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에세이]나무에는 영혼이 있다

2019-03-27     김택근

나무는 땅 속, 땅 위, 공중에 뻗어있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흡사 과거의 심연으로부터 돋아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뻗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나무에 영혼이 있을까. 인간처럼 생각을 할까. 프랑스 수목학자 자크 부로스는 <나무의 신화>에서 식물들도 두려움을 느끼며 기억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나무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믿음은 우리에게 철 지난 미신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나드 쇼와 앙리 베르그송을 열광시킨, 식물의 심리에 관한 중요한 저술을 쓴 인도의 저명한 학자는 1900년부터 30여 년 동안 실험을 통해 식물에게도 어떤 특정한 기억능력이 동반된 감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꽤 오래전 일이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서 있던 300살 백송이 폭풍으로 쓰러졌다. 주민들이 이 백송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더 이상 잎을 피우지 못했다. 마을의 수호목인 백송의 ‘하얀 주검’을 살피던 사람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이테를 살펴봤더니 백송은 1910년을 전후로 갑자기 성장을 멈췄다. 백송은 1940년대 후반에 가서야 다시 성장을 했다고 한다. 그 기간이 일제 강점기와 일치했다. 나무도 나라 잃은 슬픔에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는 얘기다.

성도(成道)의 땅, 인도 보드가야 사원에는 우람한 보리수가 있다. 그 아래 엎드렸을 때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중도를 깨닫고 새벽별을 보며 부처님이 세상에 던진 일성은 불교의 시작이며 끝이었다. 그 말을 보리수가 처음 들었다. 사원의 대탑보다, 그 안에 모셔진 불상보다 보리수에 더 끌렸다. 그 여운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다.

숱한 수난에도 보리수는 살아남았다. 6세기 말 불교를 핍박했던 벵골의 왕이 보리수를 불태웠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싹을 틔웠다. 1876년에는 벼락을 맞았건만 기적처럼 새싹이 돋아났다. 그리고 지금 드리운 가지에 잎이 무성하다. 아마 불자들의 간절한 기도에 나무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일으켰을 것이다.

우리네 사찰에도 귀한 나무들이 많다. 고찰이라면 거의가 설화를 품고 있는 명목들이 서 있다. 독경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자태가 정갈하다. 또 사찰 주변의 숲은 유독 푸르고 건강하다. 모두가 부처님을 대하듯 성스럽게 돌봤기 때문일 것이다. 사찰의 숲을 지키다 숲속에 잠든 고 김재일 사찰생태연구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의 절집은 산막(山幕)이요, 스님들은 숲지기였다. 숲은 거기에 사는 사람을 닮는다. 도시의 숲은 시민들을 닮고, 산사의 숲은 그 절에 사는 스님들을 닮는다.”

숲은 바람까지 정갈하게 빗질하여 사찰로 보내고, 사찰은 말씀을 숲속으로 내보냈다. 속세와 피안, 고통과 구원, 미망과 깨달음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절과 숲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동시에 들어 있다.

나무와 숲이 있어야 그 안에 모신 부처님이 더 성스럽고 자비롭다. 불교는 숲에서 태어났다. 석가모니는 숲속의 성자였고 초기 불교의 수행자들은 ‘숲속에 머무는 이들’이라고 불렸다. 숲에서 모든 것을 얻었고 깨달았다. 우리도 예로부터 진리와 생명을 북돋는 청정한 기운이 사찰 숲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어릴 적에 자주 찾았던 남도의 고찰이 있다. 경내가 퍽이나 넓었고 오래된 나무가 그 뜰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 전에 그 절에 들렸다가 깜짝 놀랐다. 불사로 경내의 나무가 사라지고 없었다. 법문을 가장 오래 듣고, 기도하는 사람들 모습을 가장 경건하게 지켜봤던 나무에 누가 톱질을 했을까.

여전히 곳곳에서 대형 불사 소식이 올라오고 있다. 듣기에 불편하다. 그동안 깊은 산속 암자마저도 숲을 밀어 건물을 세우고 산을 깎아 길을 넓혔다. 이제 멈출 때가 되었다. 비록 인간이 세웠지만 사찰이 인간만을 위한 공간일 수는 없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나무(南無 Namasa)라는 칭호가 예사롭지 않다. 귀명(歸命)이란 뜻이니 마음으로부터 믿고 공경함이다. 나무는 우리 곁에 서 있는 도반이다. 부처나 보살의 명호에 붙는 ‘나무’란 말이 새삼 경이롭다.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택근
시인, 작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오랜 기간 기자로 활동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