있던 절에서 활동가들의 쉼터라고 불리기까지, 귀정사와 중묵 처사 모두 할 이야기가 많았다.

“지금은 환속을 했지만, 도법 스님 인연으로 1995년에 출가를 했습니다. 제가 장애가 있어서 출가를 하기까지도 어려움이 있었어요. 도법 스님의 배려로 출가자가 된 뒤에는 실상사에서 계속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 귀정사로 오게 되었죠.”

2006년, 중묵 처사는 관리할 사람이 없던 절인 귀정사 주지로 부임했다. 귀정사는 마을과도 제법 거리가 있고, 인적이 드문 산어귀에 있어 접근성이 낮았다. 보수해야 할 건물이 대부분이고, 새로 증축해야 할 것도 있었다. 중묵 처사는 주지로 있던 3년간 불사를 진행했다.

찬란한 자연 속에 사람은 혼자였다. 예불 올리고 밥 해먹으며 살았다. 그래도 이렇게 절이 사라지지 않은 게 신기했다. 중묵 처사는 인근에 마을이 있었기에 그래도 유지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가깝지 않은 거리지만, 기도를 하기 위해 종종 찾는 마을 주민들 덕이라는 생각에 마을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고 발심했다.

“마을 어르신들이 글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말이야 당연히 하는 거지만, 글씨를 써야 할 때는 도움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한글학당을 열었습니다. 절까지 올라오기 힘드니까 제가 마을 회관으로 내려갔어요. 귀정사가 이런 활동을 하는 걸 마을 주민들이 또 좋게 보셨어요. 국가 지원을 담당하는 지역 관리들도 귀정사의 주민 활동을 들었는지 3년간 지원이 이어졌습니다. 운이 좋았죠.”

3년 불사 후 그는 옷을 벗었다. 환속해서 다시 재가불자가 되었다. 파계한 사람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다시는 절집과 인연 맺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한 번 이어진 인연의 끈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앞으로 재가자들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는 도법 스님 말씀을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귀정사로 돌아와 주지가 아닌 관리인으로 소임을 시작했다. 스님일 때는 몰랐던 세상의 모습이 보였다. 부처님 가르침을 새로운 방면으로 생각하고, 몸소 느끼는 기회가 되었다.

“귀정사에서의 역할은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예불을 올리고, 절의 전반적인 일을 관리하고 있죠. 다만 절 밖에 가정이 생기고, 사람들과 부대끼는 활동이 늘었습니다. 재가자로 산다는 것도 참 치열하더라고요. 여러모로 말이죠.(웃음)”

|    새로운 이름, 인드라망 쉼터
중묵 처사의 노력으로 귀정사는 조금씩 활기를 띠었다. 귀농학교를 진행하며 새로운 농촌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사람들 발길이 제법 늘었다. 그런 와중에 우연한 계기로 귀정사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회 활동가들의 쉼터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2013년 5월. 귀정사에는 새로운 이름이 하나 생겼다. 인드라망 사회연대 쉼터. 평등과 평화, 모든 삶의 존엄을 외치는 이들을 위한 휴식처다. 사회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공동체운동 등 각계각층에서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소리치는 활동가들이 힘에 부칠 때쯤 귀정사를 찾았다.

“귀정사의 쉼터는 송경동 시인의 제안에서 시작됐어요. 2013년 초,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행사 이후 많이 지쳐있던 송 시인이 도법 스님의 추천으로 귀정사에 왔습니다. 와서 쉬면서 많이 편안했던 것 같아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송 시인이 지친 활동가들에게 쉴 곳이 필요하다며 귀정사 같은 곳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중묵 처사는 송경동 시인의 이야기에 큰 고민 없이 그렇게 하자고 답했다. 힘들어하는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 불교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작은 방 4개가 있었고 그 정도면 충분히 사람들이 와서 쉬었다 가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쉼터가 문을 열자 사람들의 문의가 많이 왔다. 방 4개로는 부족했다.

“그해 7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사찰 옆 숲에 작은 집을 지었어요. 어떤 집은 나무를 쌓아 귀틀집을 짓고, 어떤 집은 벽돌을 더 이용하기도 했죠. 저마다 다른 모양의 집이 완성됐습니다.”

새로운 공간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마련됐다. 인근 마을에 귀농한 인연들 중에 목수 일을 할 수 있는 이들이 힘을 보태주었다. 쉼터를 찾은 활동가들도 노동의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라 뼈대를 놓는 것부터 전기 배선을 까는 것까지 도움을 주었다. 귀정사를 중심으로 인드라망처럼 엮인 인연들이 그들의 손으로 쉼터를 만들어 나갔다.

2013년 10월, 본격적으로 개소식을 하고, 지금까지 매년 백여 명의 활동가들이 쉼터를 찾아 새로운 원력을 얻고 나갔다. 쉼터의 방은 모두 개인 독채이며, 13채가 준비되어 있다. 한 번에 3개월까지 쉴 수 있으며, 운영회의 논의 후 1회 한해서 3개월 연장이 가능하다. 

“보통 5~6명 정도가 귀정사에 매일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하루 이틀 머무는 사람부터 일주일, 한 달, 세 달 등 다양해요. 저마다 사연이 다 다르고, 저마다 필요한 시간이 다 다르니까요.”

|    어쩌면 가까이 있을지도 몰라. 쉼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아픔을 준 것을 향해 저항했다. 거부하고 투쟁하는 사이 마음에 화가 생겼다. 밖으로 분출하고 쏟아내도 상처받는 것은 자신이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지만, 구조는 쳇바퀴 돌듯 제자리였다. 상처가 덧나고 곪기를 반복, 아픔에 지친 사람들은 치유가 필요했다.

쉼터에서 생활은 부단히도 무난했다. 특별할 게 없는 시간이 특별하게 주어진다. 사람들은 사색하고 산책하며, 주변을 살피고 또 나를 살핀다. 시골 사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일들의 반복이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안식이 되었다. 귀정사와 중묵 처사는 그 자리에 있을 뿐이며,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스스로였다.

예불 소리, 풍경 소리,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이 스치는 소리들을 들었다. 느리게만 변하는 산의 모습,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 눈이 쌓이는 나무와 꽃이 피는 들판, 별이 떠 있는 하늘의 모습들이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오래된 향수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게 다가왔다.

그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저절로 쉼터에 동화됐다. 절에 부족한 일손을 자연스레 더했다. 어떤 이는 밭을 가꾸며 농작물을 키우기도 하고, 어떤 이는 쉼터 건물들의 보수를 자처했다. 함께 식탁을 차리고, 함께 마당을 정리했다. 시간이 많이 남아 나 아닌 남을 위해 사용했다. 모두가 그랬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불자이거나 불교를 잘 알고 오시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종교에는 관심이 없는 분들이 많고요. 천주교인도 있고, 기독교인도 있습니다. 지금 계신 분들 중에서도 불자는 한 분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이분들이 자연스레 귀정사와 어우러집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가 함께 어울려요.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열어서 상대를 받아들입니다.”

중묵 처사는 이러한 과정이 불교라고 생각했다. 말을 통해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 조금씩 나아지는 것. 나누고 비우는 과정 속에서 웃으며 행복해지는 과정들이 모두 불교였다. ‘불교가 이런 면을 가지고 있구나!’ 알리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종교를 어필하는 방법이라 여겼다.

“어쩌면 여기는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죠. 조직 논리, 경제 논리, 권력과 명예 같은 것은 이곳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분은 꿈속 세계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여기도 현실 세계입니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있는 곳이죠.”

중묵 처사는 자비로운 마음이 세상 가득하길 바라며 남원의 산골짜기 귀정사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한 번 인드라망 쉼터를 찾은 이들은 남원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이서 쉼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