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통신] 아힘사

2019-01-03     유권준

●    기해년 새해를 맞는다. 과학의 눈으로 본다면, 지구가 공전의 주기를 돌아 다시 그 위치로 돌아오는 날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 없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해 헌해가 따로 있을 리 없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해를 가르고, 날을 분별해 새해를 맞고, 새날을 맞는다. 그러므로 새해란 내 마음속의 구분일 뿐이다. 마음으로 가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리석은 분별을 한다. 새해를 맞아 붓다의 가르침을 다시 살핀다는 구실로 말이다. 팔만사천 가르침에 다시 새겨야 할 가르침이 어디 한두 가지 로 요약할 수 있겠는가만, 올해는 아힘사를 떠올리기로 했다. 

●    아힘사ahim.sā라는 말은 불해不害라는 의미다. 생명을 가진 다른 이를 해치지 않겠다는 의미다. 아힘사는 간디의 비폭력주의로 유명해졌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기도 하다. 붓다의 실천적 가르침은 아힘사로 시작된다. 오계의 으뜸은 바로 불살생계 아니던가. 아힘사는 나 아닌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해치지 않고 자비로 대하겠노라는 적극적인 평화의 선언이다. 아힘사에서 불살생계가 나오고, 자비가 나온다.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가엷게 여기는 그 정신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아힘사에서 시작하고, 자비로 맺는 종교다. 밀린다왕문경에는 “그러므로 적에게도 자비를 베풀어라. 자비로 가득 채우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빔비사라 왕이 이웃나라 밧지족을 공격하기전에 붓다께 의견을 물었을 때도 그랬다. 붓다께서는 “정치란 죽이지 않고, 해하지 않으며, 이기지 않고, 적에게 이기도록 하지도 않으며, 슬프게 하지 않고 법답게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    여러 경전에 나오는 그 유명한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An.gulimāla의 원래 이름은 아힘사까(Ahimsaka, 不害者)였다. 도둑의 별자리를 타고 태어난 그에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하지만, 그는 꼬임에 빠져 살인자가 되고 말았다. 붓다가 그를 제도하고 출가시켰으나 사람들의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출가한 이후 그는 숲에서 살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살았다. 하지만 탁발을 나갈 때마다 원한을 가진 이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돌팔매질에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붓다는 “수행자여 그대는 인내하라, 그대가 지은 업의 과보로 수백, 수천 년을 지옥에서 받을 업보를 여기서 받는 것이다”라며 그를 다독였다. 그는 결국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최후를 맞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    새해를 맞아 아힘사를 떠올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근본을 살펴야 가야할 방향이 바로 서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온갖 갈등으로 폭발직전이다. 남북 간의 문제가 그렇고, 종교 간의 문제가 그렇고, 지역 간의 문제가 그렇다. 교단내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음을 우리는 배워 알고 있다. 가깝게는 미얀마의 로힝야 사태가 그렇고, 스리랑카나, 태국일부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렇다. 사상으로써 불교와 현실 불교 간의 간극이 그러했다. 갈등과 핍박, 보복에 대응하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아힘사다. 어떤 존재에게도 폭력으로 해하지 않겠다는 정신이다. 아힘사에서 물러나면 붓다의 가르침도 의미를 잃는다. 새해를 맞는 불교도들의 마음속에 아힘사가 깃들기를 바란다. 진리를 구하는 불교도들의 마음은 항상 아힘사의 편에 서있어야 한다. 그 건너편에는 폭력과 증오와 보복과 미움이 있을 뿐이다. 새해 시작은 아힘사로, 그리고 마지막은 자비로 회향하는 기해년이 되길 간절히 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