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 나의 다짐]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하옵니다

2007-09-15     박수만

사바세계의 중생인 저에게 부처님 법을 만나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신심(信心)을 북돋아 주신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감사드립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 한몸 다바쳐 남은 생을 가족과 이웃들에게 전법과 보시행을 하면서 매일 기도 정진 하겠노라고 향 하나 사르고 엎드려 절하옵니다.

나는 '54년 생으로 부산에서 3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끼니 걱정하는 가난한 집이어서 의·식·주 걱정 때문에 교육은 뒷전이었고 간신히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바로 입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대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였지요.

하지만 첫아들의 기쁨도 잠시 집안의 사업실패로 서울, 대구, 부산으로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직장을 구해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배를 타기로 결심을 하고 아내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그때 나이 30살, 신혼의 꿈과 첫아들의 기쁨도 이 상황에서는 사치였습니다. 배웅나온 아내는 아들을 등에 업고 가로수 밑에서 서러움에 복받혀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작별인사를하고 돌아서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긴 항해의 두려움과 더불어 가족들과의 헤어짐에 가슴이 미어져 오며 눈물이 연신 흘러 내렸습니다.

이윽고 출항하자 피곤한 몸으로 흔들거리는 침대 속에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잠에 빠져 들면서 이제부터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고 속으로 마음을 다잡아 보았습니다. 선박생활은 24시간 비상사태며 항상 긴장된 자세로 임해야만 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카드, 흙이 아닌 철판 위에서 살아가는 삭막하고 딱딱한 선원 생활을 견디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각오를 단단히 다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만해협을 지나가던 중에 태풍을 만났습니다. 배 안의 이동물을 고정시키기 위해 작업을 하다가 등 뒤에서 밀려오는 집채만한 파도에 나는 배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바다를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배를 계속 타야만 하는가 하고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고도 두려움을 눌러 가며 배를 타다가 기억 속에서 두려움이 거의 사라지던 무렵, 두 번째 사고가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기감전으로 인해 심장쇼크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잦은 사고로 인해 나는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심장에 이상이 생기고 맥박과 호흡이 균형을 잃었습니다. 매일 약으로 생활하고 무너져 가는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정신마저 혼미해 갔습니다.

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책임이 있기에 여기서 도중에 못한다고 그만 둘 수는 없었습니다. 고향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내 자신의 고달픔쯤은 어떻게든 견디어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한 권의 불서와 염주가 내 머리맡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듣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반신반의 하면서도 하루하루 부처님께로 귀의해 가게 되었습니다.

며칠 지난 후, 나는 허물어져가는 육신과 정신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약은 부처님의 법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를 올리기로 하고 부처님 앞에 '삼천배'를 올릴 것을 굳은 마음으로 약속드렸습니다. 당일 아침부터 바로 오체투지를 시작하였지요. 100배, 500배까지는 팔과 다리의 힘으로 하였으나 차츰차츰 힘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차 힘겨워지자 '무엇 때문에? 왜?'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며 계속 했습니다. 허기가 지고 갈증이 나고, 땀이 비오듯이 흘러 내렸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참회의 눈물이라는 것일까?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것들이 잘못 살아 왔다는 자괴감에 정말 내 자신이 밉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심도 먹지 않고 계속해서 부처님께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한 동작만을 계속 되풀이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08배를 드리고 삼천배를 마치자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땀인지 물인지 흠뻑 젖은 방석 위에 한참을 엎어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젠 나도 부처님 앞에 부끄럼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나는 가슴 가득 밀려오는 환희심을 느꼈습니다. 하루하루 부처님의 가피로 인해 나의 심장병은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습니다. 매일 불교서적과 스님들 법문 테이프를 보고, 들으며 때로는 기도 중에 나도 모르게 흘러 내리는 눈물을 느꼈습니다. 관음정근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삶이 후회스럽게 느껴지며 이후 남은 생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부처님 전에 맹세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가를 얻어 정말 보람있는 시간들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일 후 있을 해기사(海技士) 시험도 있고 해서 새벽마다 동네 절에 가서 기도하고 오후에는 시험대비차 책을 보곤 했습니다. 모처럼 아들·딸과 함께 시내에 나갔다가 불교전시관에 들러 불서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대구에 계신 어머님이 막내 자식 얼굴 보고 싶다고 와 계셨습니다.

시험 이틀 전 날, 그날도 나는 일찍 일어나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절에 가자고 하니 어머님께서도 함께 가시겠다고 했습니다. 손에는 염주를 한 손엔 약수통을 들고 절로 향할 때, 비탈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자동차의 급브레이크 소리가 나면서 내앞에서 걷고 있던 8살 난 딸아이가 차에 치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딸에게 다가가는데 자동차는 딸아이의 머리를 뒷바퀴로 치고 나서야 서는 것이었습니다. 아! 내 딸, 내 딸아! 이 일을…. 딸은 울부짖으며 비명을 질러대고 두 눈동자는 흐트러지고 머리는 뒤로 제켜져 있었습니다. 입에선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팔순 어머님은 기절을 하였고, 나는 아들에게 집에 연락하라고 하고 사고차에 올라 근처 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조치를 하고 X-Ray 촬영을 하고 날 때 까지 남의 일로만 생각되던 교통사고가 내게도 일어난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아내는 미쳐버린 사람 같았습니다.

잘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워 나가자고 한 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견디기 힘든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부처님을 만나러 가자면 좋아하던 우리 아이에게 이런 사고가 일어나자 무척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부처님! 저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다시 큰 병원으로 옮겨 입원수속을 하고 나자 나의 휴가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래간만에 가족들과 여행계획을 잡았었는데…. 내일이 시험이었지만 딸의 고통스러운 모습과 울음소리가 귀에 쟁쟁하여 아무 준비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의 넋 빠진 상태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고 나는 시험장으로 향했습니다. 매일 가는 절에 가서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님께 다시는 절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별 기대 없이 찾아간 시험발표 벽보에는 나의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무지한 인간을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셨는데, 나는 부처님을 찾지 않겠다고 한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부처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이제 남은 것은 속히 딸이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마침 절에서 스님이 오셨는데 가사 장삼을 걸치고 지극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는 모습이 부처님의 화신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항상 부처님께서 옆에서 지켜준 공덕으로 딸아이는 무사히 퇴원을 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름 후에는 기브스를 풀고, 한걸음 한걸음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딱정벌레 모양의 책가방을 등에 메고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법을 만난 저는 새로운 삶을 찾은 기분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삶은 이웃에게 자비희사하는 감사한 마음가짐으로 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정귀혜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