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강의실 357호] 선禪의 합리적 이해

실체로서의 불성과 하나 되는 체험은 불교적인 것인가?

2018-11-23     홍창성
사진=픽사베이

선禪은 합리적合理的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 분이 많다. 문자로는 서지 못한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禪에 합리성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이유다. 선禪이 처음부터 이해理解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을 통한 이룸 또는 체험의 과정이라고 보는 분에게는 ‘선禪의 합리적 이해’라는 이 글의 제목부터 앞뒤가 안 맞는다. 이런 선禪의 전통을 고려하면 강의실에서 한정된 시간 동안 합리적인 미국대학생들에게 강의와 토론을 통해 선禪의 정신을 이해시켜 전수하기는 분명 불가능하다. 이번에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내가 어떻게 시도해 왔는가를 소개한다. 

|    개구즉착開口卽錯

‘입만 벙긋하면 그르친다’는 개구즉착이라는 말은 우리가 입을 열어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진리를 왜곡한다는 말이다. 선가禪家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념즉괴動念卽乖라며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어그러진다’는 구절도 있다. 도불가설道不可說 즉 ‘도道는 말할 수 없다’와 같이 도교道敎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이런 문장들로 선가에서는 도道 또는 진리에 대한 언어 및 개념적 접근을 금기시한다. 선가에서 말하는 도道가 힌두교의 브라만과 닮아 조심스럽지만, 진리에 대한 개념적 접근이 무용無用하다는 주장은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한국식 선문답禪問答을 소개하며 미국학생들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전통을 소개한다.

학인學人 : “부처란 무엇입니까?”
선사禪師 : “개똥이다!”

마치 부처가 개똥이라는 듯한 선사의 엉뚱한 답변에 학생들은 그 큰 눈들을 더 크게 뜬다. 그러면서 부처가 왜 개똥인지 끙끙거린다. 개똥 화두話頭를 든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개똥은,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쇠똥(bullshit)으로 헛소리 또는 넌센스라는 뜻으로 쓰였다. 점잖게 답하려면 “무無!”라고 외쳐도 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넌센스라는 말인가?

화두를 물고 참선해서 깨치라는 소리는 미국대학 강의실에서는 유효 기간이 몇 분도 안 된다. 첨단과학 시대를 살며 실용주의가 상식인 대학생들에게 신비주의가 통할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선문禪門의 가르침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서 다음과 같이 강의한다.

|    연기緣起

부처는 삶에 대해서 무아無我를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연기緣起를 깨달아 성도成道했다. 연기란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부처의 통찰이다. 아무것도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어서 독립적 존재가 불가능하니 스스로의 본질 즉 자성自性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공空하다. 연기의 진리를 개개인에 적용하면 무아의 진리도 쉽게 보인다. 아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어서 개인의 본체 또는 본질 즉 아뜨만도 없기 때문이다.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모습이 존재 세계의 실제 모습이다. 남전불교에서는 연기를 단지 인과因果 관계만으로 보지만 선禪이 소속한 대승에서는 연기를 비인과적 관계로도 확대해 이해한다. 정보통신과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상식인데, 화엄華嚴에서는 예로부터 삼라만상이 중중무진重重無盡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왔다. 시베리아 순록 한 마리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으면 미국에 있는 나는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이 순록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예를 들어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관계를 잃게 된다. 다른 은하계 어느 행성 산기슭에서 돌 하나가 굴러도 내가 그것과 연결된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선禪은 이와 같이 세상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조건으로 연기한다는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선호한다.

그런데 이런 연기실상緣起實相 즉 연기하는 세상의 실제 모습을 언어로 직접 기술記述할 방법은 없다. 어떤 말이나 개념도 분별 또는 차별(差別 differentiation)을 야기하고 이 분별은 아무 걸림 없이 연기緣起하는 세상의 모습을 왜곡해 진리로부터 우리의 시야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사슴”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사슴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거나 말을 하는 순간 우리는 두 오류를 범한다. ⑴ 마치 사슴이라고 불리는 짐승들이 공통으로 고유한 본질 즉 자성自性을 갖고 있다고 보게 하며, 또 ⑵ 이 세상을 사슴과 사슴 아닌 것으로 양분하며 분별해 버려(differentiate) 우리로 하여금 이 두 집단이 중중무진 연기로 맺어져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 

어떤 말이나 개념도 걸림 없이 유연하게 연기하는 세계의 실제 모습을 차별하고 단절시켜서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부터 차단한다. 불교에서는 진정으로 개구즉착開口卽錯과 동념즉괴動念卽乖가 옳다. 이것이 말이나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도道나 브라만 또는 아뜨만에 대해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걸림 없이 연기하는 세계의 멋진 모습을 불완전한 도구인 말이나 개념으로 왜곡해 보아서는 안 된다는 합리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옳다. 연기실상(緣起實相.연기하는 존재세계의 실제 모습)에 대해 우리는 기껏해야 “그러그러(如如)하다”는 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제 위에서 소개한 선문답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자. 불가에서는 “부처”가 종종 진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처란 무엇입니까?”라는 학인의 질문은 연기하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의 참모습 즉 진리를 언어로 답하라는 요구가 된다. 그래서 선사가 “넌센스!”라고 한 것이다. 선禪의 기원이라는 염화미소拈華微笑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쉽게 이해된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석가모니는 말로 답하지 않고 단지 꽃을 들어 보였고, 가섭이 그 의미를 이해하고 미소 지었다는 설화이다. 이때 석가모니는 “차나 한잔 들게,”  “하늘빛이 좋네,” 또는 “뜰 앞의 잣나무”와 같이 답할 수도 있었다. 질문이 넌센스인 경우에는 엉뚱한 소리로 반응해 주는 것이 재치 있어 좋다.

미국학생들은 내 설명에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 관련 글을 읽은 동료교수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합리적 이해방식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위의 선문답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깨달음을 위해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내 생각이다. 

|    체험으로 이루는 깨침으로서의 선禪이 가진 문제

선禪의 합리적 이해에 대한 비판은 천여 년 이상 계속되어 왔으니 이제는 선禪에 대한 체험적 접근에 대해서도 비판적 작업을 시도해야 균형이 좀 잡히겠다. 선종사에서는 후기로 올수록 언어를 통한 알음알이로는 결코 깨칠 수 없다는 주장이 강해져 왔다. 참선으로 신비한 체험을 거쳐야만 깨치게 된다며 체험 내지 체득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었다. 깨침은 마치 단맛이나 짠맛의 경험과 같아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직접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러나 선禪에 대한 이런 체험적 접근법은 논리적으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나는 내 미국학생들에게 다음의 딜레마를 제시하며 한번 선禪의 입장에서 이 딜레마를 깨보라고 권유한다.

⑴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짠맛의 경험과 같은 것이 깨친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깨침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말이 되어 공空에 어긋난다.

⑵ 이 짠맛과 같은 체험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이 모든 다른 맛을 동일한 깨침의 기준으로 삼는 근거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즉 어떤 기준이나 근거 없이 이 다양한 체험을 모두 깨달음이라고 보아줄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답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한편 만약 그런 기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또 ⑴ 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성을 가진다는 셈이 되어 공에 어긋난다. 

그래서 이런 체험에 공통점이 있으면 공에 어긋나서 안 되고, 없으면 이것이 깨달음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겨 딜레마에 빠진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특정한 경험, 체험, 또는 체득을 통해 얻은 깨침을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아직 이 딜레마를 해결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또 다른 문제는 선문禪門에서는 종종 이렇게 깨침을 완성한다는 신비한 경험을 실체로서의 아뜨만이나 그와 유사한 불성佛性과 하나가 되는 체험으로 여겨왔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실체론적 경향이 강한 도교의 영향 아래 성장한 선禪에서 이런 신비한 실체와 합일合一되는 경험을 깨침이라고 보곤 했는데, 실체론을 거부하는 불교에서 이것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들이 참선이나 염불하다가 자못 묘한 기분이 들면 그것이 깨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당황스럽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 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