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에세이] 천 년의 수도 경주에서 미술사학의 길을 개척하다

2019-04-25     강우방

대학 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칠 뻔했다.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는 것을 지나칠 수 없다. ‘동시에 문학이며 동시에 철학이며 동시에 음악이며 동시에 그림이며 동시에 글씨이며 동시에 종교인 그 무엇을 추구한다’고 매일 노래처럼 읊조렸다. 그 꿈이 먼 훗날 이루어진 것은 대학 시절 막연히 열망했던 소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기는 매일 쓰다가 잊어버렸다가 다시 쓰곤 했는데 최근 15년 동안은 매일 일기를 빠트리지 않고 쓰고 있다. 최근 일어난 새로운 학문의 변화 과정을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은 대학 시절의 습관 때문이리라.

그리고 매일 음악을 들었다. 그 계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박판길 음악 선생님이 만들어 주셨다. 어느 날 음악 시간에 박 선생님은 포터블 축음기를 들고 교실로 들어오시더니 턴테이블에 레코드 한 장을 올려놓고 드보르작의 제9교향곡, <신세계로부터>를 틀어주셨다. 당시에는 라디오뿐이어서 축음기는 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구경할 생각도 못 할 때였다. 클래식은 들어본 적도 없을 때라,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에 몰입하여 깊은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신세계 교향곡은 참으로 나에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차라리 충격이었다. 눈을 떠 보니 현실이 그대로 신세계였다. 먼 훗날 내가 인류의 문화사에서 신세계를 열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미군 방송에서 밤 9시부터 12시까지 클래식을 들려주었고 아침 5시부터 8시까지 재방송이 있어서 매일 6시간씩 클래식을 들었다. 반복해서 들으니 모르는 음악이 없을 정도였다. 그 후 지금까지 동서양의 모든 장르에 걸쳐 음악과 함께 살고 있다.

서예전.1968년 결혼 직후

그리고 나의 아내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그런 마음씨 착한 미인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 가운데 나를 따르던 친구가 있어서 가끔 집에 와 여러 가지 상의도 하고 책을 빌려 가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의 롤모델이었던 것이다. 한참 서양화를 그리고 있을 때 마땅한 작업실이 없어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했더니, 자기 집에 빈 공간이 많으니 와서 그리라고 했다. 언덕 꼭대기에 교회가 있는, 지금의 한남동 옛집들이 있는 곳이다.

바깥채가 비어 있어서 그곳에 그림이나 붓글씨를 걸어놓기도 하고,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고 담요를 놓고 붓글씨도 썼다. 그 광경을 본 여성이 바로 친구 동생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난로를 피워도 추웠다. 그런 악조건에서 작품을 열심히 하는 광경을 보고 감동을 받아 가끔 계란 후라이도 해서 갖다 주었는데, 그러는 사이 사랑이 싹튼 것이다. 아내는 내가 너무 가련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함께 서예반에서 붓글씨를 썼고, 사군자도 그렸다. 아내의 글씨는 한마디로 평하자면, 사무사(思無邪)라 말할 수 있다. 결혼 후에도 함께 붓글씨와 사군자 치는 법 배우기를 계속했다. 서예반 전시 때 아내는 해서를 썼고, 나는 주 나라 때 만든 산씨반(散氏盤)의 전서(篆書)를 써서 두 작품을 출품했다. 약혼 후일 것이다. 임서한 두 작품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서 반가웠다. (사진 1)

이제 학교도 그만두고 결혼도 하고 꿈에 그리던 직장도 얻었으니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공무원 봉급이라고 해보아야 임시직이어서 보잘것없었고 게다가 이듬해 첫아들 인구가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안양으로 이사해 조그만 약국을 차렸다.

국립박물관에 들어가던 해 여름에 미술과의 정양모 학예관, 이준구 학예사, 그리고 간송박물관의 최완수 씨와 나는 송광사 불화를 조사했다. 처음 보는 불화를 살피면서 기록하는 일을 열흘 동안 해야 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화 앞에서 망연했다. 부분을 스케치하고 그저 본대로 기록하는 사이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인적 없는 뜨거운 여름 송광사의 적막한 분위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듬해 여름에는 천은사 불화 조사에 계속하여 참가했다. 당시에는 인적이 거의 없어서 사찰은 고요했으며 후불탱이나 괘불들을 대웅전 앞마당으로 옮겨서 사진 촬영을 했다. 천은사 괘불을 마당 당간지주에 걸고 조사했다.(사진 2) 그 후 지속적으로 불화를 연구하였기에 훗날 조선불화는 물론 고려불화를 100% 해석할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천은사 조사 기념 사진.배경은 천은사 괘불.

매해 겨울에는 해남 강진 고려청자 도요지(陶窯址)를 조사했다. 밭 사이 돌무지에서 고려청자 편들을 고르는 작업이었다. 그 당시 밭길에 고려청자 편들이 깔려 있어서 밭을 갈 때 고려청자 편들을 돌과 함께 곳곳에 쌓아두었는데, 그 돌무지에서 고려청자 파편들을 고르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이 훗날 고려청자 연구의 바탕이 되었다. 그 이듬해는 요지(窯址)를 발굴하여 고려청자 기와도 찾아냈다. 모란꽃이 새겨진 수막새와 추상적 영기문이 새겨진 암막새들 파편이었는데, 그로부터 50년 후에 그 기와의 의미를 완벽히 밝혀낸 것도 그 인연 때문이리라. 수막새의 모란은 모란이 아니었다. 영기꽃(靈氣花 혹은 靈花, 필자가 지은 이름으로 자연의 꽃과 다른 조형예술품에 표현된 승화된 꽃으로 씨앗이 승화되어 보주를 맺는 꽃을 가리킨다.)으로부터 양쪽으로 추상적 영기문이 발산하고 있으니 모란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모란이라고 알고 있던 것이 모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결정적 작품이었음을 당시에는 물론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인연으로 인해 훗날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고려청자에 대한 역사적 강연도 있었으리라.

그토록 갈망했던 박물관에서 꿈을 피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떠날 생각을 했다.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듬해에 일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고 미술부 내에 약간의 잡음이 있었다. 결벽증이 있는 나는 서슴지 않고 1년 6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학예사가 된 지 6개월 만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짧은 시기가 꽤 귀중한 시간이었다. 사직서를 낸 후 한 해 동안 집에서 쉬면서 앞날을 모색하고 있었다. 문득 경주를 떠올렸다. 한번쯤 직업을 가지면서 공부하려고 시도했던 경주가 아닌가. 우리나라 문화의 황금기인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1000년 수도 경주에는 수많은 유적 유물이 있으니, 그 시대 미술을 알려면 경주에 살면서 연구해야 함을 깨달았다. ‘예술은 모름지기 풍토와 깊은 관계가 있으니’ 아예 경주로 내려가서 우리 문화 완성기 시대를 자연과 함께 살면서 체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삶과 자연과 예술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전성기, 나아가 한국 미술의 모태가 통일신라에 있지 않은가. 신라 1000년 불교 미술을 알면 나머지 1000년은 쉽게 풀리리라.

최순우 선생님께 복직을 부탁드리고 1970년 가을 경주로 이사했다. 그해 여름 첫째 딸 소연이가 탄생했다. 두 달 된 소연이(현재 중앙승가대학 미술사학 교수)까지 네 식구가 함께, 완공된 지 겨우 석 달밖에 안 돼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렸다. 그해 겨울 국립경주박물관의 최초 학예사로 정착하게 되었다. 불교 미술품이 지천으로 깔린 경주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 경주는 그야말로 시골이어서 정신적으로 의탁할 분도 계시지 않고 더구나 책도 없어서 모든 일을 홀로 개척해 나가야 했다. 경주로 간다는 것은 그곳으로 유배 가는 것으로 생각할 때였다.

첫 작업은 『삼국유사』를 정독하면서 주제별로 카드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처 유적을 다니지 않아 충분히 파악할 수 없어서 유적 지도에 의지하여 답사를 시작했다. 『삼국사기』도 읽었으나 전쟁이나 정치적 사건만 기록되어 있었다. 대신 『삼국유사』에 정사에 누락되었던 당시 불교 관련 미술이나 괴력난신(怪力亂神) 관련 이야기 등이 모두 담겨 있었다. 만일 일연(一然) 스님이 안 계셨더라면 신라 1000년의 문화사는 오리무중이었으리라.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한국미술사 연구의 고전으로 필독서라 할 수 있는데, 미술사학을 연구하는 교수나 학생들은 그 책을 그다지 정독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에게도 필독서이다. 그런데 경주 일대를 답사하여야 그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책이다. 만일 경주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현장감이 없어서 나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방치되었던 경주 유적에 큰 관심을 가지고 경주 정화 사업에 착수했다. 그때만 해도 왕릉을 언덕으로 생각하고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큰 사찰 터의 평평한 자리에도 민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화의 첫째 목적은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왕릉(후에 황남대총이라 이름 지었다.)을 발굴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이 마왕퇴 유적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적지에서 세계를 놀라게 할 작품을 발굴하여 자긍심을 드높이고 있었다. 모두가 중국의 문화적 우수성에 감탄하고 있을 즈음, 박정희 대통령도 그런 야망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왕릉의 발굴은 학계의 반대에 부딪혀 그 옆의 작은 천마총(天馬塚)을 먼저 발굴하기로 했다. 그런데 경주를 정화하려면 우선 좁은 도로를 넓히고 없는 도로를 새로 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파기만 하면 온통 무덤들이라 우리나라 전역의 대학 고고학자들이 모두 달려와 서둘러 발굴을 시작하니 온 경주가 벌집 쑤셔놓은 듯 시끌벅적하고 난장판이었다. 발굴 자격이 없는 교수들도 많아서 나는 분노했다. 당시 국립박물관에서 <박물관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두더지의 변’이란 난이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의 무지막지한 계획을 강력히 비판하는 글을 보내 실었다. 당시 최순우 박물관장이 나에게 전화하여 서울로 빨리 올라갔더니 신문을 앞에 놓고 하시는 말씀이 청와대로부터 질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배포한 7000부의 신문을 모두 회수하여 박물관 뒤뜰에서 불태우고, 글을 완곡하게 다시 써서 발행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매우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공무원이 어떻게 대통령을 심하게 비판하는가 하여 나는 죄송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신념이 확고하므로 그로부터 경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적을 해치는 불합리하고 불미스러운 일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일반 신문에 기고하기로 결심했다.

그 와중에 국립경주박물관이 담당했던 계림로 확장 공사 중 삼국시대 무덤에서 화려하고 정교한 보검 장식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사진 3) 신라 시대 유물로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당시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훗날 방문연구원으로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 1년간 수학하고 있을 때,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도록을 살피며 중앙아시아 키질 석굴 벽화에서 칼을 허리에 찬 귀공자 그림에서 똑같은 칼 장식을 볼 수 있었고 귀국하여 널리 알렸다. 그 인연으로 훗날 중앙아시아의 키질 석굴에서 놀라운 조형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키질 석굴 연구도 평생 걸린 셈이다. 보검 장식의 상징을 밝히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칼이라고 하면 생명을 죽이는 무서운 무기로만 생각하지만, 한편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무기로도 생각할 수 있어서 칼집에 영기문(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기운을 형상화한 것으로 역시 필자가 이름 지은 것.)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까닭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보물이 있었다. 계림로 발굴이 끝나고 도로에 새 흙을 덮어 고르던 중에 내가 지나가는 곳에서 인부가 부삽으로 흙을 퍼내고 있었다. 그때 도기 파편 하나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그곳을 파라고 지시했다. 인부들은 무덤 발굴에 능하여 조심스럽게 파 보니 곧바로 큰 도기 항아리가 나왔다. 뜻밖의 옹관(甕棺)이었다. 큰 항아리에 작은 항아리로 뚜껑을 삼은 옹관인데, 전라도 지방에는 매우 많으나 경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큰 항아리 절반은 이미 도로 공사 때 파손되어 있었는데 그 항아리 안에 도기로 만든 수레가 있지 않은가. 명기(明器, 무덤에 생활 용구를 실물보다 작게 만들어 넣은 것.)의 개념이어서 작았지만 큰 호기심을 일으켰다. 마침 이튿날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를 방문해 국립경주박물관을 들렀는데 박일훈 관장이 그 수레 도기를 보여 드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큰 관심을 보이더니 오늘날 수레인 자동차 한 대를 관장에게 선물했다. 만일 공중으로 도기 파편이 날아갈 때 내가 그곳을 지나지 않았더라면 옹관과 수레 도기는 영원히 아스팔트 밑에 묻혔으리라.

당시 나는 통일신라 왕릉을 조사하고 있었다. 통일신라 왕릉 제도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독창적이다. 봉분의 병풍석에 십이지상(十二支像)이 조각되어 있어 왕이 붕어한 연도를 알 수 있었는데, 양식의 편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불상 조각 연구에 앞서 왕릉 조각을 먼저 연구하기로 했다. 왕릉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 통일신라 초 신문왕릉을 비롯하여 말기까지 왕릉 조각 솜씨로 시대적 순서를 바로잡는, 이른바 편년(編年)하는 과정에서 왕릉의 주인공이 구전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다. 봉분 아랫부분에 십이지상을 조각하여 판석으로 둘렀는데 얼굴은 동물 모양이지만 몸은 인간의 모습이며 문복 차림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중국 당나라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문복이 불교의 사천왕상 영향으로 무복의 모습으로 바뀌는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조각이다. 즉 수호신의 성격이 뚜렷해져서 왕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여래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의 무복을 그대로 십이지상에 입힌 것에서 왕과 여래를 동등한 위상에 두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난간이 있고 사이에 판석을 깐 것 같은 형식은, 인도 아소카왕 시대의 여래 탑인 스투파의 형식과 비슷하여 그런 생각이 더욱 힘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라에는 고대부터 전륜성왕에 비견하는 왕 이름들이 많았다. 경전에 의하면 전륜성왕에게도 탑을 세울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래는 설법하고 있다. 그런 관계로 통일신라 왕릉에는 12시간 12방위를 수호하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십이지신상을 병풍석에 배치했다. 다만 성덕왕릉은 십이지신상을 병풍석에 부조(浮彫)하지 않고 독립상으로 만들어 12방위에 맞추어 주변에 세워 놓았다.(사진 4, 5) 그 모든 왕릉을 조사하며 입면도와 단면도, 평면도 등을 그려서 편년 자료로 썼다. 그리하여 한 해 만에 「신라 십이지상의 분석과 해석」이란 제목 아래 쓰인 논문이 1973년 『불교미술』 제1호에 실렸다. 본격적으로 쓰인 나의 최초 논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신라 왕릉에 대한 논문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지만, 그 인연으로 줄곧 고려 시대 왕릉과 조선 시대 왕릉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다. 통일신라 이후 모든 시대의 왕릉 제도는 통일신라 왕릉 제도를 기본적으로 따랐기 때문에 이해가 빨랐다. 조선 왕릉에 대한 저서도 생전에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을 생각이다.

그렇게 나는 치밀하게 작품들을 관찰하고 철학적 성격의 논문을 쓰면서 독학으로 미술사학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평생 미술사학 강의를 들은 적이 없었다. 경주의 자연과 함께 있는 조각 작품들을 체험하면서 살았으니 삶과 자연과 학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찾은 논문 주제로 내 식대로 독창성 강한 문장으로 논문들을 쓰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천마총이 발굴되어 여러 번 현장을 보았고, 천마총 발굴 조사가 끝나자 1973년 황남대총의 발굴이 강행되는 등 어수선한 상황에서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 모색하고 있었다. 그즈음 최순우 박물관장이 나를 서울로 부르시더니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 1년 동안 다녀오라고 하셨다. 일본어는 대학 시절 학원에서 기초 과정을 몇 달 배웠을 뿐이었다. 일본에 가면 모두가 나의 전공을 물을 터인데 어찌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때 나는 불상 조각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불교 조각이 무엇인지 알고 정한 것이 아니라 그저 경주에 부처님이 많다 보니 그리 정한 것뿐이다. 불상 조각 연구로 훗날 세계의 모든 미술의 실마리를 풀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일본 학자가 쓴 논문 몇 편을 일본어 선생과 함께 번역하며 불상 조각 관련 중요한 용어들만을 외우고는 1974년 6월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