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크리트로 배우는 불교] 석가모니의 어원과 여러 별칭들

2019-03-27     전순환

한역되거나 한국어로 번역된 여러 불전들에는 음역(音譯)되거나 의역(意譯)된 용어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하지만 자주 접하더라도 그러한 단어들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와 닿지 않을 때가 많다. 실제로 한자나 한글로 음역된 용어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않기에, 원어를 보기 전까지는 들어도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최근에 한 선생님이 스바하(svāhā)의 음역인 사바하(娑婆訶)가 사바(娑婆)세계의 사바(사하, sahā)와 관련이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동음(同音)이면서 한자가 같기에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지만, 원어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듯, 각각은 다르게 발음되며 서로 다른 의미를 나타낸다. 본 칼럼의 연재 취지는 이와 같이 듣고 보아도 알 수 없는 음역된 불교 용어들을 선별하여, 그 어의(語義)를 원어인 산스크리트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게끔 돕는 데 있다. 더 나아가 필자가 겪은 지금까지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산스크리트를 배우려는 수강자들의 관심은 대부분 원본을 읽어보고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음미하려는데 있었기에, 용어들의 의미가 제대로 와 닿게 하여 범본이든 번역본이든, 텍스트를 읽어내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이끄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불교 경전 - 범본과 역본
불전이라 하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거나 한역된 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한국어로 된 불전은 보통 한역본이나 일본어 역본을 번역한 것이고, 이 두 역본은 정확히 어떤 사본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범본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언어적 측면에서 볼 때, 중국어와 산스크리트는 어족이 다르고, 다른 만큼 언어 체계도 확연히 상이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중국어(의 한자)는 범본 텍스트를 번역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언어이다. 만약 한글이 더 빨리 창제되었다면, 우리의 고승 또는 학승들이 불경이 한창 기록되던 당시의 인도에 가서 범본을 직접 보고 우리의 말과 한글로 번역했다면, 현재 우리는 더 나은 번역본을 보며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무엇인가 차선책을 찾아야하는데,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우리는 원본들에 가깝다고 말하는 산스크리트 텍스트들을 출판물로든 인터넷상으로든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많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범본들이 갖는 의미를 충실하게 반영한 번역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실제로 필자가 경험한 범본 『팔천송반야경』의 경우, 일본어 역본은 표현 방식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한역본이나 영역본과 달리 누락된 부분도 없으며 용어나 텍스트 또한 범본에 충실하게 번역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불교 용어 - 의역과 음역
일역본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불전의 용어와 문장을 범본보다 한역본에 따라 말하고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산스크리트에 대한 이해의 부족함으로, 특히 한역된 용어들의 경우 그 번역이 소리에 따라 표기된 음역(音譯)이거나 의미를 쫓은 의역(意譯)이라도 그 의미 규정이 분명하지 않거나 잘못된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분야이든 용어들이 등장하며, 이 용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해당 텍스트의 이해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15년 전 인도학 관련 한 학술대회에서 만난 모 출판사 직원이 필자에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많은 한역 불전들이 범본들을 기저로 한다고 들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많은 단어나 용어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그 뜻이 무엇입니까?’ 당시 출판사 직원의 질문에 어느 정도 공감한 정도였지, 불전을 제대로 접해 본 적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못한 채 머쓱한 웃음만을 주고받고 헤어졌지만, 이제 필자는 이 자리를 빌려서 이 오래된 기억의 질문에 대한 해답의 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작은 출발이지만, 불교 용어들과 함께 산스크리트 어원 여행을 떠나 그 본연의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알면, 이해가 더 쉬운 용어들이 있다. 알지만, 잘못 알고 있거나 안다고 믿는 용어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가 선택한 첫 여행지는 인명(人名)이다. 반야부 불전에는 세존과 그 제자들, 팔대보살(八代菩薩), 여래(如來), 천신(天神), 성인(聖人)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반야바라밀다에 대한 담론을 진행해 나아가는데, 인물에 대한 배경 지식만큼이나 인명에 대한 이해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래십호(如來十號)로 불리는 석가모니의 별칭(別稱)들을 대상으로 어원 여행을 시작해보려 한다. 

|    가우타마 싯다르타와 석가모니
많은 사람들이 석가모니(釋迦牟尼)란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고, ‘목표에 이른 자’를 뜻하는 싯다르타의 불명(佛名)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명이 정확하게 어떤 뜻을 나타내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의미를 이루지 못하는 한자들로 구성된 음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미를 알기 위해 검색이 필요하며, 사전이나 인터넷을 통한 일반 검색을 해보면, 가우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ārtha)가 가비라위(迦毘羅衛)로 음역되는 인도의 고대도시 카필라와스투(kapila=vastu)에서 정반왕(淨飯王)으로 의역되는 슛도다나(śuddhodana)의 아들로 태어났고, 출가 후 깨달음에 이른 뒤 석가모니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산스크리트 샤캬무니(śākyamuni)의 음역인 이 명칭이 ‘석가족 출신의 고행자 또는 성자(聖子)’의 뜻이라는 일련의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어원 여행을 하고 있기에 “샤캬무니와 관련하여 혹 다른 의미나 해석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라는 궁금함을 가져보며, 전문 검색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샤캬(śākya)는 샤카(śaka)에 ‘지역’ 또는 ‘족’(族)을 나타내는 접미사 야(ya)가 붙어 만들어진 단어이기에 ‘샤카 지역의, 샤카 족의’란 뜻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인 ‘석가족’이다. 그런데 무니(muni)의 경우 산스크리트 사전들을 들여다보니 ‘고행자, 성자, 수행자’란 일반적 의미들 외에도 유독 다른 한 의미가 눈에 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의 맹세를 한 사람’이다. 모든 단어에는 원래의 의미가 있고, 이 의미는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들로 분화되는데, 현재 우리가 보는 사전들에는 오랜 시간 동안 분화되어 축적되어 온 그 모든 의미가 취합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가 처음이고, 어떤 의미가 이후에 생겨난 것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사실상 필자와 같은 어원 관련 전문가의 몫이다. 과연 ‘침묵’이 무니가 가졌던 처음의 의미일까? 이에 대한 답은 기본적으로 산스크리트와 친족 관계에 있는 다른 언어들의 도움을 받은 후에나 가능하다. 과연 무니에 대응하는 형태의 단어를 가진 언어들이 있을까? 그런 언어들의 존재 유무에 따라 해답의 개연성은 높거나 낮아진다. 

어원사전과 전문 서적들을 수소문한 결과, 똑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다른 언어들에서 무니와 어원적 관련성이 높다고 말하는 단어들이 찾아진다. 형용사로서 ‘침묵하는’을 의미하는 희랍어의 뮨도스(μυνδος)와 아르메니아어의 모운즈(mownǰ), 그리고 명사로서 ‘말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 체코어(슬라브어파)의 무나(mua)가 바로 그런 단어들이다. 따라서 무니의 원래 의미가 ‘침묵 또는 묵언을 통해 수행하는 자’라는 어원학적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언어 외적인 측면이지만, 그러한 의미의 가능성을 한층 더 높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후라(羅睺羅)로 음역되는, 석가모니의 유일한 아들이자 십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라훌라(rāhula)가 침묵을 원칙으로 수행에 전념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묵언 수행은 아버지의 이름에서도 드러나 있는 것처럼, 석가모니를 따라 행한 수행법이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어원 여행을 종합해 보면,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되는 샤캬무니의 일반적 의미인 ‘석가족의 성인 또는 현인’은 ‘석가족의 묵언 수행자’란 어원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이르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세존
그런데,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란 명칭은 『팔천송반야경』의 2장과 19장에서 단 2회 언급될 뿐이다. 이 두 곳은 연등불(練燈佛) 또는 연등 여래(如來)로 의역되는 디팡카라(dīpam.kāra) 타타가타(tathāgata)가 미래에 불리게 될 석가모니의 별칭들을 예언하는 장면들이다. 이에 반해 석가모니의 별칭(別稱)들 가운데 세존(世尊)으로 의역되는 바가왓(bhagavat)은 32장으로 구성되는 이 불전 전반에 걸쳐 1,500회 이상 언급된다. 이 산스크리트 단어를 구마라집은 일정하게 불(佛)로 음역하고 있지만, 현장은 음역의 불(佛)과 박가범(薄伽梵), 의역의 세존, 모두 세 가지의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한글대장경은 현장의 번역을 따라 부처님, 세존, 박가범 세 가지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콘즈(Edward Conze)의 영어 번역은 일정하게 Lord이며, 카지야마 유우이치(梶山雄一)의 일본어 번역 또한 世尊(세존) 한 가지로 나타난다. 

바가왓은 ‘복’(福)을 의미하는 바가(bhaga)에 갖춤을 나타내는 접미사 왓(vat)이 붙어 만들어진 단어로서 ‘복을 갖춘(자)’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베다문헌 이래로 ‘하늘’의 의미와 연관된 데와(deva)가 ‘신(神)’을 의미하고, 영어나 독일어와 같은 게르만어파 언어들의 god은 ‘(곤경 등에 빠진 사람들의)부름을 받은 자’란 어원적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 이란어파와 슬라브어파의 언어들은 각각 바가와 동일한 어원의 형태인 바가(baga)와 복(bog)으로 신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필자에게 문득 두 가지 의문이 든다. 하나는 많은 범본 불전들에서 석가모니의 여러 별칭들 가운데 왜 바가왓이 특정(特定)되어 높은 빈도로 사용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현장은 어떤 이유에서 바가왓을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세상에서 존귀하다는 ‘세존’으로 번역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 의문들을 해소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겠지만, 필자는 텍스트를 통해 그 답을 간접적으로 유추해보기로 한다. 

|    석가모니의 별칭들
이 유추는 연등 여래가 미래에 불릴 석가모니의 별칭들을 예언하는 문구에서 나온다. 『팔천송반야경』의 2장과 19장에서 각각 1회, 같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이 산스크리트 문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젊은이여, 당신은 무수(無數)한 겁이 지난 미래에 석가모니로 불리며, 올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으면서 공양을 받을만한 여래①, 지(知)와 행(行)을 겸비한 선서(善逝)②,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③, 사람들을 (깨달음의 길로) 이끄는 최고(最高)의 조련사④, 신과 인간들의 교사(敎師)⑤, 불타⑥, 세존⑦이 될 것이다.” 

밑줄 친 부분을 보면, 불타와 세존을 제외한 나머지 별칭들은 수식어들이 붙어서 매우 길게 느껴진다. 불전에서 1,500회 이상 등장해야 하기에 짧으면서 핵심적인 개념을 담고 있는 명칭이 필요했고, 그래서 불타의 붓다(buddha)와 세존의 바가왓이 선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바가왓의 자리에 구마라집은 불(佛) 한 가지로 일정하게 사용한 반면, 현장은 불, 박가범, 세존, 세 별칭을 혼용하고 있다.

하지만 바가왓을 불(佛) 하나로든 또는 세 가지의 별칭으로 다르게 번역하든 두 경우 모두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바가왓은 당연히 불타이고 여래이지만, 텍스트에 등장하는 붓다와 타타가타(tathāgata)라는 산스크리트 명칭들은 바가왓이 아닌, 과거 또는 전생의 불타와 여래들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들 때문에 오해의 여지 없이 석가모니를 가장 잘 특정할 수 있는 바가왓이 선택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현장이 바가왓을 세존으로 번역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점에서 범본 『이만오천송반야경』에 나오는 여래의 예언 문구를 소개해본다. 2장에 나타나는 이 문구에는 『팔천송반야경』의 예언 문구와 달리 ‘이 사바(娑婆)세계에서(...될 것이다.)’가 추가되어 있다. 사바는 사하(sahā)의 음역이다. 추가된 이 문구가 현장으로 하여금 바가왓을 세존이란 단어로 번역하게 만든 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개인적인 소견을 가져본다.

|    여래십호?
석가모니의 별칭들을 처음 다루면서 여래십호(如來十號)라는 용어가 눈에 들어왔고, 당연히 열 개의 별칭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위의 번역된 문장에서 보는 것처럼, 열 개가 아닌 일곱 개의 별칭이다.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을 다시 살펴본다. 

구마라집의 번역이다. 

於來世過阿僧祇劫. 當得作佛號釋迦牟尼 如來 應供 正遍知① 明行足 善逝② 世間解③ 無上士調御丈夫④ 天人師⑤ 佛⑥ 世尊⑦. 

현장의 번역이다. 

善男子. 汝於來世過無數劫. 於此世界賢劫之中. 當得作佛號能寂 如來 應 正等覺① 廣說② 乃至 佛⑥ 薄伽梵⑦. 

보기 편하게 띄어쓰기를 했다. 구마라집의 번역에서 열개의 별칭이 나오려면, 여래 응공 정편지①가 독립적인 세 개의 단어이어야 하고, 명행족과 선서② 역시 두 개의 단어이어야 한다. 현장은 ‘내지(乃至)’로 표현하며 별칭 모두를 열거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한글대장경, 사전과 인터넷 등을 검색하니 이러한 식에 따라 구분하여 십호(十號)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콘즈의 영역과 카지야마 유우이치의 일역은 필자가 번역한 것처럼 일곱 개의 별칭으로 나열하고 있다. 의역의 여래, 응공, 정편지에 대응하는 산스크리트 단어는 타타가타(tathāgata), 아르핫(arhat), 삼약삼붓다(samyaksam.buddha)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표현은 반야부 경전 전반에 걸쳐 짝을 이루며 매우 자주 등장하는 단어 열이고, 텍스트를 읽어보면 ‘공경 또는 공양을 받을 만한’의 아르핫과 ‘올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의 삼약삼붓다는 독립적인 단어들이 아니라 여래를 수식하는 형용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명행족으로 의역되며 ‘지(知)와 행(行)을 겸비한’을 의미하는 위드야차라나(vidyācaran.a) 삼판나(samāpanna) 역시 형용사로서 수가타(sugata)를 의역한 선서와 별개의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석가모니의 별칭들은 십호가 아닌 칠호(七號)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 어원 여행의 대상은 석가모니 십대제자(十代弟子)의 이름들이다.
 

전순환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대학원 졸업.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인도유럽어학과에서 역사비교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시작된 한국연구재단 지원 하에 범본 불전(반야부)을 대상으로 언어자료 DB를 구축하고 있으며, 서울대 언어학과와 연세대 HK 문자연구사업단 문자아카데미 강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신묘장구대다라니경』(2005, 한국문화사),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반야바라밀다심경』(2012, 지식과 교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