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501번째 나한

국립춘천박물관 <창령사 터 오백나한 :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전시 리뷰

2019-01-03     마인드디자인(김해다)

춘천국립박물관이 창령사지에서 발굴한 오백나한 특별 전시로 이목을 모으고 있다. 전시된 나한상들은 오래전 폐사된 절터에서 발굴된 까닭에 역사적, 종교적 배경도 흐릿하지만, 꼭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그 순수하고 격의 없는 모습에 단번에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국적인 인기에 힘입어 박물관은 작년 11월까지로 예정되어 있던 전시 기간을 올해 3월까지 연장하기도 했다. 문화재 전시가 이렇게 인기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 되짚어보며, 그 뜨거운 현장에 다녀왔다.

|    땅에서 나투신 나한존자
2001년 강원도 영월 남면 창월리의 한 야산에서 토지 경지작업을 하던 주민 김병호 씨는 땅속에서 50cm 남짓한 크기의 큼지막한 돌을 발견했다. 그냥 돌이 아니었다. 어렴풋하지만 돌에 ‘표정’이 비쳤다. 토지 소유자의 신고로 발견문화재 긴급 수습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 표정 있는 돌들의 정체는 나한상. 지금까지 총 317점의 나한상이 출토되었고, 숭령중보(1102~1106년에 주조된 송나라 화폐)와 고려청자, 배수로, 석축, 기우제 터와 함께 ‘창령蒼嶺’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옴으로써 농사를 지으려던 이 야산이 고려 12세기 무렵 세워졌던 사찰 ‘창령사’의 터였음이 밝혀졌다. 막연히 절터였다고 전해오던 옛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발굴 당시 나한상들은 64점을 제외하고 모두 파손된 상태였다. 수년에 걸친 복원 끝에 13점이 추가로 본 모습을 찾아, 이번 전시의 주인공이 됐다.

|    마음 속 정원에서 만나는 나한
나한전이 열리는 박물관 2층 특별전시관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섰다. 문 너머로 일제히 나를 향해 있는 수많은 나한상의 시선을 느끼며 잠시 숨을 골랐다. 주로 정보를 나열하는 형식의 여느 박물관 전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다. 외부 공간과 확연히 구분되는 어둑어둑한 전시실. 바닥에는 수천 장의 벽돌이 깔려 있고, 무어라 정의내릴 수 없는 사운드가 흘러나오는 전시실에 입장하자, 산란했던 마음이 ‘탁’ 하고 고요함으로 전환되는 듯했다. ‘관람’하기보다는 ‘산책’하듯 전시실을 거닐며 듬성듬성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나한들과 인사를 나눠본다. 한 분씩 ‘안녕하세요’ 하며 눈을 맞추고, 다시 걸음을 옮겨 ‘안녕하세요’ 하고 잠시 바라본다. 이 초현실적 공간에서 관람자는 나한상을 보지 않고 ‘만난다’.

공간 설계는 설치미술가 김승영의 작품 ‘Are you free from yourself?’과 오윤석 작가의 사운드 작품을 더해 완성되었다. 바닥의 벽돌에는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등 사유를 촉발시키는 글귀가 이따금씩 새겨져 있다. 때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기도 하고, 깊은 사색을 끌어내기도 하는 나한상의 힘이 순간의 몰입을 극대화시키는 공간과 어우러져 드라마틱한 시간을 선사한다.

어느 것 하나, 같은 얼굴이 없는 수많은 나한상들. 그 표정 하나하나를 새기며 품었던 조각가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한羅漢은 ‘arhan’이라는 범어를 음역한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로서 모든 번뇌를 벗어나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를 가리킨다. 중생을 구제하고 불법을 수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실천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날아다니기도 하고 변신술을 부리거나 수명을 연장시키는 능력까지 갖추었다고 전해지면서 나한을 숭배하는 ‘나한신앙’이 발전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특히 성행했다고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나한재를 지냈고, 나한을 봉안하는 영산전, 나한전 등이 건립되었던 것도 이때이다. 고려가 저물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던 혼란스러운 시기. 아마 조각가는 고달픈 시기에 힘든 일상을 살아내는 내 이웃, 내 가족의 얼굴을 새기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    501번째 나한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직후, 설법을 모아 경전으로 만들기 위해 모였던 가섭을 비롯한 오백 명의 제자 오백나한. 그들이 등장하는 그림이나 조각은 항상 재미있다. 활짝 웃고 있기도 하고 입꼬리를 쭉 내린 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기도 하며, 심지어 잔뜩 화난 얼굴로 째려보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깨달은 자’인데도 불상처럼 화려한 광배를 이고 있지도, 근엄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도 않다. 희로애락을 감추지 않고 인간의 모습 그대로 조형화된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중생과 붓다가 둘이 아님을, 붓다는 중생을 떠나서 있지 않음을 느낀다. 게다가 깨달은 자가 오백 명이나 있다니! 부지런히 수행정진하면 나도 이들 중 하나가 꼭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온전히 웃고, 울고, 기뻐하는 오백나한의 얼굴을 보며, 내 안에 있는 501번째 나한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창령사 터 오백나한 :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展

•장소 : 국립춘천박물관
•기간 : ~2019년 3월 31일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 033)260-1500
•홈페이지 : www.chuncheon.museum.go.kr

 

이달의 볼 만한 전시  


찰나刹那와 영원永遠
바라캇 서울, 서울 | ~ 2019. 3. 31
150년 전통 바라캇 컬렉션이 선별한 불교미술품 전시. 중국, 인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네팔, 티베트 등 다양한 지역의 불교 조각과 불화를 만나볼 수 있다. 시대와 지역을 넘어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가치, 찰나의 깨달음에 담긴 영원에 대해 고찰해보는 시간을 선사한다. 문의: 02-730-1949

지금 우리가 사는 방법
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 서울 | ~ 2019. 2. 17
너무 가까우면 잘 보이지 않는 법.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는 걸까? 전시는 현재 인류 문명에 대한 32개국 135명 작가들의 사진작품 300여 점을 8가지 키워드로 보여준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모습을 여러 시점으로 탐험해보자. 문의: 02-2188-6000

신미경 : 오래된 미래
우양미술관, 경주 | ~ 2019. 5. 19
비누로 만든 불상이 있다. 만지면 녹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2018년 9월호에 소개되기도 했던 비누 조각가 신미경의 전시에서 어느 것 하나 무상無常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가르침을 직접 체험해 볼 기회다. 문의: 054-745-7075

이명호 :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갤러리현대(신관), 서울 | ~ 2019. 1. 6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세워 현실을 드러내거나, 사막 속에 캔버스를 설치해 비현실을 만들어내는 사진작가 이명호가 이번에는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은 캔버스를 사진에 담았다. 아무것도 없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그의 공한 사진들을 만나보자. 문의: 02-2287-3500
 

마인드디자인
한국불교를 한국전통문화로 널리 알릴 수 있도록 고민하는 청년사회적기업으로, 현재 불교계 3대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서울국제불교박람회·붓다아트페스티벌을 6년째 기획·운영하고 있다. 사찰브랜딩, 전시·이벤트, 디자인·상품개발(마인드리추얼), 전통미술공예품유통플랫폼(일상여백) 등 불교문화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며 ‘전통문화 일상화’라는 소셜미션을 이뤄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