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행기

나의 인연이야기

2007-09-15     관리자


구름이 흘러흘러 만상 위에 뜨듯이 물이 흘러흘러 만상을 비치듯이 그런 길의 나그네가 되어 끝없이 흘러가고 싶은 계절에 외로움도 가을처럼 깊어가고 있다. 그 외로움은 계절병이 아니 잃어버린 본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한 아픔일 게다. 몇 일 전 어느 일간지 만평에 한 사내가 풀밭에 앉아 신문을 읽다가 그 신문을 휙 집어던지고 '아, 가을하늘을 닮고 싶어라' 하고 팔을 베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결국 구름인 것을? 바람인 것을.
거리나 사이가 산간이라는 사투리로 통하는 경북 의성의 산골마을. 뼈대도 근육도 없는 그런 가문에서 일제시대 때에는 만주 베장사로 그리고 해방 후에는 소장사로 땅마지기께나 사들여 허리 조금 젖히고 살 무렵 나는 넷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호사다마랄까. 아버지께서 "이 정도의 재산이면 아이들과 고생 없이 살 걸게."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청춘과부 어머니께선 "재산 남겨주지 말고 건강 생각하제."하며 한의 눈물을 찍어내시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란 내가 전생에 불교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불교 집안이라 해도 큰 신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겨우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거나 초파일 때 어머니께서 쌀이나 보리 한두 되 머리에 이고 몇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 절에 다녀오신 것이 고작이었는데 신내림을 받기 위한 무당이 무병을 앓듯이 엄청난 가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이겨냈다는 사실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재산을 정리하여 대구로 이사를 오면서 큰형님께서 전 재산을 날려버려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일 년간 아르바이트를 하여 다시 입학원서를 낼 때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절의 주지스님의 아들인 중학교 선배 L형을 만나 불교 종립학교인 N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고, N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법사님으로부터 불법을 어렴풋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초파일이면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부처님 상이나 흰코끼리상을 어깨에 매고 제등행렬의 맨 앞을 걸어 갈 수 있는 것만으로 그저 즐거웠고, 제등행렬이 끝나면 스님들께서 쥐어주시는 몇 푼의 돈으로 학생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소주 몇 잔 홀짝거리며 땀 젖은 몸으로 부처님 주변을 맴도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상 또 한해를 보채다가 동국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부처님의 공덕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떠벌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했으면서, 마음 공부 하나 제대로 못해 군법사가 아닌 ROTC로 군 생활을 마치고 약사여래의 뜻을 받들지도 못한 채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모제약회사에 취업되어 일 년 동안 구둣창 타는 냄새가 나도록 약장사를 하다가 J여상고에 선생이 된 지도 십오 년이 되었으면서도 아,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부처님의 공덕으로 대학 졸업까지 한 내가 단 한 번만이라도 원을 세워 불법을 전하려 했던가. 아니다. 아니다.
지역적 편견을 의식해 그저 말없이 눈치만 살피다가 특별활동 연극부를 지도하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반야문학반'을 결성하여 첫시집 「골무」를 발간한 것이 89년이었다.
당시 전교조 파동으로 교육현장이 탈퇴냐 아니냐로 진통을 겪고 있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본교 최석태 이사장님께서 발간비의 절반을 보시해 주셨음을 이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린다. 그 후 「우리들은 성에꽃을 지웠다」「無等佛」「꿈꾸며 작아지는 새는 꽃이 될꺼나 별이 될꺼나」「돌거울·잡초는 언제나 무성한기여」등의 시집을 발간하여 불법에 문학을 접목시켜 보았으나 참불자로 숙성시키지는 못했음이랴. 그저 허한 가슴 뿐이다. 그래서 작년 8월 광륵사 능인 법사님과 보림출판사 오재만 사장을 만나 십대들에게 띄우는 붓다의 편지, 월간 「아힘사」를 발간하여 중고등학생들의 가슴으로 전했는데 벌써 12호를 발간하였으나 부족하다. 모든 것이 부족하다. 부수가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발간비마저 한계에 부딪쳐 허덕이고 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도 무등(無等)의 산사(山寺)를 찾아갈 게다. 어제를 참회하고 내일의 원을 세울 게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땅의 십대들에게 더 많이 전해져 무등등(無等等)한 부처님의 세상이 오기를…. 그래서 가을은 나를 외롭게 한다. 눈물나게 한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