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에세이] 인연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만행의 배움 끝에 국립박물관에 들어가다

2019-03-27     강우방

탈을 아무리 한다고 해도 유년기와 청소년기에는 학교에서 틀에 박힌 생활을 해야만 한다. 같은 자리, 같은 교과서, 같은 담임선생님, 같은 짝 등 대부분 고정된 생활이다. 창의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얼마나 어리석은 교육 방식인가. 1960년 봄 대학생이 되었는데 4·19혁명에 연이어 5・16 쿠데타가 일어나 매일 데모에 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 생활을 보내야 했다. 내 삶에도 혁명이 일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러나 교양과목이라고 하여 다시 국어와 영어 등을 같은 교실에서 독문과, 불문과, 영문과 학생들과 한 해 동안 들어야 했다. 당시에는 문과와 이과가 함께 한다는 의미로 문리대(文理大)라고 하여 자부심이 대단했다.

1968년, 결혼 사진

그해 5월 어느 날, 짐을 챙기고 정처 없이 경부선 3등 열차를 탔다. 부산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간 곳이 부산 범어사(梵魚寺)였다. 미리 알고 간 것은 아니고, 무턱대고 산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범어사에 도착했다. 정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누가 틀어놓고 갔는지 트랜지스터에서 차이콥스키의 비창(悲愴) 교향곡이 비장하게 계곡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다시 정처 없이 걸어 올라가다 마지막 암자에서 짐을 풀었다. 내원암(內院庵)이었다. 그때 나는 시계 초침 소리에도 잠이 들지 못해 장롱 깊숙이 숨겨 놓아야 했고, 형수님이 건강을 걱정하여 삼계탕을 끓여 주어도 한 숟갈도 들지 못할 만큼 예민한 상태였다. 하지만 계곡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내원암에서는 밤새 흐르는 계곡물이 천둥소리 같았음에도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꼭두새벽 사발에 고봉으로 담은 밥도 거뜬히 먹어 치웠다. 가끔 뒷산에도 올랐다.
그 당시 나는 폐결핵을 앓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아랫마을에 내려가 작은 마을의 보건소에서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 주사를 맞아야 했다. 하루는 늦은 저녁에 논밭만 있는 인적 드문 벌판에서 절을 향해 산을 오르다 밤이 되었는데, 반딧불이를 처음 보았다. 처음 보는 것이라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고작 반딧불이를 보고 놀라다니, 서울 촌놈이 따로 없었다.

옛날 사람들을 귀양 보냈던 깊은 산곡 무주(茂朱) 구천동에 간 적이 있다. 1960년대만 해도 인적이 드물어서 33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한참 올라가는데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계곡 끝에 관음암이 나타났다. 그곳에 짐을 풀고 한여름을 지낸 적도 있다. 독서도 하고 법당에서 명상도 하며 어릴 때부터 가끔 하듯 그림도 그렸다. 그러다 어느 날 뒷산 덕유산을 올랐다. 하염없이 올라가 해발 1600미터 향적봉 정상에 오르니 아무도 없고 비바람에 자랄 수 없는지 나무도 없었다. 거기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장엄한 운해(雲海)를 보았다. 운해 위 곳곳에 낮은 산의 정상들이 보였다. 운해를 내려다보니 장대한 광경이어서 마음이 벅차 아직도 그 광경이 마음에 새겨진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큰 절에 묵을 때마다 뒷산이 아무리 높아도 정상까지 오르곤 했다. 땀에 젖은 온몸으로 정상에서 맞이하는 청량한 바람을 잊을 수 없다. 마음이 항상 이처럼 청량했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었다. 청량사(淸凉寺)라는 절 이름이 있는 까닭도 알았다.

일탈의 시간이 끝나면 항상 대학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문리과 대학에는 명강의가 많았는데, 박종홍 철학 교수의 열강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시인이었던 영문과 송욱 교수는 하도 깐깐하여 모든 학생이 머리를 숙이고 질문을 피했다. 어느 날 그는 칠판에 sein[독일어로 ‘존재(存在)’라는 뜻]이라고 써놓고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생성(生成)’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고 물었다. 철학 용어라 영문과 학생들은 알 리 없었다.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교수도 한참 답을 기다렸다.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나는 ‘werden’하고 말했다. 아마도 그는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먼 훗날 하버드 옌칭 도서관에서 그가 말년에 해설한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본 적이 있다. 서양 시에 몰두했던 그가 만해의 작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인상을 받고는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1960년대 초에는 실존철학이 풍미했다. 조가경 교수는 『실존철학』이란 두툼한 책을 내고 강의도 했는데 건물 모서리에 있는 대강의실은 항상 수강생들로 가득 찼다. 한 번은 이두현 민속학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1912년 영국에서 출간된 제인 엘렌 해리슨(Jane Ellen Harrison)의 『Ancient Art and Ritual』란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곧장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꽤 난해한 책이었지만 원서를 읽으며 번역하다시피 노트에 메모했다. 그리스 고대 의례에서 서양미술의 모든 장르가 탄생하는 과정을 예리하게 추구한 책으로 감명이라기보다 큰 충격을 받았으며, 미술사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마도 첫 번째 개안(開眼)이었으리라.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의 『인간론』도 큰 감명을 주었다. 당시 독문학 강의는 거의 듣지 않았는데, 문학을 하려고 독문과에 입학한 것이 아니었기에 평생 무엇을 할 것인가 탐색하고 있었다.

3학년 때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했다. 이것도 일탈이었다. 전염이 될 만큼 크게 심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서울대학 병원의 깨끗한 병실에 누워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불현듯 여러 가지 실험으로 폐의 공동을 없애려 하는 실험 대상이 되었음을 알아채고, 내과 의사와 상의하지도 않고 스스로 흉부외과 교수를 만나 수술해 달라고 요청했다. 왼쪽 폐의 윗부분에 작은 공동이 있었는데 어렵지 않은 수술이라 판단했다. 그때 수술로 남은 긴 흉터가 지금도 등에 그대로 남아 있다. 퇴원하자 세상이 달리 보였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수술 회복기가 끝나고 어느 날 게시판에 서예 동아리 모집 광고를 보고는 당장 가입했다. 문리대 건너편에 있는 의대 후문에서 조금 들어가면 함춘원(含春園)이란 휴게소가 있었는데 교수들의 쉼터였다. 그곳에 방을 마련하여 서예실로 삼고 있었다. 지도 선생은 여초(如初) 김응현 선생이었는데 당시는 30대였으며 열정이 대단했다. 그는 북위시대 비석을 법첩으로 만든 장맹용비첩(張猛龍碑帖)을 주로 가르쳤다. 방필해서(方筆楷書)로 중국 북위시대 석각 가운데 웅후(雄厚)하여 가장 걸출한 글씨 가운데 하나다. 그 글씨를 임서(臨書)했는데 매우 훌륭한 글씨여서 열심히 썼다. 뿐만 아니라 예서도 여러 가지 썼으며 동진(東晋)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행서도 임서하였다. 임서란 법첩의 글씨를 그대로 옮겨서 쓰는 것으로 글씨의 구성과 기운생동을 스스로 배우는 것이어서 그저 단순히 베끼는 것이 아니다. 졸업 때까지 5년간 심혈을 기울여 썼으며 졸업 후에도 계속하였으며 여초 선생의 강의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졸업하던 해에 공부한 체험을 바탕으로 1967년 『공간』 지에 「書의 현대적 의미」란 최초의 논문을 실었다. 임서의 훈련은 훗날 작품의 진위를 구별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사군자도 열심히 쳤다. 졸업 후에도 계속하여 동양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훗날 서화 전공자들이 저서에 위작을 다수 실으면 가차 없이 비판했던 것은 그런 치열한 습득 덕분이다.

대학 시절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문인은 소련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였다. 『닥터 지바고』로 노벨상을 받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거절했다. 그를 특별히 연구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진을 깃들인 그의 전기를 읽고 그의 삶에 감명받았다. 원래 그는 시인이어서, 그가 독일어로 쓴 시를 외워서 길을 걸으며 암송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화가로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초상화를 그렸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그림을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으며 어려서부터 톨스토이, 릴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등과 교류하며 대학에서 철학 공부도 했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 『안전통행증』은 러시아 혁명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아서 안전하게 살아온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작고했을 때 나는 대학생이 되었으므로 동시대에 산 것과 같다고 하겠다. 나 역시 입학하자마자 4·19혁명과 그에 따른 오랜 정치적 혼란에서 일탈하여 예술 활동에 몰입하며 살아온 것이 그와 같은 궤도를 걸었다고 생각했다.

서예에 몰입하기 시작했던 그때 동시에 나는 캔버스를 사서 서양화를 혼자 그리기 시작했다. 유화를 마음대로 그린 것인데 기법은 서툴러도 주제가 특이하여 바로 옆집에 살던 서울대 미술대학의 손동진 교수로부터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이라 하며 주목을 받았다. 손 교수의 댁에서 서울대학 미대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데생도 하고 유화도 그렸다. 데생을 배우면서 사물을 파악하는 방법을 배워다. 서양화도 졸업 때까지 그렸다. 이젤과 스케치북을 들고 산과 들로 오가며 전국을 안 다닌 곳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이젤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고 수채화를 그렸다.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작품은 거의 없었지만, 동서양의 예술을 혼신을 다해 체험하며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붓글씨를 잘 썼다거나 그림을 잘 그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각지를 여행하다가 진도, 한산도, 여수 등 호남지방에서 많은 사당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당들이라 동네 어른들께 물으면 하나 같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사당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우리나라 전역에 저렇게 많은 사당, 즉 신전에 모시는 신 같은 존재가 있었단 말인가. 그로부터 충무공에 대한 책을 모두 탐독하기 시작했다. 『난중일기』을 정독하며 얼마나 오열했는지 모른다. 우리나라에 이런 영웅이 있었단 말인가. 평생 그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다만 그 당시의 복식을 공부하여 그의 초상화를 유화로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작업을 하느라 군대도 다녀오지 않고도 7년 동안 학부를 다녔다. 
 

1964년, 자화상
문리대 교정 마로니에 나무 아래에서


미래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경주를 생각했다. 그저 막연히 경주에 있는 고둥학교 독일어 교사를 하며 신라문화를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득 경주로 가서 역 앞에 있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근화여자고등학교를 찾아서 수녀 교장을 만나자고 청했다. 그러나 몇 마디 나누지 못하고 거절당했다. 나에게는 교사 자격증이 없었고 빈자리도 없었다.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당시 대구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독문과 동창을 찾아갔다. 그와 함께 대구에서 경주로 기차를 타고 오면서 방법이 없을지 상의했다. 반야월역을 지날 때까지 아무 대책이 없었다. 결국 빈손으로 서울로 다시 올라와 편입을 생각했다.

1967년 봄 대학을 졸업할 때 이미 부모도 안 계시고 전셋집을 살고 계신 큰 형님댁에 의탁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한 해를 그림과 붓글씨로 지내고 1968년 고고인류학과 2학년으로 학사 편입했다. 이미 편입을 고려하여 미학과 학점 40학점을 취득한 상태였지만 고고인류학과 김원룡 교수는 3학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고고인류학과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40대 중반에 『한국미술사』라는 개설서를 세상에 내놓은 김원룡 교수로부터 미술사학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미술사학 강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나도 한 학기 만에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장철수라는 학생이 나와 함께 2학년으로 편입했다. 나이는 다섯 살쯤 아래였으나 그와 친구가 되어 답사도 함께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여름방학이 되자 그에게 제안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수장고의 작품을 볼 겸, 대가 없이 유물카드를 써주자고 했더니 서슴없이 응했다. 조교에게 말했더니 그 역시 대환영이었다. 어둑한 수장고에서 함께 유물을 관찰하며 카드에 유물명과 작품의 조형성과 상태를 열심히 기록했다. 그런 와중에 국립박물관 미술과 학예관인 정양모 선생이 서울대학교 박물관 회화 소장품에서 낙관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조교에게 미술과에 사람이 필요한데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 천거해 달라고 청한 모양이었다. 조교가 나를 추천했다. 마로니에 나무 아래 벤치에서 앉아 정양모 선생과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는데, 당장 박물관 근무를 제안해 왔다. 느닷없이 갑자기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실은 그 전해에 문화부 장관이었던 매부의 소개로 국립박물관 김재원 관장을 만나 박물관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포부를 말했으나 거절당했었던 적이 있었다.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술사를 공부하겠다고 말하니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 박물관 수장고에서 유물카드를 쓴 인연으로 국립박물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인연이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갈망하면 반드시 꿈이 이루어진다는 신념이 평생 나를 지켜주었다.

1968년 봄 결혼했다. 몸도 약하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던 나였는데, 서울대 약대 출신 아내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내게 와 평생을 내조했다. 그런 상태에서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편입생 2학년에 직업도 없고, 장래도 미지수인 지극히 가난한 사람을 선택할 여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과거를 알기에 믿는 구석이 있어서 아내 친정 쪽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3월 15일 화창한 봄날에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3년 동안 연애하고, 때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했다. 다행히 6개월 뒤에 박물관에 취직하였으니 이제 안정된 생활에 정착하는 듯했다.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