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작가들의 한 물건] 컵홀더 함부로 구기지 마라

2019-04-25     김덕희

요즘은 봄볕을 쬐는 게 좋아져서 점심 식사 후 커피를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 골목길을 돌고 돌아 걷다가 사무실로 복귀하곤 한다. 갓 나온 커피는 뜨겁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컵 속에서 출렁이다 뚜껑의 흡입구로 넘칠까 봐 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지고 그렇게 느려진 걸음만큼 내 주의를 오감에 더 할애할 수 있다. 지금은 남의 집 담장 위로 꽃봉오리를 부풀리는 목련에 시선이 오래 머무는데 몇 주 뒤에는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누군가 나를 부르는 기분으로 두리번거리게 될 것이다. 한 동네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읽게 되는 계절의 행간이다.

산책을 하지 않고 곧장 복귀하던 겨울엔 늘 이십 분쯤 휴게시간이 남았는데 요즘은 곧장 오후 업무 시간에 돌입해버리니 어딘가 아쉽다. 얼른 업무 모드로 전환하지 못해 책상 위에 흩어진 것들을 정리하다가 이제는 마시기 알맞게 식은 커피를 들고 상념에 빠진다.

“음료가 뜨겁거나 차가울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컵에 띠처럼 덧댄 종이에 자그맣게 적힌 문구를 읽다가 문득 이 물건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컵홀더’라기도 하고 ‘컵슬리브’라고 부르기도 하는 듯했다. 특정 업체의 이름이긴 한데 ‘잔띠’라는 것도 발견했다. 잔에 두른 띠라는 말이겠고 우리말을 쓰고자 한 정성이 반갑고 고마워서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내가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구경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한국에 스타벅스가 들어온 해가 1999년이라고 하는데 대학 2학년 때다. 그때야 우리로선 주머니에 술값은 늘 있어도 밥값과 책값은 없던 시절이니 자판기에서 믹스 커피나 뽑아 마셨지 전문점에 가서 학생 식당의 한 끼 가격보다 비싸게 주고 사 마셨을 리는 없고, 그렇게 어영부영 몇 년이 더 흘러 커피가 약간의 허세로 취급되던 시절이 다 지나고 나서야 슬슬 익숙해졌던 것 같다.

 

내 기억에 당시의 컵홀더는 특별한 디자인이랄 게 없었고 재질도 라면 박스의 한 조각인 듯 누렇고 거친 재생지 느낌이었다. 오로지 뜨겁거나 찬 음료로부터 사람의 손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였는데 언제부턴가 디자인과 재질이 다양해졌다. 대중에게 노출되는 공간이라면 바늘 꽂을 자리만 있어도 광고를 싣는 자본의 속성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커피점의 상호가 멋들어지게 인쇄된 광고물을 들고 열심히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니는 셈이다. 그 덕에 커피를 좀 싸게 마시는가 하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손해 보는 기분까지 느낄 필요야 있을까마는 흔쾌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라면 박스를 덧댄 듯한 때로 돌아가자는 얘긴가 하면 그렇진 않다. 기왕이면 내가 들고 다니는 물건이 근사하길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필요도 없다. 다만 낭비가 되지는 말아야 환경을 향한 죄책감을 덜겠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찜찜하단 소리다. (텀블러를 세척하고 말려가며 들고 다니는 수고를 감당할 각오가 아직은 되어 있지 않으니 이런 소리를 더 길게 해선 안 되겠다.) 그나마 다 쓴 종이컵과 홀더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것으로 면죄부를 얻어 볼까 싶다. 매일 밖에서 들고 들어오는 종이컵과 홀더를 내 자리 옆의 책장에 쌓아둔다. 낱개로 다른 쓰레기에 섞어서 버리는 것보다 모아서 따로 내놓으면 재생되는 길에 놓일까 싶어서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손수레에 실려 간다면 마음이 좀 놓이겠다.

한편으론, 컵홀더 정도는 재사용해도 되지 않나 싶다. 실로 짠 홀더를 본 적이 있는데 아마 다회용 홀더라면 바로 그런 것이리라. 환경을 위해서라면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것이 무엇보다 합당하겠지만 그 부피와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일이 골치다. 경제적 가치를 세밀히 따져보진 못했지만 세척에 드는 물값과 세제 값, 그리고 세척한 뒤 손에 바를 핸드크림까지 생각해보자. 겨울이라면 온수를 틀어야 할 테니 가스비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치사한 소리 같지만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그냥 일회용 컵을 써도 무방하겠단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컵홀더는 어떨까? 매우 다행스럽게도 시중의 커피 전문점에서 테이크아웃용으로 사용하는 일회용 컵들은 주로 아래쪽이 좁고 위쪽이 넓은 형태라 어느 가게의 어떤 컵홀더라도 고정되는 위치만 다를 뿐 어지간하면 호환이 되는 구조다. 게다가 접어버리면 납작해지면서 부피가 한결 줄어든다. 남성들이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반지갑 정도라 휴대의 부담도 없다.

다시 생각해봐도 컵홀더는 한 번 쓰고 그냥 버려지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 효용의 고마움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은가. 불발된 포탄이 발 앞에 떨어졌을 때 부하를 살리고자 지휘관이 그것을 껴안듯 컵홀더는 온몸으로 뜨거운 음료를 감싸서는 적당한 온기만을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모진 냉기를 막아줄 때는 어떠하던가. 컵 바깥에 응결된 이슬로 속살이 눅눅히 젖어들면서도 바깥으로는 단 한 방울의 물기조차 떠넘기지 않았다. 그 숭고한 희생을 우리는 여태 너무나 당연시해왔다. 나는 이 순간 힘껏 한번 외쳐보고 싶다. 컵홀더 함부로 구기지 마라, 너는 누군가를 위해 한 번이라도 뜨거움을 견뎌준 적이 있더냐.

살다 보면 너무 이글거리거나 지나치게 얼어붙어 있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가급적 직접 부딪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다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괴물이 되어간다. 그리고 협곡 안으로 깊숙이 숨어 버린다. 하지만 모두가 거리를 두거나 피해 다니는 것은 아니다. 홀연히 나타나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망설임 없이 그 ‘괴물’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있다. 수많은 풍문과 소문이 합세하여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있으나 소용없다. 그는 ‘괴물’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좀 다치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협곡 저 안쪽으로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는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찬다. 나는 분명히 말렸다고 중얼거린다. 마침내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협곡 입구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호들갑스런 소란에 사람들은 부랴부랴 몰려들어 목을 빼고 기다린다. 해는 서둘러 산을 넘어가는 중이고 지금 눈에 얼핏 보이는 그는 오지랖 넓던 사람인지 아니면 ‘괴물’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두려운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이윽고 그 형체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 앞에 서서 이제는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말렸어.’라고 중얼거렸던 사람들은 ‘나는 사실 안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이번엔 다 들으라고 소리친다. 이런 이야기는 문학에서 자주 봐온 플롯일 것이다. 혹시 글쎄다 싶으면 『미녀와 야수』만 떠올려 봐도 충분할 것 같다.

요즘 나는 매일같이 불안하고 수상한 시절을 지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너나 할 것 없이 쉽게 불붙고 쉽게 닫혀버린다. 그로 인한 갈등은 하나같이 날카롭고 뾰족하고 거칠다. 얼마 전에 SNS에서 화제가 된 영상이 있다. 취객이 열차 플랫폼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데 경찰 둘이서 제압하려 할수록 더 흥분하기만 했다. 그때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한 청년이 나서서 취객을 조용히 껴안자 취객은 거짓말처럼 온순해졌고 울음까지 터뜨렸다. 물리력으로 제압하려던 경찰들은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상은 삽시간에 퍼졌고 조회 수가 폭발했다. 우리는 그때 그 청년에게서 컵홀더의 미덕을 본 게 아닐까? 

다시 한 번 얘기하는데, 이제부터 컵홀더 함부로 구기지 말자.    

김덕희
소설가. 1979년 경북 포항 출생.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제23회 한무숙문학상 수상. 소설집 『급소』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