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묵 스님의 화 다스리기] 싫어하는 마음, 슬픔, 절망, 우울

2019-03-27     일묵 스님

『천수경』에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죄는 원래 자신의 고유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죄는 어떤 조건 아래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 실체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화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어떤 조건에서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라고 바라보면 그것을 극복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몸을 통해 일어나는 통증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필요한 것이므로 통증은 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통증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화에 해당합니다. 『상윳따니까야』 「화살경」 (S36:6)에 보면 처음 육체적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첫 번째 화살로 비유하고, 육체적 고통을 통해 정신적 불만족과 함께 화가 계속 일어나는 것을 두 번째, 세 번째 등의 화살에 비유합니다. 첫 번째 화살에 맞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등의 화살에 맞지는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치과에서 실제로 치료받을 때보다 치료받기 전에 미리 고통을 생각하면서 더 괴로워하지 않습니까? 몸을 통해 일어나는 통증은 피할 수 없지만, 통증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통증을 싫어하는 그 마음이 오히려 더 큰 괴로움을 유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몸이 무겁다’, ‘피곤하다’, ‘힘들다’ 하는 식으로 미세한 짜증들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은 모두 몸의 불편한 상태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입니다. 몸의 불편한 상태에 반응해서 화를 일으키지 말고 몸의 불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몸의 불편함이 있을지라도 화는 내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육체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만으로 끝내야지 그것에 대하여 화로써 반응하여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슬픔과 절망도 화입니다. 슬픔이나 절망도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불만족스럽고 싫어하는 마음 상태이므로 화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이 불교를 인생의 행복을 무시하는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종교라고 오해합니다. 그런데 염세적이라는 말 자체가 세상을 싫어하는 것이므로 화의 한 형태이고, 허무하다는 것도 희망이 없고 절망에 빠지는 상태이므로 이것 또한 화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지향하는 마음은 온전히 깨어 있고, 탐욕과 성냄이 없고, 또렷하고 활발하며, 지혜가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집착과 화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불만이 없어지고, 평온하여 지혜가 발현되기에 최적화된 마음 상태에서 어떻게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생각이 나오겠습니까. 불교를 염세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를 잘못 이해해서 나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에 물들어 있어서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는 좋아하고 흥분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는 싫어하며 우울해합니다. 이때 원하는 즐거움을 얻지 못해서 따분하고 재미없다거나 심심하고 무료한 마음도 화에 포함됩니다. 따분함은 현재 즐거움이 없는 것에 관해 불만족을 느끼고 싫어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따분함도 미세한 형태이지만 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따분함은 몸과 마음이 게으를 때 주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바르게 수행하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느라 따분함이 일어날 겨를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열심히 노력하면서 바른 앎과 바른 기억을 계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울함도 화입니다. 그리고 대인공포증이나 폐소공포증 등 여러 가지 공포증도 정신적 불만족이 쌓여서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이므로 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장이 난 승강기 안에 몇 시간 동안 갇혔다가 나왔습니다. 이것을 우연히 승강기가 고장 나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면 하나의 사건으로 그냥 지나갈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반복해서 떠올리면 승강기에 대해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강해져서 나중에는 승강기 근처만 가도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져 폐소공포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울함도 현재의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가 누적된 것일 뿐인데 그것이 자꾸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우울함이 반복되다가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서면 병이 되어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울한 생각이 들면 얼른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나 운동하는 것도 좋고, 더 좋은 것은 우울함을 즉시 알아차림으로써 우울한 생각을 버려서 우울한 생각이 계속 이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울함이 화의 한 형태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그러한 기분에 계속 빠져들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찾아내고 비난하는 마음도 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싫어하고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분노, 스트레스, 짜증, 질투, 인색, 후회, 슬픔, 공포, 절망, 허무, 따분함, 우울함, 남의 흠 잡기, 몸의 아픔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 등 삶에서 나타날 수 있는 화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많은 시간을 짜증 내고 스트레스받고 우울해하며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화를 일으키지 않고 사는 시간을 찾는 것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묻고 답하기

화를 내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것이지 무조건 문제를 방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최근에 새로운 조직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젊은 직원의 당돌함과 무례함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있습니다. 너무 혼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최대한 자애심(慈愛心)을 발휘하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볼 때 무조건 참고 외면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다 한번 본 사람 같은 경우에는 그냥 지나갈 수 있지만 계속 부딪히고 같이 일해야 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특성을 파악해서 적절하게 제재도 하고 가르치기도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무조건 참고 내버려 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화를 내지 않으면서 그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라는 뜻이거든요. 또 상대에게 자애심을 가진다는 것이 상대를 외면하고 문제를 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애심을 가지고도 좋은 충고를 해 줄 수 있지요. 부처님께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매우 엄하게 나무라신 경우가 있습니다. 자아가 윤회한다고 말하는 제자나 수행과 무관한 사색에 빠지는 제자들에게는 ‘쓸모없는 자여’라는 말로 야단치셨습니다. 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자만심이 너무 강해서 수행의 진보가 없었던 찬나 비구에게는 승가 대중 중에 누구도 그와 말을 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시기까지 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아주 냉정한 질책처럼 보이지만 이런 준엄한 경책 때문에 찬나 비구는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정진해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같이 때로는 부처님처럼 화를 내지 않으면서도 상황에 맞게 지혜롭고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이 진정한 자애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께서 속으로 화가 나면서도 겉으로 참기만 하는 것은 자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엄하게 나무라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부모님도 그렇게 하잖아요. 이때 꼭 기억해야 할 점은 화를 내지 않고 자애심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화를 내는 순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므로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문제가 더 꼬이게 됩니다.

일묵 스님
서울대 수학과 졸업,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 범어사 강원을 수료한 후 봉암사 등에서 수행정진했다. 미얀마와 플럼빌리지, 유럽과 미국의 영상센터에서도 수행했다. 
현재 제따와나 선원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