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왜 지금 소확행인가?

불교와 소확행

2019-01-03     유권준

몇 해 전부터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도 떠돈다. 이어 ‘소확행’이라는 말이 번진다. 세상은 아직도 치유가 필요하고, 행복하지 않으며 일과 삶이 균형 잡혀 있지 않다는 소리다. 아직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소확행이 트렌드가 된 이유는 무엇이고, 이를 통해 무엇을 찾고 싶은 것인지 살펴봤다.

|    광장의 시대, 밀실의 시대

우리 사회는 참혹한 근대화의 시기를 지나왔다. 봉건의 시대를 건너기도 전에 근대를 맞닥뜨렸고, 근대를 지나기도 전에 전쟁을 맞이했다. 전쟁의 폐허는 개인의 행복 같은 가치를 따져볼 기회 자체를 봉쇄했다. 오로지 생존과 경쟁에 매달려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 그사이 어린 소년들과 소녀들은 공장으로 내몰렸다.

전쟁을 겪은 아버지들은 먹고살기 위해 행복은 희생과 헌신의 가치 속에서 매몰됐다.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광장은 있었으되, 개인을 위한 밀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희생 속에 경제가 자라고, 어느덧 중산층의 꿈이 영글어 갈 무렵, IMF라는 괴물이 우리를 덮쳐왔다. 영문도 모른 채 사람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하루아침에 가정이 무너지고, 아무도 힘없는 개인을 지켜주지 않았다. 외환위기를 극복한다고 사람들은 다시 신자유주의로 내몰렸다. 경쟁과 효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편 가름 속에서 내일의 희망은 그저 빛깔 좋은 개살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이제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의 희망보다, 작지만 확실하고,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공동체는 해체되어 가고, 그 속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쓸쓸한 자기 위안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그럼 발우나 씻게나”

소확행을 찾는 저변에는 미래에 대한 절망이 내포되어 있다. 아무리 오르려 해도 오를 수 없는 절망의 좌절감이 녹아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소득과 지위, 성공으로 상징되는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부딪힌 것은 물신의 숫자 속에 담긴 가치에 대한 절망만은 아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르기보다 자신만의 가치를 따르겠다는 각성도 숨어있다. 자신만의 취향과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개인’의 작은 깨달음이 그것이다. 이제 집단과 공동체를 지나 개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인의 각성이 물신에 대한 숭배를 지나, 영적인 각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경제와 정치, 종교, 교육의 거대담론에서 몇 걸음을 내려와 소소한 일상으로 복귀한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이 된다는 확신은 아직 불확실하다. 소시민의 좌절에 그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0여 년 전 사토리 세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사토리란 말은 깨달음이라는 ‘사토루(さとる, 悟る)’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잃어버린 20년을 지나면서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추구했던 트렌드다. 그들은 작은 소비에 집중하고, 무리해 취업을 하기보다 취미에 몰두했다. 그들은 무모한 도전을 회피하고, 내 집 마련을 포기하고, 비싼 취미를 피했다. 고향 근처의 지방대학이나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것에 만족했다. 최소한의 경제생활을 유지하고, 소비를 최대한 줄여 살아갔다. 술과 담배도 적게 소비하고, 출산도 포기했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는 우리의 N포 세대와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청년실업 문제에 좌절한 청년들이 반 체념상태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소확행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소확행의 삶에는 포기와 절망보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온전한 자기실현을 해보겠다는 의지가 들어있다. 기성의 삶에 대한 반발과 저항도 들어있다. 또 자본주의의 대두 이후 세계를 휘감아온 프로테스탄트 윤리관에 대한 부정도 깔려있다. 금욕하고 절제하며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투자하고, 그를 통해 재화를 축적하며 살라는 기독교적 성장주의에 대한 저항이 있다. 

불가에서는 흔히 평상심이 도라고 말한다. 조주록에는 조주세발趙州洗鉢이라는 화두가 있다. 가르침을 묻는 스님에게 조주 선사는 “아침은 먹었는가” 하고 묻는다. 스님이 먹었다고 하자, “그럼 발우나 씻게나” 했다는 것이다. 일상에 진리가 있고, 일상 속에 깨달음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소확행이 불교와 만나는 지점이다. 

법정 스님은 수필집 『무소유』에서 ‘어린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인은 바쁘게 살고 있다. 시간에 쫓기고 일에 밀리고 돈에 추격당하면서도 정신없이 산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피로회복제를 마셔가며 그저 바쁘게만 뛰어다니려고 한다. 전혀 길들일 줄을 모른다. 그래서 한 정원에 몇천 그루의 꽃을 가꾸면서도 자기네들이 찾는 걸 거기서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거다. 그것은 단 한 송이의 꽃이나 한 모금의 물에서도 얻어질 수 있는 것인데.”

|    소확행의 기로

소확행의 큰 맥락을 정리해보자면 한국사회에서의 ‘개인의 재발견’과 ‘일상 속의 작은 혁명’을 들 수 있겠다. 일본 사토리 세대의 여러 행적과 비교해보면 그런 경향은 뚜렷해진다. 시민들은 소확행을 추구하면서 촛불혁명에도 참여한다. 촛불혁명은 거대해 보이는 시민혁명이었지만, 내용은 개인이 추구한 소확행의 확장이었다. 우리 사회의 소확행은 어쩌면 덴마크식 휘게Hygge 라이프와 닮아 있다. 가족이나 친구와 지내는 혹은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이나 일상의 행복 말이다. 부의 축적이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로는 채워지지 않는 여유와 일상의 행복이 소확행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청년세대가 절망에 빠져 『88만 원 세대』나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책을 읽다가 이제, 내면에 집중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가족과 회사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에서 취향의 공동체와 같은 다양한 공동체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탐욕을 줄이고, 무한 질주하는 자본의 논리에서 이탈하려는 경향이 보이는 이유다. 사회적으로 보면 북유럽식 모델로 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종교적으로 보면, 기독교적 성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내면의 검색을 통한 불교적 세계관으로 접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명상이 붐을 일으키는 것과도 무관치 않다. 템플스테이에 사람이 모여드는 이유도 관련이 있다. 

지금 소확행은 뚜렷하게 정리된 이데올로기나 흐름이라고 보기에 애매한 부분도 많다. 과장되고 상업적으로 포장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자유주의를 지나, N포세대의 한숨 한복판에서 등장한 개념인 것만은 분명하다.

소확행은 불교적으로 볼 때 가장 자연스럽게 실천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이고, 끽다거喫茶去하며, 조주세발趙州洗鉢하는 종교가 불교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대중들은 진일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중들의 진일보를 불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불교의 몫이다.

소확행을 받아들이는 불교 역시 소확행의 관점을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일생일대의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소외와 우울, 스트레스에 대한 분명한 해답도 필요하다. 아시아에서 출발해 서구를 거쳐 다시 수입되고 있는 명상은 소확행의 정점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이 소확행에 어떤 해답을 줄 것인지 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