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송광사 성보박물관 김태형 학예사

“부석사는 지금보다 5배는 더 큰 절“ 발굴조사 필요 주장

2018-12-24     유권준
사진=최배문

부석사와 그의 인연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교 2학년 베나레스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던 그는 부석사에서 열린 수련대회에 참가한다. 그리고 30년이 흐른 뒤 부석사 성보박물관의 학예사로 만 4년여를 살게 된다. 부석사에서 사는 동안 그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답은 언제나 현장에 있다”는 말을 곱씹었다. 부석사의 오늘을 표현해주는 가장 적확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김태형 학예사는 부석사에서 살았던 시절 답사하고 조사했던 결과를 모아 최근 책을 펴냈다. ‘부 석사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그 첫걸음’ 이라는 조금은 긴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의 이름은 『다시 읽는 부석사』다. 책의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 부석사의 이야기와 많이 다르다. 깜짝 놀랄만한 주장도 있다. 편견을 버리고 처음부터 부석사를 다시 보아달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지금까지의 잘못 알려진 부석사 이야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부석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사찰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석사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한 탓입니다.”

김태형 학예사는 시종 단호한 어조였다. 말끝 에는 자신감이 배어 나왔다.확신에 가까운 호흡 속에 아쉬움과 답답함도 간간히 섞여 나왔다.

“부석사 성보박물관 학예사로 부임하면서 만 4년 3개월을 부석사에서 살았습니다. 덕분에 부석사의 낮과 밤, 계절을 모두 몸으로 익히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석사와 관련된 문헌,탁본,기록,유물을 빼놓지 않고 읽고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의문을 따라 부석사 주변의 산과 들을 답사했습니다. 이 책은 거기서 얻은 결론입니다.”

김태형 학예사는 "현재의 부석사는 화재와 왜구의 침략으로 파괴되기 전의 5분의 1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현재 부석사 동쪽절터東方寺址에서 쏟아져 나오는 와편과 이미 그곳에서 발견되어 보물로 지정된 석불들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으로부터 직선거리로 동쪽 400미터 거리에는 동방사지로 알려진 절터가 있다.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78번지 일대다. 이 절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58년 이곳에서 발견된 석불 2구를 부석사 자인당으로 이운하는 과정을 기록했던 1961년 발행된 「고고미술」 ‘영주 부석사 동방사지의 조사 보고서’였다. 보고서에는 부석사 동쪽에 위치한 절터라는 의미로 ‘동방사지’ 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어느 순간부터 ‘동방사’라는 절의 유적이 되어버렸다. 김태형 학예사는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동방사지라는 말이 고유명사가 되면서 부석 사는 현재의 위치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부석사 동쪽 절터 역시 부석사의 일부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거죠”

그는 부석사 창건 관련기록과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부석사 창건은 서기 676 년. 『송고승전』에는 의상 대사가 영주의 권종이부 權宗異部 500여 명이 살던 가람伽藍에 들어가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의 상전교’ 편에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을 폈더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부석사가 창건될 당시의 영주는 북쪽으로는 죽령을 지나 충주에서 고구려와 백제와 겨루던 요충지였다. 안동을 거쳐 큰 고개를 넘어 중원으로 나아가는 곳이었다. 부석사 인근에는 그런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흔적이 많다. 경북 봉화 북지리의 국보 201호 마애여래좌상이나 보물 997호 석조 반가상, 영주 신암리 보물 680호 마애여래삼존상, 보물 221호 영주 가흥리 마애불상군이 7세기 전후에 조성된 석불이다.

지정학적 요충지에 왕족 출신인 의상 대사가 500여 명의 권종이부들이 모여 살던 가람에 입성 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화엄의 가르침을 펼 치자 사방에서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의상 대사의 부석사 창건 이후 부석사에서는 많은 스님들이 출가합니다.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 10여 명의 대 덕을 비롯해 구산선문을 개창한 여러 스님들도 부석사에서 출가합니다. 동리산문의 혜철 스님이나, 성주산문의 무염 스님, 희양산문 도헌 스님 등이 대표적이죠. 즉 부석사의 사격이 현재와 같은 정 도로는 유지할 수 없는 사찰이었다는 것입니다.”

김태형 학예사는 부석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부석사와 인근의 과수원과 산과 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의 꼼꼼한 조사 덕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부석사의 모습이 하나 둘 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량수전의 성격을 밝혀줄 ‘강당’이라는 와편의 발견이 그중 하나다. 그는 무량수전 뒤의 경사지에서 강당講堂이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을 여러 개 발 견했다.

무량수전은 그동안 부석사의 금당으로 알려져 왔다. 서방정토의 극락교주인 아미타불을 봉안한 것으로 학자들은 판단했으나 아미타불이 왜 법당의 왼쪽(서쪽)에 치우쳐 모셔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했다. 김태형 학예사는 “그것은 무량수전이 금당이 아니고, 강당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며 “부석사의 사찰 규모가 동쪽의 절터에서 현재의 무량수전에 이르는 영역으로 확대될 경우 금당터는 동쪽 절터에서 확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량수전이 강당이었을 것 이라는 추정의 근거는 건물 앞에 설치된 계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당의 경우 일반적으로 정면의 1개의 계단을 설치하지만, 강당의 경우 3개 혹은 4개의 계단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부석사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된 불국사 대웅전(금당)과 무설전(강당)이 그 예라고 지적했다. 즉 창건에서 고려에 이르는 부석사의 전성기 사역寺域은 금당이 있던 동쪽 절터에서 승방과 선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과수원 자리, 그리고 강 당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무량수전 구역으로 나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이야기가 왜 한 번도 공식화 된 적이 없었던 것일까? 김태형 학예사는 잘못된 고증이 사실로 굳어져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원융 국사가 부석사를 중창했다는 설명도 면밀한 고증 없이 기정사실화된 웃지 못할 해프닝이라고 꼬 집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고려 현종 7년(1016년) 에 원융국사가 부석사를 중창했다는 기록이 이곳 저곳에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를 보면 원융국사 결응은 1041년 부석사에 들어와 1053년에 입적한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016년에는 수좌 신분이었어요. 부석사 중창을 할 만한 신분이 아니었죠. 1916년 무량수전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봉황산부석사개연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와 조사당 묵서 등을 종합해보면 부석사의 정확한 중창 시기는 1376년이고 중창을 주도했던 이도 원융국사가 아니라, 진각국사 원응 천희를 잘못 적은 것입니다. 부실한 고증이 부실한 역사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진=최배문

 

| 부석사에서 보낸 4 년

김태형 학예사의 불교와의 인연은 생각보다 깊고 길게 이어져 왔다. 그의 외삼촌은 2000년 입적한 조계종 원로 탄성 스님이다. 탄성 스님은 종단이 흔들릴때마다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며 종단을 구해낸 버팀목과 같은 수행자로 널리 알려진 분. 탄성 스님은 10.27법난이나 94년 종단개혁의 과정에서 종단의 좌장의 역할을 한뒤 사찰로 돌아가 수행에 전념했던 수행자의 표상같은 분이었다. 김태형 학예사는 초등학교 시절 탄성 스님이 머물던 법주사에서 2달여간 공부했던 인연을 털어놨다.

“어머니께서 자주 탄성 스님에 대해 말씀하셨었죠. 어린 마음에도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법주사에서도 머물렀었구요. 불교와의 인연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고등학교때는 베나레스 불교학생회에 가입해 활동을 했습니다. 학교 근처에 있던 육군 중앙법당에 서 법회를 하고는 했는데, 군법사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웃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에 진학해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 교내에서 큰 발굴이 실 시됐다. 학교 내에 있는 석장사지 발굴이었다. 전공과목을 모두 이수하고 고고미술사학과 수업에 심취하고 있을 때였다. 학부생으로 발굴에 참여해 작업을 도왔다. 졸업을 하고 해동불교신문과 법보신문사에서 기자생활도 했다. 문화재청을 출입하며 경력을 쌓았다.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를 전공했다. 천태종 관문사 성보박물관과 부석사 성보박물관을 거쳐 지금은 송광사 성보박물관의 학예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부석사에서 보낸 4년은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그는 두 번의 도보 여행을 떠났다. 한번은 부석사에서 경주 황복사까지, 그리고 또 한번은 부석사에서 양양 낙산사까지의 여행이었다. 경주로의 여행은 문헌을 보다가 진정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보고 싶은 마음에 결행한 것이었다. 낙산사에 갈 때는 의상 스님의 관음진신 친견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걸었던 여행이 었다. 길을 걸으면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답은 언제나 현장에 있다.”

낙산사 원통보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법 당에 입정하고 앉으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 있을 때였다. 힘든 마음이 사라졌다. 마음속에 쌓여있던 슬픔과 고통에 저항하려는 마음이 사라졌다. 상황이 그대로 받아들여 졌다. 두 차례의 도보여행을 마치고 그는 부석사 에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2015년 어느날이었다. 무량수전 내부를 둘 러보던 중에 우연히 불단 뒤에 놓여 있던 큰 나무를 들춰보게 됐다. 큰 보자기같은 천을 들추니 한 지가 곱게 쌓여 있었다. 한지를 풀어 열어보았다. 1916년에 무량수전 해체 복원시 발견됐다가 사라 졌던 봉황산부석사개연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 였다.

“깜짝 놀랐죠. 기록으로는 보았지만, 실물로 남아 있는 걸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삼국유사』나 『송고승전』 등에 기록에는 의상 스님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부석사 내 에 있는 기록으로는 찾을 수 없었거든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신념이 빛을 발한 경우는 또 있다.

“2015년에 불교중앙박물관에서 ‘꿈꾸는 극락’이라는 기획전시 때문에 유물 반출을 하던 중 이었어요. 안양루에 걸려있던 ‘부석사안양루중창기浮石寺安養樓重刱記’라는 현판을 떼어내다 현판뒤에 빼곡이 적힌 묵서를 발견했었죠. 앞쪽의 기록은 확인이 되어 기록되어 있었지만, 뒷면에 그런 기록 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던 거였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유네스코 조사단 이 부석사를 방문했을 때는 조사당 앞에서 6cm 크기의 금동불을 수습한 적도 있다. 무량수전 뒤 편 자인암 인근에서는 불에 탄 흔적이 있는 석불 과 신장상도 발견했다.

사진=최배문

 

| 부석사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

김태형 학예사는 부석사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과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서가 아니라고 했다. 세계문화 유산이어서도 아니고, 가장 아름다운 절로 평가받 고 있어서도 아니라고 했다.

그보다는 부석사가 가진 상징을 읽어내야 한 다고 했다. 부석사는 왕명을 받아 의상 대사가 창건했고, 의상 대사가 화엄사상을 설파하며 어지러운 세상에 대승불교의 큰 획을 그은 절이라는 것 이다. 부석사에서 출가한 스님들이 한국불교의 큰 뿌리가 되는 구산선문을 개창하는 데 중요한 역할 을 하고, 그 안에서 한국불교의 줄기가 뻗어 나갔다는 설명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부석사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절이라는 것이다. 그가 4 년 동안 봉황산 언저리며 부석면 일대를 발로 뛰며 조사한 바로는 지금의 부석사는 과거 부석사의 5분의 1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돌무더기와 잡초, 흙먼지와 눈을 맞추어 가며 바라본 부석사는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학예사 김태형을 인터뷰하며 두 가지를 생각 했다. ‘직업’이란 자신의 일을 카르마로 받아들이는 숭고함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작지만 숭고한 열정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생각이었다. 세상의 많은 장삼이사들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기나 할 것인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오늘도 구석진 곳에서 대포를 기울이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받아들이고 그 업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일을 통해 삶을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어느 길을 가느냐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글. 유권준
사진.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