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명장면] 밧차곳따의 질문

삶의 무상함을 따져묻던 밧차곳따의 물음에 답한 붓다

2018-11-23     성재헌
상카시아 유적의 사원 ⓒ불광미디어

가을이다. 그 푸르던 빛깔도 사그라지고 갖가지 형체들도 모습을 감추고 있다. 저 풀과 잎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시간의 강물에 실려 가뭇없이 사라지는 풍경들, 봄과 여름의 풍경에 찬란한 기억이라도 한 조각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계절에 자못 서글픔이 스며들 것이다. 

가을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자명한 가르침이 그 어느 때보다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인연 따라 사라지기 마련이다. 놓아야 할 때가 됐을 때, 그것이 본래 빌려왔던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면 그 자리에 아쉬움이 끼어들 수 있을까? 도리어 맘껏 사용하도록 허용해 준 주인에게 감사하고, 이자도 낼 줄 몰랐던 자신의 파렴치함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그래서 빌려온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이 가을은 감사함과 부끄러움이 무던히도 늘어나는 계절이다. 

저 숲에서 풀과 잎들이 사라지듯이 삶의 장에도 가을은 찾아든다.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찬찬히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가슴 언저리에 서글픔이 스미는지, 아님 감사함과 부끄러움이 그득 차오르는지. 후자의 경우라면 걱정할 것 없겠지만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면 그 막막한 서글픔의 굴레에서 얼른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관찰해야 슬픔과 우울의 장막을 걷을 수 있을까? 『맛지마 니까야』 「밧차곳따에게 불에 비유하여 설한 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진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던 수행자 밧차곳따가 부처님을 찾아왔다. 밧차곳따는 부처님에게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고 그 견해見解를 물었지만 부처님은 이렇게 보지도 않고, 저렇게 보지도 않는다는 애매모호한 대답만 되풀이한다. 그 끝에 밧차곳따가 부처님께 물었다. 

“당신은 죽은 뒤에도 존재합니까? 당신은 죽은 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까? 당신은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밧차곳따, 그 네 가지 생각이 모두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런 견해는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 그런 견해는 탐욕과 분노의 대상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슬픔과 우울이 사라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고통을 소멸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당장 알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올바로 깨닫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열반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밧차곳따, 나는 사변적인 견해에 이러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았기에 일체 사변적 견해를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밧차곳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당신도 조금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이고,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밧차곳따, 사변적인 견해는 여래如來가 멀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세상 사람들이 ‘나’라고 부르는 것이 오온五蘊일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이것은 물질이다. 물질은 이렇게 모였다가 이렇게 흩어진다. 이것은 느낌이고, 지각이고, 형성이고, 의식이다. 느낌과 지각과 형성과 의식은 이렇게 모였다가 이렇게 흩어진다’라고 관찰합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환상, 모든 혼란, ‘나’라는 관념의 바탕이 되는 모든 것, 자만의 잠재의식을 부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버려 버리고, 놓아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했다고 나는 말합니다.”

밧차곳따의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여, 수행자가 그와 같이 마음이 해탈했다면 그는 사후에 어디에 태어납니까?” 

“밧차곳따,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까?”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합니까?”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밧차곳따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고따마여, 저는 예전에 당신과 대화하고는 당신이 매우 진실한 사람이고, 당신의 말씀이 진리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일수록 의혹만 늘어나고, 더욱 혼란스러워지는군요.”

부처님은 때 쓰는 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씀을 이어가졌다. 

“밧차곳따, 이런 말들은 그대를 의혹에 떨어지게 하고, 그대를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합니다. 밧차곳따, 나의 가르침은 깊고 심오하여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거꾸로 그대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밧차곳따, 그대가 알고 있는 대로 대답해 보십시오.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합시다. ‘그 불이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르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풀과 섶, 즉 땔감을 조건으로 타오릅니다.”

“밧차곳따, 그대 앞에 타오르던 불이 꺼질 때, 그 불은 어디로 갔습니까? 동쪽으로 갔습니까? 서쪽으로 갔습니까? 남쪽으로 갔습니까? 북쪽으로 갔습니까?”

“고따마여, 그런 말들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불은 땔감을 조건으로 타오릅니다.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이 없으므로 꺼져버릴 뿐입니다.”

“밧차곳따,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물질을 두고 여래라 여기지만 여래는 그 물질을 버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런 저런 느낌과 지각과 형성과 의식을 두고 여래라 여기지만 여래는 그 느낌과 지각과 형성과 의식을 버렸습니다. 여래는 물질과 느낌과 지각과 형성과 의식의 뿌리를 끊어 밑둥치가 잘려진 야자수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밧차곳따, 참으로 여래는 물질과 느낌과 지각과 형성과 의식에서 해탈하여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바닥을 알 수 없어 마치 큰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고,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고,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고,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고따마여, 당신은 마을 어귀에 우뚝 솟은 커다란 쌀라나무 같군요. 그것도 가지와 잎들이 모두 떨어진 쌀라나무, 겉껍질이 벗겨지고 속껍질마저 떨어지고, 그 연한 백목질이 모조리 삭아 내린 쌀라나무, 검고 단단하고 순수한 고갱이만 남은 그런 커다란 쌀라나무같군요.”

이렇게 떠돌이 수행자 밧차곳따의 찬탄으로 이 경은 끝을 맺는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어릴 적 부르던 이 노래를 어른이 되어 다시 부를 때가 있다. 하염없이 멀어지는 시선, 그 멍한 눈망울에 슬그머니 눈물이 맺히는 경우가 쉽다. 그럴 때, ‘어디로~’에 쏠렸던 마음을 거두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한번쯤 돌아보자. ‘강물’, 그것이 어디에 붙인 이름일까?                                        
          

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군종법사를 역임하였으며, 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근무하였다.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