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에세이] 길손 그리고 도반

2019-02-07     김택근

모든 생명에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며 탁발순례하는 무리, 이름하여 생명평화탁발순례단. 그들과 길을 나섰다. 어림 15년 전의 일이다. 도법스님의 뒤를 밟으며 순례단원들은 모든 마을을 찾아가 빌어먹기로 했다. 밥 주면 밥 먹고, 욕하면 욕을 먹고, 때리면 맞기로 했다. 순례단은 평생 길에 머물렀던 부처님의 흉내를 내기로 했다. 길에서 이 시대 생명평화의 길을 찾는 여정이었다. 나는 드문드문 합류했다. 어느 날 보니 길 위에 있음이, 길을 걸음이 편해졌다. 길을 걸으면 숱한 생각이 돋아났다가 사라졌다. 그러다 문득 뒤엉킨 생각들이 명료해졌다. 그 때의 소회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짐승들은 달리고,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지렁이는 기고, 인간은 걸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들만이 걷지 않는다. 걷기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어 버렸다.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온존하게 하는 몸짓이다. 자신을 버려 자신을 돌아봄이다. 걸음에서 자신을 찾는 것이다. 걸음의 시작에서 끝까지 모든 동작을 면밀하게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따라가 보면 안다.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알라’는 가르침이 몸속으로 스며든다. 걸음에 온전히 나를 맡기면 걸음자체가 인생이요 세상이다. 그렇게 걸음 자체에 나를 맡기면 비로소 자신이 보인다.’ (졸저 「사람의길」)

둘러보면 걷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걷기 열풍이 불었고, 누구는 걷기혁명이라는 용어를 구사하며 걷는 행위를 예찬하고 있다. 걷는 이들은 걸어서 행복하다고들 말한다. 걷기 열풍은 물론 내 몸 챙기기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변화는 육체에만 깃들지 않았다. 걷다보니 삶의 기름기도 빠지기 시작했다. 포만감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왔다.

‘가진 것이 삶을 짓누르고 있었구나.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이 결국 내 숨통이었구나.’ 걷는 것은 비움이다. 자신을 한 곳에 가두지 않음이다. 걷다보면 가진 것이 짐이 되고, 그 가진 짐은 이내 무거워진다. 많이 지고 갈 수 없으니 자연 가진 것을 풀어 놓아야 한다. 이는 나눔도 되고, 베풂도 되고, 또 자유도 되는 것이다. 두 발에 목숨을 맡겨 본 사람은 어느 순간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양심의 소리일 것이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들이 보인다.

길손이라는 정겨운 단어가 있다. 집을 떠나 여행 중인 사람을 일컫는다. 친구를 만나러, 돈을 빌리려, 집나간 사랑을 찾으러 먼 길을 걸어야 했다. 걸음마다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걸으면서 생각을 숙성시켰다. 그런 길손을 위해 여염집도 스스럼없이 대문을 열었다. 옛날 우리 모두는 길 위에 있었다.

길손이란 말이 사라져 가고 있다.사람의 길을 바퀴들이 점령하고, 그 바퀴 위의 사람들을 더 이상 길손이라 부르지 않는다. 차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은 미움이나 분노 같은 것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차에 싣고 다닌다. 날 것의 감정은 실시간으로 상대를 찌른다. 바퀴 위의 사람들에게 집들은 결코 문을 열지 않는다. 대신 숙박시설이 즐비하다. 우리 모두는 길 아닌 차 안에 있다.

새삼 불가의 도반道伴이라는 말이 가슴에 닿는다. 함께 걷는 길 위의 짝이거나 깨달음을 향해 가는 구도의 동지. 듣는 것만으로도 두 손을 모으게 한다. 안거를 위해 바랑 하나 지고 선방으로 걸어가는 스님들 뒷모습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신성神性이 느껴진다. 길 위에서 스님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아마도 조금만 걸으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과 몸짓이 말할 것이다. 길에 길이 있으니 길에서 길을 찾을 것이다. 도반, 이 말만은 제발 그 뜻이 엷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는 앞서간 사람이 밟아서 생겨난 길을 걷는다.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걸음은 축복이다. 말하지 않아도 편한 사람과 함께 걷고 싶다. 그리하여 어느 마을에 들어가 누군가의 길손이 되고 싶다.

 

김택근
시인, 작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오랜 기간 기자로 활동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