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개론] 행위와 과보, 그리고 불교의 선악관

2019-02-26     장휘옥, 김사업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 원수처럼 행동한다.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악업을 행하기 때문에.” (『상윳따 니까야』 2.22)
“말을 삼가고, 생각을 잘 제어하라. 몸으로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이 [신・구・의] 3업의 길을 청정히 하면, 선인(=붓다)들이 설한 길에 도달할 것이다.” (『법구경』 제281송)

|    행위와 과보가 일어나는 과정과 그 교훈
우리가 하는 행위, 즉 업은 다음 세 가지 중의 어느 하나다. 첫 번째가 몸으로 행하는 신체적 행위로 이것을 신업身業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입으로 하는 행위, 즉 말(언어)이다. 이것을 구업口業이라고 한다. 세 번째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 즉 생각(정신 작용)으로 이것을 의업意業이라고 한다. 이 셋을 모두 합쳐 3업三業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이 행위를 다시 선악을 기준으로 셋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선한 행위를 선업, 악한 행위를 악업,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아닌 중성적인 행위를 무기업無記業이라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신업・구업・의업 가운데 어느 하나인 동시에 선업・악업・무기업 중의 어느 하나다. 가령 아무런 사심 없이 타인의 짐을 대신 들어 주었다면 그것은 신업인 동시에 선업이다.

불교의 업사상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원칙으로 한다. ‘선인락과, 악인고과’와 ‘자업자득’이다. ‘선인락과善因樂果’는 선업에는 좋은 과보(=행복)가 따르고, ‘악인고과惡因苦果’는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불행)가 따른다는 뜻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은 행위를 한 당사자가 그 행위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선・악・무기업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한다. 행위는 그 행위를 일으키려는 의도에 의해 일어난다. 불교는 의도가 행위, 즉 업의 본질이며, 중생에게는 ‘의도의 자유’가 있다고 인정한다. 선・악・무기업 중에서 어느 것이라도 행할 수 있지만 그 중의 어느 하나를 행하는 것은 ‘의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한 행위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행위의 당사자에게 그 행위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올 힘이나 영향력을 남기고 사라진다.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 따르면 이 힘이나 영향력은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보존된다. 아뢰야식은 우리 마음의 뿌리에 해당하며 일종의 무의식에 가깝다. 땅속에 있는 뿌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듯이, 아뢰야식은 그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작용한다. 단 1초도 멈추는 일 없이 언제나 작용한다. 

적당한 온도와 영양분이 주어졌을 때만 씨앗에서 싹이 트듯이, 자신이 행한 행위가 남긴 힘이나 영향력에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본인에게 행・불행의 과보가 찾아오거나 그 힘의 성질에 맞는 새로운 행위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악업이 남긴 힘에 적당한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불행이 찾아오거나 또다시 새로운 악업을 행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절도 행위를 하면 적당한 때에 형벌 등의 과보를 받는다. 또한 적절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이전의 절도 행위가 남긴 힘에 의해 또다시 절도를 포함한 악업을 행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악업을 반복하면 그것으로 인해 남겨지는 악한 힘은 더욱 강성해질 것이고, 또다시 악업을 행할 가능성이 높아짐과 동시에 더 강력한 과보가 도래할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행・불행의 과보든 동일한 성질의 새로운 행위든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은 본인의 ‘의도의 자유’에 의해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출퇴근 만원 지하철만 타면 소매치기 하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하는 절도범이라면, 의도적으로 붐비는 지하철 승차를 피하는 것도 더 이상 소매치기 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사업 실패를 반성과 도약의 계기로 삼겠다는 의도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불행은 더 이상 불행이 아닐 것이다.

윤회를 통하여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선업만 행한 사람도 없고, 악업만 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선업과 악업이 남긴 힘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선업과 악업 중 어느 쪽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며, 행・불행의 과보 중 어느 쪽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가능성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실제의 행위나 과보로 실현된다.

조건은 ‘의도의 자유’에 의해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으므로, 노력과 정진으로 바람직한 조건을 만들면 선업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고, 그 결과 좋은 과보가 찾아온다. 따라서 과거의 어느 행위 때문에 운명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거나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은 부정된다. 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일어난다는 ‘신의론’도 부정되고, 아무런 원인 없이 만사는 일어나므로 행위에는 과보가 없으며 선업을 행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우연론’도 부정된다.

석가모니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붓다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업론자이고 행위론자이며 정진론자라고 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며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은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거나 방심하지 말고 정진하라”였다. 불교가 ‘의도의 자유’에 근거해 노력・정진하는 것에 얼마나 큰 의의를 부여하는가를 잘 보여 주는 대목들이다.

과거의 행위가 남긴 힘과, 자유로운 의도에 의해 형성되는 현재의 조건들에 의해 모든 행위가 일어나고 과보가 나타난다. 과거의 행위를 한 자도 본인이며 현재의 조건을 만드는 자도 본인이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와 과보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조건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행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 현재 본인의 상황은 직전까지 본인이 행한 행위의 총체적 결과다. 그러니 남 탓하지 말고 정신 차려 정진해야 한다. 다음의 경전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둘 필요가 있다.

이 악업은 실로 너에 의해 행해졌다. 타인이 아닌 네가 그 과보를 받을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 130)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 원수처럼 행동한다.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악업을 행하기 때문에. (『상윳따 니까야』 2.22)

말을 삼가고, 생각을 잘 제어하라. 몸으로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이 [신・구・의] 3업의 길을 청정히 하면, 선인(=붓다)들이 설한 길에 도달할 것이다. (『법구경』 제281송)

악업을 행한 본인이 그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 따라서 악업을 행하는 것은 결국 원수를 괴롭히듯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니 정진하여 몸으로 하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늘 청정히 하면 붓다의 길에 이르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    불교 선악관의 중층重層적 구조
무엇이 선이고 악이냐 하는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매우 어려운 난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선악의 기준 문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논의되어 온 것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다. 

불교는 선악의 문제를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대표적인 것이 세간적 차원과 출세간적 차원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전자는 세속적인 차원이며, 후자는 세속을 초월한 차원이다. 세간적 차원의 선이 유루선有漏善이며, 출세간적 차원의 선이 무루선無漏善이다. 여기서 ‘누漏’란 물이 새는 것을 ‘누수’라고 하는 것처럼 ‘새어 나옴’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이 ‘누’를 ‘번뇌’와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탐욕의 대상을 보았을 때 눈이 이글거린다’는 표현이 있듯이 번뇌는 눈・귀 등을 통해 새어 나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루’란 번뇌가 있는 것이고, ‘무루’는 번뇌가 없음을 의미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유루선’이란 번뇌가 묻어 있는 선한 행위를 말하고, ‘무루선’이란 번뇌가 전혀 없는 완벽하게 선한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가 선악을 평면적으로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이라 해서 다 같은 선이 아니라, 번뇌의 때가 묻어 있는 선과 그렇지 않은 선 등 선에도 다양한 차원이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선을 유루선과 무루선으로만 나누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선’인 승의선勝義善과 ‘그 자체로서의 선’인 자성선自性善 등 4가지 차원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열반이 승의선이며, 3선근三善根 등이 자성선이다. 3선근은 ‘선의 근본이 되는 3가지’라는 뜻이며, 무탐(無貪, 탐욕이 없음)・무진(無瞋, 증오가 없음)・무치(無癡, 어리석음이 없음)가 그것이다. 3선근의 반대 개념이 3불선근三不善根인데, 모든 악의 근본이 되는 탐・진・치 셋을 가리킨다. 탐・진・치는 세 가지 독과 같다고 하여 3독三毒이라고도 부른다.

유루선을 행하면 행한 본인은 사후에 천상에 태어나거나 현실에서 세속적 행복은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을 성취할 수는 없다. 무루선을 행해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이에 대해 『법구경』 제126송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어떤 자들은 사람의 태에 잉태되고, 악업자들은 지옥에 떨어진다. 선업자들은 천상으로 가고, 번뇌가 소멸한 자들은 열반에 든다.” 유루선을 추구하는 것이 세간적 차원이며, 무루선을 추구하는 것이 출세간적 차원이다.

유루선과 무루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분될까? 서울에 사는 당신이 동료들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시골 벽지로 가서 무보수로 자원봉사 활동을 한 달간 했다고 하자. 거기까지 가는 경비도 당신이 부담했다. 이렇게 한 자원봉사는 당연히 선업이다.

그런데 자원봉사가 끝나는 날, 자원봉사를 받은 사람들이 당신의 동료에게는 극진히 감사를 표하는데 당신에게는 별반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때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섭섭한 생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선업을 행하기는 했으되 ‘선업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고 그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이 한 선업은 이와 같이 번뇌의 때가 묻은 유루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루선이란 어떤 것일까? 무루선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보시를 하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 보시물(施物)에 대한 어떠한 집착도 없이 행해지는 보시다. ‘나’는 없고 순수한 보시만 있는 보시, ‘나’가 없으면 받는 상대도 없고 무엇을 얼마 주었다는 집착도 없다. 따라서 그 과보(대가)에 대한 집착도 있을 리가 없다. 이러한 보시가 육바라밀다 가운데 ‘보시 바라밀다’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내가 무주상보시를 했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무주상보시가 아니다.

업사상의 두 기본 원칙은 ‘선업에는 좋은 과보가,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와 ‘자업자득’이라고 했다. 업사상은 과보에 대한 기대와 집착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이러한 업사상은 세간적 차원의 교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업사상은 출세간적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준비적 가르침에 해당한다. 출세간적 차원에서는 과보에 대한 번뇌가 남아 있는 유루의 선악은 초월해야 할 대상이다. 경전에서 “선도 악도 버리고 끊는다”라든가 “선과 악 양쪽에 대한 집착을 초월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출세간적 해탈・열반의 경지에서 선악의 문제는 어떻게 될까? 유루선과 무루선은 과보 등에 대한 세간적 집착이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유루선과는 별도인 무루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가를 바라는 유루의 보시에서 일체의 집착이 없어진 보시가 무루의 보시이며 무루선이다. 따라서 유루선과 무루선은 서로 동떨어져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유루선은 무루선에 이르기 위한 전 단계이며, 유루선에서 무루선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불교다.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고 끄달림이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른 성자는 번뇌가 소멸된 무루선을 행한다. 무루선은 유루선에서 세간적 집착만 소멸된 선이므로 그는 저절로 세간의 규범에 합치하여 그릇되게 행하는 일이 일체 없다. 선악에 대한 집착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행하는 모든 것이 선에 부합되는 것이다.

세간적 차원의 선악과 출세간적 차원의 선악, 이 둘의 상호 관계는 7불통계게七佛通戒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게송은 『법구경』(제183송)을 비롯하여 여러 경전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인데, 중국과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에서는 예부터 ‘7불통계게’로 불렸다. 7불이란 석가모니와 그 이전에 출현했다는 여섯 분의 붓다를 합쳐서 칭하는 용어다. 이 7불의 공통된 가르침을 압축해 놓은 것이 7불통계게인 것이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도림 선사와 백거이 시인의 일화는 유명하다. 당나라의 조과 도림(741~824) 선사는 거처하는 산의 낙락장송 위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과鳥窠’, 즉 새 둥우리에 앉아서 사는 선사라 불렀다. 당대의 대시인이자 정치인인 백거이(772~846)가 그 고을의 태수로 부임했는데 그를 찾아와 나무 위에 앉은 선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선사께서 머무는 곳이 매우 위태합니다.”
“태수의 위험은 더욱 심하오.”
“저의 지위가 강산을 진압하고 있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
“장작과 불이 사귀듯 망상이 멈추질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소?”

백거이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불교의 핵심입니까?” 이에 대한 조과 선사의 대답이 7불통계게의 제1구와 제2구의 게송이었다. “모든 악업은 짓지 말고, 뭇 선업은 받들어 행하시오.” 백거이가 “그건 3살 어린애도 알겠습니다” 하고 응수하자 조과 선사는 “80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소”라고 일침을 가했다. 백거이는 마침내 머리 숙여 절했다고 한다.

7불통계게의 전문은 이렇다. “모든 악업은 짓지 않고, 뭇 선업은 받들어 행하되,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제1구와 제2구에서 말하는 ‘악업을 멈추고 선업을 행하라’는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에서 빠짐없이 하는 교훈이며, 세간적 차원에서의 선악에 대한 언급이다.

‘선업을 행하고 악업은 짓지 마라’는 선언을 튼튼하게 지탱시켜 주는 것은 ‘선업에는 좋은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는 원리다. 즉 자신에게 좋은 과보의 획득과 괴로운 과보의 회피를 약속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업을 행하고 악업을 짓지 않으려고 한다. 유루의 선악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익에 끄달리게 하는 번뇌와 집착을 유발시킨다.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유루선에 남아 있는 이런 번뇌와 집착마저 온전히 없어져 마음이 청정해져야 한다. 이 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게송의 제3구인 ‘그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다. 마음을 청정히 했다고 해서 세간적 선악을 무시하거나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유루선이 아닌 무루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무루선이란 유루선에서 번뇌의 때만 완전히 제거된 선善이다. 대가를 바라는 보시가 유루선이라면, ‘내’가 했다는 흔적이 없어 대가에 대한 일체의 집착도 없는 보시가 무루선이다. 이 무루선을 행하는 단계가 제3구의 차원이며, 출세간의 차원이고, 열반의 경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일반적인 윤리와 도덕과는 차원이 다른, 종교로서의 불교의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제3구의 차원에서는 위에서 밝힌 대로 아무런 걸림 없이 저절로 세간의 규범에 합치하여 그릇되게 행하는 일이 일체 없다. 선악에 대한 집착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행하는 모든 것이 선에 부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출세간의 경지는 세간적 선악의 무시가 아니라, 그것의 출세간적 승화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세간적 차원의 유루선도 경시하지 않는다. 무루선으로 가기 위한 전 단계로 보기 때문이다. 세간적 선과 출세간적 선, 유루선과 무루선을 모두 아우르되, 유루선을 무루선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통해 집착과 번뇌가 한 점 남지 않은 대자유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 제4구, 즉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에 해당한다. 제4구는 제1・2구와 제3구를 하나로 결합한 것이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일본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화엄사상으로석사・박사학위를받고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걷는자,너는누구냐』(공저),『무문관참구』(공저) 등이있다.

장휘옥ᆞ김사업
두 사람은 전문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