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법문] “홍시도 젊은 날엔 많이 떫었지”

2019-03-27     적경 스님
사진: 최배문

이제 4월입니다. 꽃샘추위에 아직은 곳곳에 싸늘한 바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마음 한구석에도 싸늘한 기운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입니다. 따듯한 봄바람처럼 우리의 가슴에도 따듯한 봄이 찾아오기를 기원해봅니다.

재미있게도 우리나라는 새해 인사를 두 번씩이나 합니다. 첫해 첫날 새해 인사와 설날 세배하며 복 받으라고 인사를 합니다. 이래저래 우리는 복 받을 일만 많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복 받는 날입니다.

똑같은 날들이지만 새해, 묵은해 구분 짓는 것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다짐을 위한 의미부여일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지난 한 해의 모든 것들(그것이 좋든 나쁘든)이 새해의 자양분이 되도록 힘쓸 일입니다. 삶은 내가 의미부여한 만큼 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아름답게 의미부여를 하면 매 순간이 선물이 되고 복이 되겠지만, 부정적인 의미부여를 하면 고통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복은 겸양(謙讓)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복 있는 사람과 박복(薄福)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살펴보면 박복한 사람들은 의심이 많고 수용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싫어 난 못해’, ‘그걸 왜 내가 해야 해?’ 이런 식입니다. 반면 복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잘 수용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어’, ‘내가 해볼게’, ‘괜찮아’, ‘고마워’ 이런 유형인 것 같습니다.

서로에게 복을 기원해 주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입니다. 복(福)이라는 글자를 들여다보면 볼 시(示)에 한 일(一)과 입 구(口), 그리고 밭 전(田-경제력)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복덕과 지혜 즉 복혜(福慧)를 구족하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저는 기복(祈福) 불교를 매우 중시하고 있습니다. 욕망에서 묻어나는 기원이 아니라 순수한 정성 어린 기복입니다. 

기복이라는 글자는 놀랍게도 관찰(示) 없이는 형성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관찰은 모든 것의 발전을 가져다줍니다. 의학의 발달도 관찰 없이는 불가능하며 과학의 발달도 그렇고 약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도 오랜 연구와 관찰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놀랍게도 깨달음도 관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복은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재해 있는 나의 복을 발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작은 씨앗을 보면 그 씨앗 속에는 이미 나무로 성장하고 꽃 피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성품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 조건이 어떠하냐에 따라 싹이 트고 크게 성장할 수도 있고 조금 자라다 죽을 수도 있고 아예 싹도 못 틔우는 씨앗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무량공덕의 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복이 발현되지 못하는 이유는 욕망하거나 저항하거나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서 싹이 틀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천척사륜 직하수 [千尺絲綸 直下垂]
일파자동 만파수 [一波纔動 萬波隨]
야정수한 어불식 [夜靜水寒 魚不食]
만선공재 월명귀 [滿船空載 月明歸]

“천 길이나 되는 깊은 물속에 낚싯바늘을 드리우니 / 한 물결이 일어나니 그 물결을 따라 수많은 물결이 일어나네. / 고요한 밤 차가운 물에 물고기 하나 물지 않으니 / 텅 비어 충만한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온다네.”

옛 어른들 가르침 속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수많은 중생을 위하여 깨달음의 낚싯바늘을 드리웠으니, 한 중생도 건짐이 없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부처의 세계를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좀 더 풀이하자면 누가 누구를 구제하고 누가 구제받고, 이런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원래 완전한 부처입니다. 배에 가득히 달빛만 싣고 돌아온다는 것은 완전함을 뜻합니다. 자연의 것들에도 그러한 이치에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감을 예로 들어볼까요? 홍시나 곶감, 정말 맛있습니다. 하지만 익지 않은 감은 몹시 떫습니다. 잘 익어야 향긋하고 달콤합니다. 풋과일을 잘못 먹으면 배앓이를 하지만 잘 익은 과일은 우리에게 건강을 줍니다. 왜 떫은맛에서 달콤한 맛으로 변하는 걸까요? 신(神)이 어느 날 달콤함을 넣어주었을까요? 그런 건 아닙니다. 원래 달콤한 성품이 내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익어 가면서 내재되어 있던 달콤함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갖고 있는 복덕이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탐진치(貪嗔癡)라는 삼독(三毒)을 내려놓고 정성스레 기원하거나 명상의 삶을 살 일입니다.

우리는 자비심을 키워야 합니다. 자비심이란 폭넓게 말해서 사랑의 마음입니다. 서로를 힘들게 하지 않고 조화로움을 이루려는 마음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의 마음 이외의 숨은 의도가 없는지 자신을 관찰하는 명상의 요소가 함께합니다. 

조화(調和)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로는 “서로 잘 어울려 모순됨이나 어긋남이 없다.”는 뜻입니다. 서로 잘 어우러져, 모순됨 없이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나를 내세우거나, 내 위주로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비심을 싹틔운다면 조화를 이루는 좋은 조건이 될 것입니다. 또한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경청의 예술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내 주장을 내세우거나 내 입장을 부여잡고 있는 마음을 내려놓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들어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경청이란 주의를 기울여 잘 들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 안에서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자각(自覺)하는 일입니다. 상대의 말을 통해서 화가 치미는지, 슬픔이 올라오는지, 걱정이 되는지, 피하고 싶은지 등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조화를 이루려는 것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서로에 대한 배려이면서, 서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관심을 기울이고 관계를 잘 형성해 나갈 때 사랑은 자라게 됩니다. 사랑이 주어지지 않은 관계는 그냥 편의에 의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돕는 길이고 영적 성장의 길입니다. 우리는 조화로운 삶을 위해,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좋은 관계를 형성하며 배려해 나가는 사랑의 마음을 성장시켜 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따듯하고 자비롭고 지혜로우며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이해해주는 그런 성품이 현실로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할 일입니다. 살다 보면 부처님의 성품이 아닌 모습이 드러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마다 ‘홍시도 젊은 날엔 많이 떫었지’ 하며 스스로 자각하고 원숙해지도록 기도합시다.
 
육바라밀(六波羅蜜)
베푸는 마음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지키는 마음은 나를 바로잡아가는 
굳건한 약속입니다.
소중한 마음은 칭찬이나 험담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노력하는 마음은 좋은 일들이 꽃피도록 
정성을 다하는 마음입니다.
고요한 마음은 분별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마음입니다.
지혜의 마음은 나와 남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조화로운 마음입니다.                                               
 

적경 스님

남양주 봉인사 주지. 1989년 보성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92년 석주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선원과 미얀마 수행센터에서 수행했다. 저서로 『어린이 불교성전』, 『바우 이야기』, 『구름이 하늘일 순 없잖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