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나를 흔들다] 부처님이 내게 주신 위로와 가피

2018-11-23     김둘남
그림 : 박혜상

부처님과 인연을 생각해보니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나이 23살, 그리움과 보고픔으로 힘들어했던 시기였다. 어느 날 문득 오후 늦은 시간 퇴근을 하고서 절을 찾아갔다. 커다란 법당 한 귀퉁이에 그냥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처음 찾아간 커다란 법당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힘들었던 그동안의 일을 생각하며 나는 그 법당에서 소리 없이 참 많이 울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유년 시절. 내 어린 시절엔 부모님보다 더 나를 챙기며 사랑을 주었던 큰언니가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육 남매를 키우시느라 살기 바빴던 부모님은 우리를, 아니 나를 사랑해 주거나 관심 가져주지 않았다. 사랑과 관심과 믿음이 필요한 어린아이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그 사랑과 관심과 믿음을 주는 부모의 자리를 큰언니가 메워주었다. 큰언니는 나에게 부모 같은 크나큰 존재였다.

사춘기 시절을 보내며 몹시 방황하고 힘들었어도 나에 대한 큰언니의 믿음을 알고 있었기에 공부하며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 큰 언니의 믿음을 알고 있었기에 사랑받기 위해 언니에게 웃음 주는 일만 했었다.

그런 큰언니가 결혼을 했다. 그러면서 큰형부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다. 형부 가족들이 모두 이민을 가게 돼 언니도 큰형부와 함께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 누구보다 믿고 의지했던 소중한 언니…. 언니가 그 먼 곳으로 가버리니 그 빈자리를 견디기엔 너무 힘들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전화를 자주 할 수도 없었고, 편지를 써도 답장받기까지 3주 이상이 걸리던 시기였다. 스물셋 여린 나는 부모 같은 언니가 멀리 떠나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는 생각에 힘들어하고 방황했었다. 그때였다. 그렇게 힘들어하며 마음을 잡지 못할 때 직장에 같이 근무하던 언니가 자기가 다니는 절을 소개해준 것이었다. 그렇게 처음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었다.

마음이 힘들고 언니가 보고 싶을 때는 부처님을 찾아갔다. 부처님은 항상 그 자리에 계셨다. 일 년을 넘게 절에 다니니 점차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며 절에서 청년회 활동을 시작했다. 언니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이겨낸 절에서 또 다른 인연들을 만났다.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며 힘든 시기를 잘 견뎌냈다. 그즈음에는 큰언니와 형부도 잘 적응해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큰언니와 형부도 먼 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이것이 다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나는 차츰 직장생활도, 일상생활도 열심히 하며 지냈다. 회사에서도 활기차게 지내다 보니 사내 연애로 1993년에 결혼도 하게 됐다. 결혼을 하고 애기를 낳고 생활하다 보니 절에 자연스럽게 가지 못하게 됐다. 그러다 시댁도 서울이고 남편도 마침 발령을 받아서 결혼 1년 만에 서울로 이사를 가 6년을 살았다.

아들과 딸을 낳았다. 아이 둘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하지만 그때는 착실하게 직장생활 하는 남편에 아이들까지 걱정 없이 바르게 자랐던, 무난하게 살았던 편하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편안함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IMF가 우리 가정에도 닥쳤다. 남편은 명예퇴직을 했다. 정말 생활이 막막했다. 오랜 고민에 장사를 시작하기로 하고 피자 전문점을 차렸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했으니 장사는 해본 적도 없었지만, 아이 둘을 키우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서울 생활을 접고 친정이 있는 창원으로 이사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결심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장사하느라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장사는 잘 되지 않아서 어려움도 겪었고, 육아와 장사 두 가지를 다 잘하려다 보니 몇 배의 힘이 들었다. 어찌나 바쁘던지 부처님을 찾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살았다.

시간이 흘러 다행히 장사는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아이는 고3이 되었다. 이제는 부처님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2013년 1월 1일 정초 기도를 하러 갔다. 통도사 창원 포교당 구룡사였다. 장사를 하면서 시간이 생길 때마다 집 근처의 절들을 찾았다. 기도를 하기보단 힘들고 지칠 때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 했다. 또 고3인 아들을 위해 부처님을 찾았다.

매일 빠지지 않고 절에 가 사시 기도를 했다. 시간이 없을 때는 새벽 기도나 저녁 예불을 나갔다.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다. 천수경을 외우고, 신묘장구대다라니 21독 기도도 하고, 『금강경』도 읽었다. 108배, 500배, 1,000배도 그때 처음 해보았다. 하나씩 기도를 해보니 정말 너무나 신심이 일었다. 오로지 아들의 입시를 위해서 그렇게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를 해보긴 처음이었다. 다행히도 큰아들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됐고, 나는 다시 한번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부처님께 가피를 받은 것은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장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피자 배달 전문점이다 보니 배달을 위해 직원들이 오토바이를 타야 했고,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다 보니 사고가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크고 작은 사고가 날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아들 또래의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1학년생들이었다.

안전교육을 단단히 시키고, 헬멧을 씌워주고, 빨리 다니지 말고 그렇게 안전 운전하라고 이야기했지만 한 달에 한두 건은 사고가 생겼다. 남편도 오토바이로 배달하다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사고가 생길 때마다 장사를 관두려고 가게를 내놓기도 했지만 가게는 나가질 않았다.

그즈음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이 작은 접촉사고로 넘어져 6개월간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게 된 일이 생겼다. 학생의 부모님을 뵙고 죄송하단 말을 얼마나 했던지 모른다. 그 말로 다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죄송스런 마음이 생각난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절에 다니고부터 가게에 사고가 안 나는 것 같아.” 

아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며 가게 일도 등한시하고 절에 다녔었다. 매일 절에 가서 뭐하느냐며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보니, 내가 절에 다니고부터 오토바이 사고가 안 나는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의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사를 하면서 직원들에게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죄책감에 힘들었다. 다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죄인이 되어야만 했던 나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부처님께서 그 커다란 짐 덩이를 벗겨주시는 것 같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기뻐서 벅차오르는 마음을 감출 수 없어 기도를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장사를 한 지도 어느덧 17년이 흘렀다. 구룡사에 다닌 지도 벌써 6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항상 모두가 안전하기를 발원하는 마음으로 산다. 사고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지만 1년에 한두 건 정도로 줄었고, 이제는 장사도 잘되어 마음 편히 가지며 절에 다닌다.

부처님은 내게 수많은 위로와 가피를 주셨다. 그래서 이제는 부처님께 기도와 함께 보시도 많이 하고 봉사도 하면서 부처님 가피에 항상 감사하며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처님께 기도하는 발원문은 이것이다. 

“부처님, 항상 가게 직원들이 사고 없이 건강하기를, 안전히 다니기를, 그리고 우리 가족이 건강하기를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김둘남. 법명 선지행. 창원 포교당 구룡사 신도로 불교대학 기본 전문과정을 마쳤다. 신행 차장과 신도회 부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