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들] 반영규 선생

글과 음악, 문화로 대중에게 불법 전한 반 세기

2019-01-03     김우진
사진 : 최배문

2018년 불교음악상 시상식이 열렸다. 사단법인 불교음악협회장 역임한 반영규 선생은 불교음악인상을 수상했다. 출판계에서 한평생을 보냈지만, 정작 상은 불교음악인상을 받았다. 어쩌다 보니 전공이 아닌 불교음악으로 더욱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책을 만들고, 가사를 쓰며 사람들에게 불교를 알리는데 누구보다 헌신했다. 반영규 선생을 만나 불교음악과 출판 일을 하면서 전법에 앞장서온 옛 이야기를 들었다. 

|    대중이 원하던 부처님 말씀

반영규 선생은 찬불가 100여 곡의 노랫말을 쓴 작사가다. 최초로 청년 불교 합창단을 결성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청소년들을 위한 ‘붓다의 메아리’ 공연을 기획한 공연기획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 선생이 불교음악에 관심을 쏟기 전부터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던 방법은 문서포교였다. 그가 문서포교지 「자비의 소리」를 사비를 털어 발행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제 나이 마흔 즈음이었어요. 종로와 을지로에서 출판 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충무로에는 외국어 책을 파는 곳이 많았어요. 거기서 일본어로 된 『아함경』을 읽었죠. 정신이 번쩍하더라고요. 불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조계사 앞 불교서점과 종로 일대를 샅샅이 훑었어요. 아무리 둘러보아도 한글로 된 불교 기초 교리 서적이 없더라고요.”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불교의 가르침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다. 이해하기 쉽게 불교의 교리를 전하는 포교지 「자비의 소리」는 그런 작은 깨달음 때문에 태어났다. 그가  만든 「자비의 소리」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분량도 많지 않았다. 이 작은 4쪽짜리 포교 전단은 전국 사찰과 군부대, 교도소 등지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1만여 부를 인쇄해 배포했다. 점점 찾는 곳이 많아지자 5만 부까지 인쇄했다.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자비의 소리」를 기획하고 배포하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불교계에서 오래 일해 온 사람이 저에게 그러더라구요. 불교계 실정을 모른다고요. 그렇게 해봐야 관심 없어 할 것이라고 했어요. 고민과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게 옳은 일인데, 왜 진심을 몰라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계사 앞에서 혜일 스님이라는 분을 만났습니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무엇을 망설이고 있느냐며 서둘러 시작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큰 용기를 내게 됐습니다. 1973년 1월에 「자비의 소리」 첫 호가 나왔죠.” 

당시에는 일반 대중들을 위한 포교지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매우 반응이 좋았다. 군부대와 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비의 소리」를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 특히 교도소에 있던 재소자 중에 「자비의 소리」를 통해 불교를 알게 되어 불법에 귀의해 새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은 사람이 많았다. 「자비의 소리」를 통해 출가를 결심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자비의 소리」가 인기를 모으고 있을 즈음, 반영규 선생은 찬불가에 관심이 생겼다. 결국은 어떻게 가르침을 전해야 포교 효과가 좋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관심이었다. 

“인연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어요. 포교지를 만들면서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알릴까 생각하다 보니까 청소년과 일반인들 포교에 음악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음악에 대해 잘 몰랐어요. 그때 출판사에서 몇 번 마주쳤던 사람 중에 음대를 나왔다고 한 사람이 생각이 났어요. 그분이 서창업 씨입니다.”

찬불가 작곡가로 알려진 故 서창업 선생은 반 선생이 출판계 일을 하며 만났던 편집자 중 한 명이었다. 출판 일을 할 때는 특별한 친교가 없었다. 하지만 음악으로 불교를 알리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반 선생은 음악을 전공한 그를 바로 떠올렸다. 

“작곡료도 없이 작곡해달라는 게 염치가 없는 일이라 많이 망설였습니다. 고민 끝에 어렵게 말을 꺼내서 부탁했는데, 반응이 별로더라고요. 달포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포기하려는 찰나 서창업 씨가 곡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때부터 불교 노래를 악보로 만들어 「자비의 소리」와 함께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진 : 최배문

|  구순의 불자는 오늘도 부처님 말씀을 새긴다

반 선생의 불교 음악 인연은 서창업 선생과 함께 이어졌다. 서 선생이 곡을 쓰면 반 선생이 가사를 붙였다. 1974년 6월에는 함께 불교음악연구원을 만들어 찬불가집을 제작했다. LP 음반으로 불교가곡을 출반하기도 했다.

“불교음악이 만들어지자 합창단이 생겼습니다. 재가자들이 만든 삼보법회에서 서창업 씨가 지휘자로 활동하며 처음 합창단이 만들어졌어요. 그 후 주요 사찰들에서 합창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더니, 자고 일어나면 어디 절에서 사찰 합창단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가 됐죠.”

당시 동덕여고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김재영 법사와 함께 불교 학생회를 주축으로 합동음악법회 ‘붓다의 메아리’도 만들었다. 특수 탑차를 제작해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배우 이순재, 권투선수 홍수환 씨 등을 초청해 공연을 꾸몄다. 청춘들의 멘토들이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광덕 스님과의 인연도 이 무렵 생겼다. 스님은 불교 교양지 「불광」을 창간하면서 문서포교를 하고 있던 반 선생의 활동에 많은 격려를 해주었다. 

“대각사 법회 때부터 광덕 스님을 알게 됐죠. 「불광」지를 창간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 봤습니다. 광덕 스님께서도 찬불가에 애정이 깊으셨고, 그밖에 여러 방면에서 대중포교에 대해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자비의 소리」는 1983년까지 발행을 이어갔다. 「자비의 소리」가 발행돼 배포되면서 10여 년간 다른 불교 잡지나 신문 등이 창간되기 시작했다. 반영규 선생은 「자비의 소리」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판단했다. 

재단법인 대원회가 운영하던 대원정사 출판부의 주간을 역임하던 시기에는 한 달에 10여 권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특히 『빛깔 있는 책』 시리즈 등을 기획하며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기마다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들이 달라요. 책일 수도, 노래일 수도, 공연이나 전시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요즘에는 사람들이 휴대폰을 많이 보니까 그런 방법들도 있겠죠. 불교는 아직 할 게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깊은 고민과 간절한 바람입니다. 불교의 활성화를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면, 사람들에게 불교가 주목받을 수 있겠죠.”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는 “부처님 가르침에 모든 답이 있다”고 말했다. 올해 구순을 맞이하는 반영규 선생은 불교 발전에 대한 답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도 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