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탈종교화, 종교의 심층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서다

2019-04-25     오강남

|    안팎에서 울리는 변화의 목소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는 말을 쓰는데, 왜 지금에 와서 한때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인류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공헌했다고 여겨지던 종교가 제 역할을 못 하는가? 심지어는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가.

물론 종교가 완전히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지가 발달한 21세기 인간들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새로운 종교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기독교가 다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을 가장 열심히 이야기하는 분 중 한 분은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쉘비 스퐁 신부다. 그는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2001)는 책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근본주의, 문자주의에서 해방되어야 기사회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미국 신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Borg)를 들 수 있다. 그는 책 『기독교의 심장』(2009) 등에서 그리스도교를 지금까지의 인습적인(conventional) 그리스도교와 새롭게 등장하는(newly emerging) 그리스도교로 나누고 전자를 천당/지옥 기독교라 하고 후자는 ‘변혁(transformation)’을 강조하는 기독교라 하며 후자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티베트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도 마찬가지다. 그의 저서 『종교를 넘어서』(2013)를 보면 불교도 “착한 일을 하면 극락에 가고, 잘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인과응보적인 종교로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내면적 깨달음을 통해 윤리적 삶을 살게 되는 ‘세속적 윤리(secular ethics)’에 기반을 둔 종교여야 한다고 했다.

|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종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필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지금의 표층 종교에서 종교 본연의 심층으로 심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심층 종교와 표층 종교가 어떻게 다를까. 각각 몇 가지 특징을 열거해본다.

첫째 표층 종교는 지금의 내가 잘되려 하는 종교다. 내가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이기적으로 내가 잘되려고 하는 것이 큰 특징인데 비해 심층 종교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내 속의 참 ‘나’, 내 속의 ‘참된 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가르침은 어느 종교나 거의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불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도 ‘무아(無我)’ 사상이다. 유교도 ‘지공무사’의 ‘사(私)’라는 이기적인 나를 없애고 하늘을 찾으라고 한다.

두 번째 특징은 표층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지만 심층 종교는 이해와 깨달음을 강조한다. 불교는 ‘붓다(깨달은 이)’의 가르침이란 말이다. 불교는 깨달은 이의 종교, 깨달음을 위한 종교라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어떤가? 예수님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고 했는데, ‘회개’의 헬라어 원문 ‘메타노이아’는 우리가 가진 일상의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말이다. 1945년에 발견된 『도마복음』의 주제도 계속해서 ‘깨달으라’는 것이다. 유교도 마찬가지다. 유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인데, 격물치지는 사물을 끝까지 궁구하여 ‘밝음(明)’에 이르라는 것이다.

셋째, 표층 종교는 대체로 신의 초월만을 강조하지만 심층 종교는 절대와 나와 우주가 하나임을 강조한다. 예수님도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고 했다. 이슬람 수피파에서는 하느님이 내 몸의 동맥(핏줄)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다고 한다. 이렇게 초월과 내재를 함께 강조하는 신관을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하는데 동학의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시천주(侍天主)’라고 하여 신을 내 속에 모시고 있다. 따라서 인내천(人乃天), 내가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나라는 것이다. 신유학(新儒學)에서는 만유일체, 혼연동체, 동체대비(萬有一體 渾然同體 同體大悲), 원불교와 천도교에서는 동귀일체(同歸一體), 불교 중 화엄불교는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礙), 상입(相入), 상즉(相卽), 즉 모든 것이 다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존되어 있고 서로 들어가 있다고 한다.

넷째, 표층 종교는 문자주의에 얽매이는 데 반해 심층 종교는 문자를 넘어 문자가 말해주려고 하는 속내, 진정한 의미를 보려고 한다. 종교적 체험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말을 진리 자체라 보지 않고,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본다.

다섯째, 표층 종교는 자기들의 견해나 교설을 절대화하지만 심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절대적이란 말을 쓰지 못한다. 따라서 심층 종교들은 서로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더 깊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벗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군맹무상(群盲撫象) 경우처럼 같이 앉아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므로 코끼리의 실상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표층 종교는 현세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말고 내세를 생각하라고 하는데, 심층 종교는 십우도(十牛圖)의 10개 그림 중 마지막 그림 입전수수(入廛垂手)처럼 저자에 나가서 자기의 깨달음을 실천에 옮겨 남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권, 성평등, 인종차별, 정의, 환경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    신이 없는 풍요로운 세상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 중에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Zuckerman Phil)이 쓴 『신 없는 사회』(2012)와 『종교 없는 삶』(2018)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주장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들이 잘사는 이유가 기본적으로 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표층적 의미의 신이 없어지면 오히려 사회가 잘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겠지만, 필자는 여기다 표층 종교가 심화되어 심층 종교로 변하면 그런 종교가 바로 21세기 오늘 우리 모두에게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는 데 이바지하는 종교라 믿는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21세기 종교는 심층 종교가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을 했다. 또 독일의 여성 신학자인 도르테 죌레(Dorthee Soelle)도 옛날에는 심층 종교란 것이 몇 사람에게만 가능했던 특권에 해당됐는데, 지금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되었다고 보고 “심층 종교의 민주화”란 말을 쓴다.

종교가 이렇게 될 때 표층 종교의 부작용이 줄고, 종교가 줄 수 있는 본래의 시원함, 의연함 그런 것이 우리에게 올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탈종교화가 어느 의미에서 종교의 심층을 접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에서 종교학으로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리자이나 대학에 재직 중 북미와 한국 여러 대학에서 잠깐씩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노자』, 『장자』, 『종교란 무엇인가』, 『세계종교 둘러보기』, 『예수는 없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