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에세이] 코지마 만다라

일본 최고의 만다라에 숨은 의미를 밝히다

2019-02-26     강우방

스님들은 문자언어로 쓴 경전들을 공부한다. 그러나 원효보살元曉菩薩은 경전이 아니라 밤에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으니 최초의 선승禪僧 아닌가 중국유학을 향한 발길 되돌려 서라벌로 왔네. 『화엄경』 덮어버리고 분황사를 떠나 일상에서 마지막 실천 행을 이루지 않았는가. 불교는 제2의 길인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택하여 혁명을 이루었지만, 나는 조형언어라는 제3의 길을 개척하여 깨달음을 이루며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삶의 전선戰線에서 얼마큼 공헌을 이룬 사람들이 대개 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매일 매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극적인 나날인데 언제 먼 과거를 뒤돌아볼 틈이 있겠는가. 그래서 8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아직도 내 삶을 뒤돌아볼 여가가 없다. 자전적 에세이를 쓰는 까닭은 오늘날의 나의 작업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제3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게 되었는지 알리기 위함일 뿐이다. 퇴임하고 난 후 학문을 계속하는 분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것은 평생 연구하여오던 학문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인문학이나 예술은 퇴임하고 난 후에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앞세대의 미국 학자들이나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에서 보아왔지만. 이제는 미국이나 일본도 학교에서 퇴직하고 나면 더 이상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니 더욱 씁쓸해 진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인문학은 더욱더 세분화되어 평생 그 작은 주제만 다루다 보니 얼마가지 않아 연구할 주제가 고갈될 뿐만 아니라 세분화된 주제들도 만족스럽게 풀리지 않으니 퇴임 후 아무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다못해 전시가 열려도 가지 않는다. 취미로라도 살려서 가봄 직한데 전시도 가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니 가슴이 더욱 아프다. 그러다 보니 만나보면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의 이야기 등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되풀이할 뿐이다. 바야흐로 제3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지금, 무슨 회고록이나 자서전인가. 

1999년에 국립박물관을 퇴임하고 난 후 곧바로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로 부임하여 강단에 서자마자 학문적 변화가 점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몇 년 가지 않아 ‘변화의 확실한 궤도’에 올라갔음을 확신했고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시에 이화여대 뒷문 근처에 작은 개인 연구원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새로운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2005년이었다. 그러니까 서기 2000년, 즉 21세기는 내게는 기원전 전후만큼이나 나에게는 역사적 전환기임을 알고 연구원을 열었고 그즈음부터 지금까지 매일 매일 앞으로 앞으로 미래로만 나아갔지 과거를 되돌아볼 틈이 없어서 과거란 점점 더 멀어져 아스라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이야기를 쓰노라니 80년 삶이 800년, 아니 8000년은 지나온 것 같다. 이제 시간상으로 차례대로 쓴다면 대학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될 터이지만, 요즘 일주일간 일어난 큰 사건을 지나칠 수 없어 다시금 1960년에서 훌쩍 뛰어넘어 2019년으로 와서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쓰고자 한다. 그러니까 평생 한 일이 옳은지 일본학계의 반응을 보는 일이어서 운명적인 발표자리였다. 지난해 10월 1일 문득 일본 문화청과 교토국립박물관 공동 초청장과 함께 나의 연구 성과를 강연해 달라는 이메일이 왔다. 놀랐고 기뻤으나 한편 슬펐다. 현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들어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있을 터인 학자들은 보통 초청하지 않는다. 하여튼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둘러야 했다. 왜냐하면 기왕의 성과를 한국미술로 발표한다면 준비할 것도 없지만, 그러나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는 성격이라 새로운 주제를 찾아야 한다. 한국 학자가 일본에 초청되면 흔히 한국의 불교미술에 대하여 강연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평생 우리나라의 불교미술을 연구해왔다면 일본 미술도 연구할 수 있어야 나의 이론은 보편적인 것이 된다.

우리나라는 한국 불교미술만 연구하지 중국이나 일본, 더 나아가 티베트 불교나 불교미술 전공자가 없다. 그만큼 시야가 좁다. 일본의 스님 쿠우카이(空海 774~835)는 견당사遣唐使 일행과 함께 804년 장안에 도착하여 청룡사 혜과惠果로부터 밀교를 전수 받아 806년 귀국하여 고야산高野山 금강봉사金剛峯寺를 밀교도량으로 삼으며 밀교를 널리 펴며 적멸에 들기까지 지낸다. 823년 천황으로부터 교토의 도오지(東寺)를 하사 받아 일본 진언밀교의 총본산이 된다. 반면 통일신라는 40여 년에 걸친 유학생활을 마치고 821년에 귀국한 도의道義가 교학 중심의 불교계의 배척을 받았지만, 그 당시에 많은 승려가 830년과 840년 사이에 중국에 가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받아 돌아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열게 된다. 도의는 현재 한국 조계종의 조종祖宗이다.

일본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독특한 표현을 한 국보 만다라 그림 한 점을 택했다, 바로 10세기와 11세기에 걸친 제작시기가 설정되어 있는 <코지마(子島) 만다라>였다. 나라奈良 근처 코지마데라(子島寺) 소장이어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고후꾸지(興福寺)의 스님 신고우(眞興 935~1004)가 진언밀교의 한 류파인 코지마류(子島流)를 창시했으므로 그의 원력으로 만들어진 만다라이기 때문에 10세기 후반의 제작이라 해도 무난하리라.

만다라는 거의 다 양계兩界 만다라로 금강계 만다라와 태장계 만다라 두 폭이 세트를 이루는데, 코지마 만다라도 양계 만다라로 금강계 만다라는 크기가 세로 352, 가로 298센티미터이며, 태장계 만다라는 세로 351.5, 가로 306.2센티미터로 대작이다. 밀교만다라 회화를 연구한 적이 없는 나는 과감히 그 작품을 선정하여 발표주제를 일본에 보내 놓고 연구에 돌입했다. 평생 불교미술을 연구해오며 연구대상을 전 세계의 미술, 즉 인류가 창조한 일체의 조형예술품을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이란 이론으로 풀어내며 그 이론이 ‘보편적’이라 큰 소리쳐왔다면, 일본 밀교의 만다라도 풀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도오지(東寺)라는 진언종의 총본산이 있는 교토에서 일본 미술의 대표적 만다라를 발표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라국립박물관으로부터 받은 자료들을 50매 모두 프린트하여 놓고, 코지마 만다라 회화를 살펴보니 가로 세로가 3미터가 넘는 대작에다가 두 작품이 한 세트가 되므로 전체를 연구하려면 족히 한 해는 걸리리라. 우선 금강계 만다라를 살펴보니 본존이 대일여래大日如來여서 지권인을 맺은 우리나라 비로자나불과 같은 도상이라 금강계 만다라를 아홉으로 구분한 중에 본존이 그려진 상단 중앙 한 구역, 즉 일인회一印會만 연구하기로 했다.(사진 1) 비록 작은 부분이지만 사방 1미터의 그림에다가 정교한 갖가지 조형들이 가득 차서 분석하려면 3개월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 부분만 실물 크기로 확대하여 프린트하여 책상 옆에 세워두고 밑그림 그리기부터 시작했다.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이만한 그림 전체를 밑그림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다. 부분 부분에 투명지를 대고 밑그림을 그려서 합쳐야 한다. 그런 작업만 한 달 걸렸다. 이른 바 내가 개발한 <채색분석>이란 ‘작품 해독법’이다. 그리고 부분 부분을 단계적으로 스캔하여 채색분석을 마치니 또한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그 화면에는 넓은 테가 있는데 네 겹으로 되어 있어서 맨 가부터, 추상적인 영기문靈氣文(영기문이란 우주에 충만한 기운을 갖가지 조형으로 표현했는데 그 모든 것을 포괄한 용어로 그동안 이름이 없었으므로 필자가 이름 지은 것이다.), 그리고 가는 테로 가느다란 금강저가 연이은 영기문, 그 다음은 구상적 영기문으로 연꽃모양과 연잎모양 등이 연이어 있는 영기문, 그다음은 좀 굵은 테로 굵은 금강저가 연이어 있는 영기문 등으로 테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이런 무늬가 무엇인지 몰라서 논문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맨 가의 추상적 영기문은 고구려 벽화에서 내가 밝혀낸 연구 성과를 따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 영기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금강저金剛杵였다. 금강저는 밀교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법구이므로 티베트와 일본에 특히 많다. 우리나라에도 있지만 일본에서처럼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고려 사경寫經의 변상도變相圖 테두리가 모두 연이은 금강저이다. 그처럼 동양 불교미술 연구자들은 금강저란 이름은 모르지는 않으나, 놀랍게도 아무도 금강저의 상징을 올바로 해석하는 학자가 없으니 일반인들도 알 리 없다. 금강계 만다라에는 전체적으로 금강저가 무수히 많은데 그 실체를 모르니 만다라 회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금강이라고 말하면 그 말 안에 금강저라는 조형예술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바쥬라Vajura라고 하면 금강 혹은 금강저를 일컬었으며 경전에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백제시대에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般波羅密多經』 혹은 약하여 『금강경金剛經』을 금판에 새긴 우리나라 대표적인 첫 금판사경이 발견되었으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여 고려시대 것으로 오인한 것을 내가 그 석탑을 처음으로 백제시대 석탑으로 증명하여, 따라서 그 금판경도 백제시대 것으로 올려보게 되었다. 『금강경』은 금강경대승불교의 근본을 이루는 경전이며 제자 수보리須菩提와의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다. 선종에서는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금강경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가장 중요시한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금강저는 다음과 같다. 금강을 바쥬라Vajura를 음역하고 번역하여 금강金剛이라 하는데 이는 쇠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라는 뜻이다. 무기로서의 금강金剛은 금강저金剛杵를 말하며 제석천帝釋天과 금강역사가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 한다. 무엇으로도 이를 파괴할 수 없지만 이 금강金剛은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 한편 보석의 이름으로도 쓰이고 있으니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가 그것이며, 이 보석은 무색투명한 물질로 햇빛에 비치면 여러 가지 빛깔을 나타내므로 그 기능이 자재한 것에 비유가 된다. 결국에는 금강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불가파괴不可破壞와 보중지보寶中之寶와 무기 중에 가장 훌륭한 무기가 그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상식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어찌하여 가장 중요한 금강에 대한 이해를 세계의 모든 학자들이 모르고 있단 말인가! 그러면 금강저가 그토록 중요한가? 그렇다. 금강저를 모르면 동양의 불교미술의 전반이 근본적으로 전혀 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무수한 논문이 쓰여 지고 있으니 그 모든 논문이 많은 오류 위에 쓰여 질 때마다 점점 커진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면 금강 혹은 금강저는 무엇인가? 금강저의 핵심은 보주(Cintamani), 즉 여의보주如意寶珠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여의如意라는 지물이 있다. 아직 지물의 하나인 여의와 보주의 관계는 풀지 못하고 있다. 여의라는 말은 뜻대로 된다는 의미이므로 보주라는 보배 구슬을 획득하면 뜻대로 된다는 의미가 되는데, 아, 참으로 보주가 구슬 같은 보석이 아니고, 우주에 충만한 기운을 압축한 것이라는 실체를 알고 나니 실로 동양은 물론 서양의 미술, 즉 인류가 창조한 일체의 조형예술품을 뜻대로 풀려지고 있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보주란 무엇인가? 우주의 기운을 압축한 것으로만,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을 조형적으로 어떻게 표현하여 왔는가를 파악하여야 한다. 금강저는 ‘보주에서 강력히 발산하는 번개’다. 문헌기록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어서 세계의 조형예술작품들을 채색분석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20년 째 알아가고 있어서 지금도 그 인식의 심도와 강도를 깊고 강하게 파고들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인식의 심도와 강도는 끝없이 진전되어 갈 것이다. 그것은 철학사상에서 마치 도道나 태극太極과 같아서 그 추구함이 끝이 없다. 

그런데 용龍의 실체를 알아야 보주의 실체가 풀린다. ‘용과 보주는 같다’라고 말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용의 입에서 무량한 보주가 나오는 것처럼, 보주에서 무량한 보주가 나온다는 진리를 알면, 코지마 만다라 같은 어려운 회화도 완벽히 풀어낼 수 있다. 그런 테두리에서 대일여래가 화생하는 광경이 일인회의 내용이다. 여기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세세한 내용을 발표하자 모두가 경탄했다. 특히 불화 전공자이며 그날 좌담회 단상에 오른 교토국립박물관의 불화 전공자인 오오하라 요시또요(大原嘉豊)씨는 입을 벌리고 감탄! 감탄만 했다고 청중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의 저서인 『수월관음의 탄생』을 검토했는지 그 책을 꼭 사보라고 청중에게 권하고 그 책은 반드시 일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원래 발표 전에 코지마 만다라 회화를 친견하고 싶다고 지난 해 쇼소인전(正倉院展)에 나라국립박물관에 가서 마쯔모토 관장에게 부탁했었으나 소식이 없었고 이번 교토에서도 토론자로 참가했지만 아무 이야기도 없어서 나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표 이튿날 갑자기 코지마 만다라를 친견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정말인가, 하고 되물으면서 내 귀를 의심했다. 무슨 특별전 때나 겨우 출품할 수 있으며 개인이 보고 싶다고 해서 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토국립박물관과 문화청과 코지마 데라 사이의 긴급한 협조 아래 마침내 떠나는 날 오전에 친견이 허락되었다. 박물관은 일본 통운의 문화재 다루는 전문가 세 사람이 박물관 직원과 함께 대작을 펴고 두 시간 자세히 관찰했다.(사진 2) 그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여러 가지를 세세히 가리키며 설명했더니 몹시 놀라고 몹시 고맙게 여겼다. 나라박물관의 불화 전공자인 다니구치 코세이(谷口耕生)씨와 오오하라 씨 두 회화 전공자는 끝까지 나와 함께 움직였다. 두 폭을 모두 걸어놓고 보니 과연 매우 정교하게 그린 훌륭한 10세기의 그림이다. 감색 비단(紺綾) 바탕에 금과 은으로 선을 그은 그린 그림이라 우리나라 사경변상도를 극대화하여 그린 셈이라 더욱 감동적이었다.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불화다.

 

모든 내용이 처음 듣는 것이라 염려했는데 코지마 만다라를 친견하고 점심을 함께 하며 오오하라씨는 내 발표가 매우 논리적이라고 말하면서 선생님은 ‘동양의 국보’라고 서슴치 않고 말했다. 그러나 인류가 창조한 일체의 조형을 풀어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리 없어서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번 발표로 일본의 불교미술 연구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허망한지를 깨우쳐준 뜻 깊은 것이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오며 나의 자신감은 하늘을 뚫고 솟구치는 용오름 같았다.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