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개론] 윤회 세계에 있으면서 윤회를 초월하는 길

2019-03-27     장휘옥, 김사업

|    불교는 동기론과 결과론의 조화를 꾀한다
아프리카 오지의 한 마을에 전염병이 번졌다. 그곳에는 신앙심이 깊고 마을 주민을 지극히 위하는 성직자 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의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었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염병 소멸을 위해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아 놓고 기도회를 열었다. 결국 기도회에 참가한 성한 사람까지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는 등 마을 전체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기도회를 연 이 성직자의 행위는 선일까, 악일까? 불교는 이 행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윤리학에서는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어디에다 기준을 둘 것이냐를 두고 입장이 나뉜다. 동기론과 결과론이 그것으로, 전자는 행위의 동기에 의해 그 행위의 선악이나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고 하는 반면, 후자는 행위의 결과에 의해 그것이 결정된다고 한다.

문제의 성직자는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안위를 도모하려는 선한 동기로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전염병 확산과 사망자의 증가, 죽음의 공포만 불러왔다. 따라서 동기론의 입장에 선다면 이 성직자의 행위는 선업이 될 것이며, 결과론의 입장이라면 악업이라 할 수밖에 없다.

불교는 동기론과 결과론 중 어느 입장에 서 있을까? 불교는 행위를 일으키는 의도(cetanā, 思)가 행위의 본질이라고 보기 때문에 동기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래에는 불교의 업설은 동기론의 입장이라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원하는 과보(is.t.avipāka)’를 가져오는 것을 선(善)이라 하고, ‘원하지 않는 과보’를 가져오는 것을 악(惡)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동기론에 좀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기는 하나 결과론의 입장도 동시에 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동기론과 결과론,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자의 조화를 꾀하는 중도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불교는 선한 동기와 바람직한 결과를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동기의 청정함을 도외시하면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결과론도 아니고,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지혜로운 묘안은 강구하지 않은 채 동기의 순수성만 믿고 여기에만 매달리는 동기론도 아니다.

한편, 불교는 탐(탐욕)・진(증오)・치(어리석음)의 3독은 그 자체로서 악이고, 그 반대인 무탐・무진・무치(=지혜)는 그 자체로서 선이라고도 한다. 나아가서는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소멸된 열반이야말로 궁극적인 선이며, 미혹한 중생의 삶은 본질적으로 악이라고 보기도 한다.

얼핏 보면 불교는 위와 같이 선악에 대해 여러 갈래의 언급을 하고 있어서 정연한 체계를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직전 호에서 밝힌 것처럼 불교의 선악관은 여러 차원이 포개져 있는 중층(重層)적 구조로 되어 있다. 쉽게 말해 낮은 차원의 선을 설하는가 하면, 높은 차원의 선도 설한다. 단순하지는 않지만 정연한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 

불교는 낮은 차원의 선도 무시하지 않으면서, 더 높은 단계의 선으로 승화되어 가는 것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낮은 단계의 선을 지양하여 거기에서 초탈할 것이 요구된다. 선한 의도 하나만 보더라도 여러 차원이 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하되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으려는 의도’ →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내면에는 그 대가에 대한 기대가 깔린 의도’ → ‘구제한다는 흔적도 없이 타인을 구제하는 행위를 일으키는 의도’ 등이다. 

결과론의 견지에서 “불교는 어떤 결과를 가져와야 선이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에 대해서도 불교는 여러 차원에서 내용을 달리하며 답할 것이다. 이에 맞추어 불교는 각 단계별 차원에 맞는 교리를 다양하게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교리가 불교 전체의 선악관 내지는 가르침을 다 나타낸다고 오인해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은 무엇일까? 동기(=의도)의 측면에서는 일체의 번뇌, 특히 탐・진・치 3독심이 없는 동기가 최고의 선이라 할 수 있다. 결과의 측면에서는 열반・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이 두 측면을 연결해서 ‘일체의 번뇌를 떠난 마음, 3독심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행위는 열반의 경지 그 자체이고, 이것이 최고의 선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자신의 열반뿐만 아니라, 사회를 정화하고 중생을 교화하여 나와 남이 함께 열반을 성취하는 것(自他一時成佛道)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다.

3독심은 달마(dharma), 즉 진리를 알고 깨달아야 소멸된다. 따라서 낮은 차원의 선에서 높은 차원의 선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온갖 번뇌로 물든 중생이 진리에 대한 불교의 다양하고 중층적인 가르침을 알고 스스로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불교의 진리는 외부에서 주어진 명령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므로,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누구라도 마음을 열고 기존의 고착된 생각에서 벗어난 청정한 눈으로 보면 납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석가모니는 이 진리에 눈뜨도록 하기 위해 듣는 이의 눈높이에 맞춰 진리를 설했다.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신 것이다. 듣는 이의 능력이 다양한 만큼 그 가르침도 여러 차원으로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다양하고 중층적인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진리를 알고 발견하게 하여 자율적으로 진리에 부합한 실천을 행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불교의 성격을 감안했을 때, 앞의 성직자의 행위에 대한 불교의 평가는 이렇게 될 것이다. 우선 전염병이 만연한 가운데 기도회를 연 것은 비록 마을 사람들의 병의 소멸이라는 선한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대중 집회로 인해 병의 감염이 확산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치(癡), 즉 어리석음에 의해서 의도되어 일어난 일이다. 어리석음은 3독심의 하나다. 따라서 동기의 면에서 결코 높은 수준의 선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결과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것은 병의 소멸이라는 ‘원하는 과보’를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사망자만 늘게 했다. 더군다나 열반과는 동떨어진 결과다. 따라서 결과의 면에서는 동기의 면보다 선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다만 이러한 결과를 고의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성직자의 행위는 선업이라고는 할 수 없고, 행위의 결과가 좋지 않지만 고의적으로 범한 것은 아니므로 경고나 주의 이상의 처벌의 대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 행위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스스로 참회케 할 필요는 있다.

|    고의로 행하지 않은 행위에는 과보가 없을까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고의로 행한 잘못이 아니므로 이에 따른 과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잘못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불교인을 더러 본다. 과연 고의로 행하지 않은 행위에는 과보가 없을까?

불교의 율장에는 고의로 짓지 않은 잘못에 대해 비록 고의로 지은 것보다는 강하지 않지만 벌칙을 부과하고 있다. 운전을 하다가 고의가 아닌 과실로 사람을 치어 죽음에 이르게 하면 ‘업무상과실치사죄’로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도 과실에 의한 살인을 3급 살인으로 구분해 처벌한다. 이 벌칙과 처벌은 과보가 아닌가? 현실적으로 당장 처벌을 받는데도 과보가 없다고 한다면 모순이 아닐까. 

불교 경전에도 고의로 짓지 않은 행위에 과보가 따르는 예가 나온다. 『현우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병든 아버지를 돌보고 있던 아들은 아버지를 귀찮게 하는 파리에 화가 잔뜩 났다. 아무리 쫓아도 또 날아들어 왔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아들은 몽둥이로 아버지의 이마에 앉은 파리를 내리쳤는데 그만 아버지를 죽이고 말았다. 

다음 생에 아들은 아버지로, 아버지는 아들로 다시 태어났다. 이 아들은 아버지를 부축하고 가다가 잘못하여 아버지를 땅에 넘어지게 했고, 그 결과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의가 아닌 과실로 인한 과거생의 살인이 이생에서 과보를 초래한 것이다.

과실에도 과보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 과연 고의가 아니었는지, 혹여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살펴보는 자세다. 부주의한 과실도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어리석음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3독심의 하나다. 완전히 꺼진 불꽃이 다시는 불이 붙지 않는 것처럼 괴로움이 영원히 소멸된 경지가 열반이다. 열반은 3독심이 소멸되어야 성취된다. 불교인이라면 최고의 선인 열반을 지향해야 하고, 고의가 아닌 과실도 범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    윤회 세계에 있으면서 윤회를 초월하다
여고 3학년 어느 딸이 무던히도 어머니 속을 썩였다. 학교를 빼먹고 나쁜 친구를 만나고 성적은 떨어지고 ……. 어머니가 꾸지람을 하면 딸은 별것 아닌 것처럼 대꾸했다. 

“엄마가 늘 말했잖아요. 전생의 업보를 이생에서 받는다고요. 제가 이러는 것도 엄마가 전생에 지은 죄업 때문이에요. 그 과보를 저를 통해 받고 있는 거죠. 제가 그러고 싶어서 학교 빼먹는 줄 아세요? 엄마 업보 때문에 저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사춘기 아이의 반항 어린 치기인 줄은 몰라도 딸은 자신의 행동이 순전히 어머니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 제일 중시하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어리석음이 소멸되어, 진리를 꿰뚫어 보고 진리대로 실천하는 능력이다. 열심히 성실히만 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지혜가 결여되어 있다면 열심히 하는 만큼 오히려 더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다.

사회를 둘러보면 잘못된 견해에 입각하여 너무도 당당히 행하고 있는 잘못된 행동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위의 딸도 불교를 잘못 알고 있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 않다.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 보라.

까마귀가 배나무 꼭대기에서 배를 맛있게 쪼아 먹고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날아오르면서 큰 배 한 덩이를 떨어뜨렸다. 마침 그 아래에는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떨어지는 배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죽은 뱀은 멧돼지로 다시 태어났다. 고구마를 맛있게 파먹다가 굳센 어금니로 근처의 작은 바위 하나를 건드렸다.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간 바위는 알을 품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암탉의 정수리를 쳤다. 암탉은 즉사하고 말았다. 이 암탉은 뱀을 죽인 까마귀가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죽은 암탉은 사람으로 태어나 포수가 되었고, 마침내 자신을 죽인 멧돼지를 사냥한다. 죽은 멧돼지는 또 무엇으로 태어나 앙갚음을 할까?

다소 문제점은 포함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내가 상대를 죽이면 상대가 다시 나를 죽인다. 죽인 것이 원인(因)이 되어 다시 죽임을 당한다(果). 이 인과(因果)는 끝없이 반복되어 사슬을 이룬다. 이 인과의 사슬 속에 사는 것이 윤회다. 원수를 원수로 갚는 한 인과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해탈・열반은 없다.

이 진리를 뼈저리게 깨달은 사람이 인도의 아쇼까 왕이었다. 동남쪽 깔링가 지방을 정복하면서 수십만의 사상자를 낸 비참한 현장을 보고 그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버렸다. 대신 진리에 의한 통치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했다. 약 2,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치세와 이름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이 때문일까? 그는 인도 각지에 진리에 의한 통치 내용을 석주와 바위에 새겨 놓았는데 아직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암탉의 죽음을 자신의 전생의 죄업이 낳은 결과라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암탉을 죽인 멧돼지가 다시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전생의 죄업 때문에 딸이 어머니 속을 썩인다고 해서, 딸이 속 썩인 행동의 과보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딸은 어머니의 속을 썩인 행동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된다.

누구에게나 의도의 자유가 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을 수 있다는 말이다. 선으로 갚았을 때의 과보는 당연히 자신이 받는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모두가 다 악을 선으로 갚으면, 어머니는 자신의 전생 죄업에 대한 과보를 어떻게 받습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인과응보의 이치는 불가사의해서 생각으로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서도 때가 되면 과보를 받는다.

인과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경지는 어떠할까? 여기서 말하는 이 경지는 이 세상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아서 인과로부터 자유롭다는 그런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뭇 생명체를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지 않지만 지혜에 의해 그 어떤 과보나 번뇌에도 물들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이 경지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은 경지다. 연꽃이 고귀한 것은 깨끗한 물이 아닌 흙탕물에 피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 경지는 또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경지이고, 번개에 멍들지 않는 허공과 같은 경지다. 아무리 번개가 내리쳐도 하늘에는 멍 자국 하나 없다.

국법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하는 나라가 있었다. 살인에 대한 과보가 사형인 셈이었다. 그 나라의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고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재판이 진행되는 제법 긴 세월 동안 그는 목숨을 걸고 수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최종 판결은 어김없이 사형이었다.

사형 집행은 매일 오전에 있었다. 이 시간만 무사히 지나면 적어도 하루는 더 사는 셈이었다. 다른 사형수들은 눈을 뜨면서부터 불안에 떨다가 오전만 지나면 잠깐이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그는 아침에 편안하게 눈을 떴고, 오전 내내 마음은 고요하기만 했다. 하루 종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다른 사형수들을 교화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사형 집행의 날이 찾아왔다.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온한 경지에서 사형을 받았다. 살인의 과오를 참회하며 다음 생에도 태어나 뭇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떠났다.

그는 과연 살인에 대한 과보를 받았을까, 받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살인한 결과로 사형을 당했으므로 과보를 받았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것이 인과의 사슬이고 윤회의 세계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사형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형이었을까? 공포와 괴로움과 회한의 사형이었을까? 사형이 집행될 때도 그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편안했다.

그에게 살인에 대한 과보를 받았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뭐라고 답할까? 사형을 받았으되, 그에게 그것은 공포와 괴로움의 사형이 아니었다. 그에게 그것은 이미 과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분명 윤회 세계에 있으면서도 윤회 세계를 초월해 있었다. 이것이 열반(無住處涅槃)의 세계다. 다음 호부터는 윤회 세계에 있으면서도 윤회 세계를 초월하는 길로 이끄는 불교의 진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

장휘옥ㆍ김사업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