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선한 인연

2019-02-07     이근후

인연因緣. 인연이란 말은 참 정겹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인연이란 단어를 자주 쓴다. 불가에서 말 하는 심오한 뜻에는 이르지 못하나 곁에 두고 자주 쓰는 말이다.

오래전이야기다.진찰실로한청년이찾아 왔다. 그는 서울에 취직이 되어 올라 왔는데, 어머 니가 서울 가면 제일 먼저 나를 찾아가 인사드리 라고 했다면서 자그마한 선물을 내밀었다. 청년과 청년의 어머니, 그리고 나와의 인연은 이렇다.

청년의 어머니가 대학생일 때 뇌전증으로 나 에게 치료를 받았다. 졸업하고 결혼한 뒤에도 치료는 계속되었다.

“선생님, 확신하세요?”라고 묻던 그녀의 목소 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오랫동안 항경련제를 복용 한 그녀는 임신을 하자 기형아를 낳을까봐 불안해 했다. 그녀는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 었다. 나는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자세 하게 설명해 주었다. 문헌에 기형아를 출산한 경 우가 보고되긴 했지만, 나의 임상 경험으로 지금 복용하고 있는 항경련제의 유지량으로는 기형아 를 낳을 확률이 낮다고 했다. 나의 설명에 그녀가 되물었다.

“선생님, 확신하세요?” 나는 뭐라고 답했을까.

“네. 확신합니다.” 돌이켜보면당시나는왜그런겁없는확신

을 환자에게 주었을까 싶다. 나의 확신을 믿고 낳 은 아기가 훤칠한 청년이 되어 갑자기 눈앞에 나 타났으니 어찌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까.

또 하나의 인연이다. 지난해 지인의 아들이 결혼 주례를 부탁했다. 쾌히 승낙하면서, 나를 주례 삼으려 한 것은 누구의 뜻인지 물었다. 혹시 어머 니의 요청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아니란다. 신랑신 부가 의논해서 주례를 부탁한 것이란다. 신랑의 어 머니는 환자는 아니었지만, 종종 부부관계나 일상 에서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녀가 젊은 날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후, 중절수술을 받 고 싶다고 의논한 적이 있다. 수술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현실적으로 타당하거나 부득이한 이유 들을 듣고 나니 그녀의 제안을 물리치기가 어려웠 다. 그래도 나는 선뜻 수술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내 몸을 의탁해서 세상에 나올 생명인데...”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아이를 낳은 뒤 일어나는 어려운 상황에 이르기까지, 함께 고민을 나누었다.

상담을 청하는 대부분의 내담자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행동이나 생각하고 있는 사고가 정당하 다고 확신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고, 반대로 자기 생각이나 행동을 말려달라고 호소하는 무의식 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지인의 경우는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야겠다는 자기 확신을 동의 받고 싶 은 생각과 반대로 자기 결정을 좀 말려달라는 무의 식이 공존했다. 나는 그녀와의 면담에서 ‘제발 말 려주세요’란 쪽으로 느꼈다. 그래서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해 충분히 깊게 나누면서, 그녀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끔 했다. 그 인연으로 태어난 아기가 나에게 주례를 부탁했으니, 이 또한 가슴 뭉클 한 일이다.

물론 내 충고가 전부는 아닐것이다. 어떤 충고를 받았든지, 최후의 결정은 그녀 스스로 선택 해서 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연으로 치면 그녀가 선택한 결정이 가장 큰 인연이고, 나의 충고는 그 녀가 참고로 한 작은 인연이다. 결혼식 날, 나는 주 례사를 하면서 이런 사실을 말해주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참았다. 생각하면 잘한 일이다.

인연이란 다른 말로 하면 관계다. 이리저리 칡넝쿨 얽히듯 얽혀 있는 관계들이다. ‘하찮은 돌 이라도 인연이 있어야 발부리에 차인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하찮은 돌도 이런 인연이라면, 하물 며 사람의 인연이야 말해 무엇할까. 한 연구에 따 르면 인간관계에서 4단계 정도의 깊이로 찾아 들 어가면 어딘가에 꼭 얽혀 있는 인연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으니, 누구든 지척에 있는 인연이다 싶 다. 어느 선배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지내 놓고 보니 참 좋은 인연으로 인해 행복 했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나고 보니 선한 인연 들로 행복했다는 뜻이다. 기해년 올해는 여러모로 어려운 한 해가 예고된 한 해다. 그래도 열심히 살 아보자. 열심히 살면서 선한 인연을 만들어보자. 기해년이 저무는 섣달그믐에 우리 모두 ‘지내 놓고 보니 참 좋은 인연으로 인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환자를 돌봤다. 퇴임 후 아내와 함께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매년 네팔을 찾아 의료봉사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저서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