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나를 흔들다] 할머니 말씀

2019-01-04     박부득

| 나의 ‘관세음보살’ 외할머니와 우리 엄마

어느덧 짙은 녹음을 밀어내고 울긋불긋한 단풍잎들이 온 거리를 뒹구는 계절이 찾아왔다. 이 모든 계절이 내겐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관세음보살. 아주 오래전부터 관 세음보살을 생각하면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외할머니와 엄마가 떠오른다. 나의 ‘관세 음보살’이신 외할머니, 지금 이 시간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지켜봐 주셨던 엄마다.

5살 즈음부터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동네의 작은 암자로 매일같이 향했다. 계 단을 오르내리는 할머니는 항상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 불...” 하시며 노래같이 읊조리셨다. 그 염불소리를 들으며 내 유년 시절은 흘러갔다.

내 나이 18세 꽃다운 나이가 될 즈음 어느 화창한 5월 단옷날, 창포물에 머리 감 으시고 고운 옷 차려입고 절에 가신다던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좋아하시고 사랑하 시던 관세음보살님을 만나러 먼 여행길을 떠나셨다. 나의 영원한 관세음보살이신 할머니의 가르침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대로가 법문이었고 내 인생 후반의 목표가 된 계기이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뜨거운 물을 하수도에 붓지 마 라,” “생명을 귀하게 생각해라,” “배고픈 사람 밥 한술 먹게 하라,” “보시를 잘해야 된 다.” 지금도 생생하게 귓전을 울리는 말은 “흘러가는 물도 떠서 주면 공이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내가 이해하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내 인생 목표는 영등포의 ‘쪽방도우미봉사회’로 향한다. 쪽방도우미봉사회는 영 등포 쪽방촌에 계신 분들에게 매주 목요일 점심과 도시락을 나누는 봉사회다. 이 일 을 시작하며 독거노인과 장애인분들 그리고 쉴 곳조차 없는 노숙인들과 함께한 시 간들이 어느덧 30년도 훌쩍 지나가 버렸다.

처음 봉사를 시작할 때는 정말로 어렵고 힘든 여정이었다. 매주 목요일 도시락 반찬을 준비해서 배달을 다니고 어르신들의 말동무도 하면서 일주일을 보내고, 또 그렇게 목요일을 맞이했다. 일주일에 한 번, 목요일이지만 우리는 일주일 내내, 한 달 내내 이곳에 마음을 두고 지냈다. 때로는 반찬거리가 없어서 새벽청과시장을 누비 면서 우거지를 얻어와 된장국을 끓이기도 하며 매주 도시락을 마련했다. 그렇게 이 어온 마음은 사람으로 이어졌다. 한두 사람씩 봉사자가 늘어났다. 우리 모두는 각자 의 관세음보살님들을 마주하면서 수많은 목요일을 보내었다.

봉사자들은 점차 더 늘었다. 드디어 2016년 6월, 영등포쪽방촌에 봉사회 가건 물을 짓게 됐다. 이제 쪽방도우미봉사회는 그 가건물 현장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500~800인 분의 국수를 삶아서 드리고 있다.

 

| 가슴에 살아있는 진정한 ‘관세음보살’님들

모든 게 부처님 가피다. 새삼 부처님의 가피가 이렇게 감사할 수 없다. 쪽방도우미봉사회에서는 매일매일 멋지고 감사한 일들이 생겨나곤 한다. 지금도 잊지 못할 어느 노 보살님 두 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두 보살님을 소개하고 싶다.

쪽방도우미봉사회가 불자들로 구성된 단체다 보니, 타 종교 단체에서는 우리 봉 사회의 주방이 불법 무허가 가건물이라고 각 기관에 18회 이상의 민원과 고발을 일 삼으며 괴롭히기도 했다. 지금도 1년에 벌금이 천만 원씩 나온다.

이런 상황을 알고 계시던 최 보살님께서는 가건물인 컨테이너 박스에 ‘관세음보 살’님을 모셔주었다. 물론 스님께서 점안식도 해주셨다. 그 이후 우리 봉사자들은 이 곳에서 한 달에 한 번 ‘다라니 108독’ 철야 기도를 시작했다. 철야 기도도 어느덧 2년 이 다 되었다.

순간순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벅찬 환희심을 느끼게 되었다. 노 보살 님께서는 오랜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잠깐 의식이 돌아오실 때 따님에게 제일 먼저 쪽방 도우미 봉사회의 안부부터 물어보셨다고 했다. 그리고 계속 봉사회를 돌보아 주라고 하시면서 먼 길을 떠나셨다.

또 한 분의 노 보살님이 계신다. 누구신지 얼굴도 모르는 노 보살님은 1 년이 넘도 록 멸치, 다시마, 양파, 황태 등 잔치국수에 필요한 재료들을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셨 다. 누구신지 여쭤봤지만, 그냥 건강이 안 좋아서 병원에 계신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 다. 우리들은 부족함 없는 재료에 그분에게 감사의 마음만 전달할 때, 어느 날 보살님 과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고 매달 부쳐오던 재료들이 끊어졌다. ‘보살님의 병환이 더 깊어지신 것일까’ 걱정하고 궁금해할 때쯤 한 노 신사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노 보살님의 남편분이신데 할머님께서 돌아가셔서 49재 중이라 물건을 보내지 못하였다는 말씀이었다. 울먹이시는 할아버님의 목소리.... 할머님께서는 암으로 투 병하시다가 돌아가실 때 ‘당신이 떠나고 없어도 쪽방도우미봉사회에 재료는 계속 보내주시라’고 할아버님께 유언을 하셨다고 했다. 지금 할아버님께서도 암으로 투 병 중이라 하신다. 당신께서도 할머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당신께서 돌아가시는 날 까지 계속 국수 재료를 보내주시겠노라고 전화를 주셨다.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큰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 이분들은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있는 진정한 ‘관세음보살’님들이시다. 물론 이 두 분 외에도 진정한 나눔을 실천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다.

 

| 불교, 진정 나를 바꾸다

불교! 진정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일까?

두 분의 행동과 나눔의 모습들을 돌이켜보면서 여태까지 나의 모습들은 무엇이 었나, 돌이켜 본다. 30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인연들과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외할머니가 가르쳐준 진정한 보시와 봉사의 의미를 잘 실천했는지 생각해본다.

이 모든 일들도 모두가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하면서 매주 목요일을 맞이하고 있다. 목요일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신나게 웃을 수 있 는 날이다. 쪽방도우미봉사회는 내 인생, 내 삶의 일부분이 됐다.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것. 쪽방과 내가 둘이 아니다.

참 부처님께 감사하다. 우리는 남들보다 부처님 가피를 딱 10배는 더 받는 것 같 다. 내가 즐겁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어느덧 나의 일상은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내 나이 어느덧 60도 훌쩍 지났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나도 어느새 손주의 고사 리손을 잡고 절에 다니고 있었다.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아이는 어느덧 두 번의 동자승 출가 체험을 하고, 지금은 중학생이 되어서 청소년 법회를 다닌다. 어여쁜 손 주의 모습을 보면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나의 외할머니께서 그러셨 듯이....

 

박부득.
법명 정일화. 조계사 인천모임지회장이며 붓다맘봉사단장이다. 쪽방도우미봉사회에서 30년째 봉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