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학개론 ]불교에 대한 자신의 이해는 과연 정당한가

2018-11-23     장휘옥, 김사업

“그대들을 위해 내(=석가모니)가 설한 법法과 내가 제정한 율律이 나의 사후에 그대들의 스승이 된다.” (『대반열반경』)
“지금 동방을 보면 증법證法이 쇠미하여 그 결과 많은 교법(敎法=경율론 삼장)이 소멸하고 말았다.” (『현종론』 대정장 29권, p.977 상단)

|    불교 문헌이 불교 이해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 
2,500여 년에 걸친 불교 역사에서 불교인들은 왜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다양한 불교 문헌들을 편찬해 왔을까?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의 가르침을 모아 회의를 거쳐 경과 율로 확정하여 그 내용을 전승해 갔다는, 그 한 번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왜 그 이후에도 경전을 포함한 수많은 불교 문헌들이 새로이 출현했을까? 이 질문은 불교 가르침의 전승과 전파의 역사, 그리고 다양한 불교 교리의 출현 이유를 알아야 답변이 가능하다. 

또한 이 질문은 석가모니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인 불교 교리를 편협됨이 없이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물어야 할 의문이다. 교리나 생애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기술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출현하고 전승되어 온 불교 문헌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고전적 불교 문헌이 어떤 동기로 출현했으며 어떤 형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지를 잘 안다면, 그래서 그것의 위상과 한계 내지는 성격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한다면, 이에 근거한 교리와 생애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도 변하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불교 문헌의 출현과 전승의 역사,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었을 때 벌어진 과오의 역사를 실례를 들어 거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해 세계 학계의 최근 성과를 반영해 가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대해 본인 스스로 항상 편견 없이 열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인 ‘무집착(無執着, 집착 없음)’을 실천하는 중요한 한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바를 불교에 투영해서 불교 문헌의 말을 자의적‧폐쇄적으로 해석한 다음, 이렇게 형성된 잣대를 가지고 여타의 불교 사상이나 의례를 타락한 것으로 비판하는 행위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현재와 미래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지금부터 행하는 고찰이 충분히 이루어졌을 때, 자신의 불교 이해가 고집이나 편견이 될 위험성에서 벗어나 정당한 위치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대기설법과 최초의 경‧율 편찬
석가모니는 45년간 광활한 갠지즈강 중류 지방 곳곳을 다니면서 가르침을 폈다. 이 행각의 여로에 모든 제자들이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방에서 교화하면서 따로 행각하는 제자들도 많았다. 석가모니는 미리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을 읽듯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표현의 가르침을 펴지는 않았다. 그때그때 만나는 사람의 능력에 맞추어 주제와 표현을 달리하면서 알아듣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설법 방법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한다. 여기서 기機는 가르침을 받는 상대를 가리키므로, 대기설법은 상대의 수준과 필요에 눈높이를 맞춘 설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중‧고등학생에게는 그들에 맞는 수준의 설법을, 욕망이 치성한 사람을 만나면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설법을 한 것이다.

듣는 사람의 이해 수준과 필요로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미리 준비된 동일 내용을 만나는 모든 이에게 반복적으로 설법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설법자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도 가능하다. 하지만 대기설법은 설법자가 환자 개개인에 맞는 각양각색의 명약을 처방하는 명의와 같이 뛰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석가모니는 대기설법을 하셨다.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만나는 사람 각자에 맞는 다양한 설법을 했기 때문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그 양에서 풍부했고 내용도 여러 차원이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고, 들은 사람의 기억에만 남았다. 더구나 모든 제자들이 석가모니와 늘 함께 행각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르침이 베풀어지던 그 장소에는 일부 제자들만 있었고, 따라서 그때 그곳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도 일부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서거를 앞둔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여러 유언을 남겼는데 그중에는 다음의 말씀도 있었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대들은 ‘가르침을 설하신 스승은 계시지 않구나. 이제 우리들의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이 여겨서는 안 된다. 그대들을 위해 내가 설한 법(法, 가르침=진리)과 내가 제정한 율(律, 계율 등 교단의 생활규범)이 나의 사후에 그대들의 스승이 된다. (『대반열반경』)”

석가모니가 서거한 직후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편찬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불교 성전을 편찬하기 위한 이런 회의를 ‘결집結集’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석가모니는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대기설법을 통해 내용적으로도 양적으로도 풍부한 가르침을 남겼다. 하지만 개개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는 일부에 국한되었고, 가르침의 내용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석가모니는 제자들에 대한 유언으로 자신의 사후에는 당신이 설한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이 흩어져 없어지지 않도록 가르침 전체를 정리해서 편찬할 필요성을 통감했다. 사실과 다르게 전해지거나 들은 가르침에 대해 이견이 일어나는 것도 방지해야 했다. 서로 간의 확인에 의해 정리된 가르침은 석가모니가 없는 교단을 통일성 있게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최초의 결집이 열렸다. 장소는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 교외였다. 가섭 존자가 소집하여 의장의 지위를 맡았던 이 결집에 500명의 해탈한 비구(=아라한)가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석가모니가 설한 법은 아난 존자가, 율은 우빨리 존자가 각각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참가한 비구들 앞에서 암송을 하고, 이 내용들을 비구들이 승인하여 다 함께 독송하는 절차를 통해 최초의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 편찬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때의 경장과 율장도 문자로 편찬된 것이 아니라 말로 정리되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형태였다는 점이다.

경장이라 할 때의 ‘장藏’이란 바구니를 뜻하는 산스끄리뜨 ‘삐따까pit.aka’를 한자로 번역한 말이다. 쉽게 말해 경장은 경전들을 담아 놓은 바구니이고, 율장은 율들을 담아 놓은 바구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경장은 교리와 수행에 관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경전을 모아 놓은 것을 지칭하며, 율장은 석가모니가 제정한 계율 등 교단의 생활규범을 모아 놓은 것을 가리킨다. 제1결집을 통해 최초로 편찬된 경전들이 지금 한문으로 전해지고 있는 『아함경』과, 빨리어로 전승되는 『니까야』에 속하는 경전들의 모태가 된다.

|    아함과 니까야는 변용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최초로 편찬된 경전들은 처음 수백 년간은 암송에 의해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지다가 그 후에는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되어 갔다. 인도 인더스 문명(기원전 2,500년경~기원전 1,800년경)의 시기에 문자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고, 현재까지 확인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자료는 기원전 3세기경에 조성된 아쇼까 왕의 비문이다. 불교 성전은 기원 전후의 시기에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석가모니의 활동 시기를 기원전 6~5세기로 본다면, 문자가 있었음에도 구전으로만 불교 성전을 전승한 기간은 최소 200년 이상에 달하며, 약 500년 이상을 구전으로만 전승해 왔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왜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구전으로만 전해 왔을까? 고대 인도에서는 배움에서 기억을 굉장히 중시했다. ‘베다 성전을 적은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식의 전달과 습득에 문자의 개입은 금물이며, 스승에게 직접 배워 기억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불교도 같은 노선을 따라 구전으로만 성전을 전승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출가 교단이 불교 성전을 조직적으로 구전했을 때, 그 내용은 과연 정확히 전승되었을까? 현재까지는 정확히 전승된 사례와 변용된 사례가 동시에 발견되기 때문에 일방적 결론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변용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원초 형태가 남아 있지 않는 초기의 개개 경전들에 대해 늘 변용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최초기 경전으로 평가받는 『숫따니빠따』 안에도 그 성립이 오래된 부분과, 첨가를 포함한 후대의 변용 부분이 혼재해 있다.

최초로 편찬된 경장과 율장을 구전으로, 그 뒤에는 문자로 기록하여 오늘날의 형태로 전한 것은 ‘부파’라고 불리는 불교 교단의 여러 분파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 남아 있는 『아함경』과 『니까야』, 그리고 율장은 녹음한 것을 받아 쓴 것과 같은, 원초의 형태 그대로라고는 할 수 없으며, 오랜 세월 부파의 전승을 통해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변용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부파部派’라는 용어가 생소할지도 모른다. 불교 교리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용어인 만큼 이에 대해 알아보자. 전통적인 설에 따르면 부파는 불교 출가 교단이 분열된 결과 생긴 것으로, 오늘날의 ‘종파’나 ‘종단’과 유사한 개념처럼 보인다. 부파가 종단과 유사한 개념이라 하면, 현재의 우리나라 종단처럼 본사와 말사의 제도를 갖춘 중앙집권적인 기구로 연상하기 쉬운데 그런 체제는 아닌 것 같다. 최근에는 부파는 종파나 종단이 아니라 가톨릭의 수도회에 가깝다는 견해도 나왔다. 이하는 주로 전통적인 설에 의거한 부파에 대한 설명이다.

석가모니 당시부터 서거 후 얼마 되지 않는 단기간에 걸쳐 불교 교단은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갔다. 석가모니 서거 후 약 100년의 세월이 흐르자, 계율에 관한 의견의 차이 등이 표면에 대두하여 불교 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라는 두 부파로 분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을 근본분열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좌부와 대중부 내에서도 다시 지말분열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리하여 기원 전후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불교 교단은 18개 내지 20개 부파로 분파되어 간다. 

이렇게 근본분열 이후부터 불교 교단이 여러 부파로 나누어지면서 전개되어 갔던 불교를 부파불교 혹은 소승불교, 아비달마불교라고도 부른다. 주의할 점은 인도의 경우 기원 전후의 시기에 대승불교가 흥기한 이후에도 강력한 부파는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부파는 최초의 결집에서 편찬된 경전들과 율장을 전승해 갔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범위 내에서 몇몇 부파는 독자적인 안목을 가지고 경전에서 주요 교리를 추출하고 이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만의 특유한 해석을 부가하여 장대한 사상적 건축물을 세웠다.

부파들이 불교 교리에 대한 자신들의 이러한 독자적인 연구와 해석을 모아 놓은 것을 ‘논論’이라 부른다. 예를 들면 『구사론』과 『청정도론』 같은 것이다. 그 후의 대승불교 시대에도 『중론』과 같은 대승적 논들이 출현한다. 부파들에 의해서 논이 이루어짐에 따라 마침내 경장‧율장‧논장이라는 삼장三藏이 처음으로 성립하게 된다. 삼장은 불교 성전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다수 부파들이 내용이 서로 다른 각자의 논을 만들고 이를 전승해 갔다는 것은 경전의 내용에 대한 견해나 해석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자신들의 견해에 맞추어, 전승되어 오던 경전 자체를 의도적으로 변용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견해에 맞지 않는 부분은 삭제하거나 내용을 고치고, 견해에 맞도록 원래는 없던 내용을 경전에 첨가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의도는 없었지만 잘못 암송하거나, 잘못 듣거나, 잘못 쓰는 오류의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5세기 때 설일체유부(가장 강력했던 부파)를 대표하던 논사 중현衆賢의 저술에는 부파 간에 서로 상대가 전승하는 경전을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하여 비불설非佛說 논쟁을 전개한 흔적이 있다. 경전의 말 그대로 석가모니가 설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종래의 낙관적인 경전관이 이윽고 통용되지 않게 된 시대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의 초두에 인용한 그의 논서 『현종론』의 기술처럼 그 당시에 이미 소실되어 버린 경전도 있었다.

불교학의 연구 대상으로 ‘초기불교’라는 분야가 있다. 초기불교의 정의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여하튼 연구하여 복원이 가능한 가장 초기에 해당하는 불교를 초기불교라고 보면 된다. 이 초기불교가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 초기경전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초기불교와 초기경전의 정의를 새로이 정립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즉 ‘초기불교’란 부파들이 전승한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장 오래된 시대의 불교를 의미하고, ‘초기경전’은 부파들이 전승한 경전들에서 오래된 부분(古層)을 추출하여 복원되는 경전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초기불교든, 초기경전이든 부파의 자료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는 요소를 기반으로 하여 재구성되는 불교 내지는 경전이라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아함경』은 서북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져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고, 빨리어로 된 『니까야』는 스리랑카를 거쳐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전해진 것이다. 둘 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부파의 애매모호한 전승이라는 중간 단계를 거친 결과물이다.

초기경전에 대한 위의 새 정의에 따르면, 초기경전은 『아함경』과 『니까야』 그 자체가 아니라, 『아함경』과 『니까야』에 속하는 많은 경전 중에서도 연구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오래되었다고 인정되는 경전 또는 경전의 일부’에 국한된다. 구체적 주요 연구 방법은 이렇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다수 부파가 제각기 전한 아함과 니까야와 율장의 대응 부분을 대조하여 공통적인 내용을 추출하는 것이다. 내용적으로 다른 내용도 적지 않다고 인정하며, 부파의 전승에서 새로이 ‘석가모니의 말씀’으로 인정되어 추가된 경전도 많다는 것도 인정한다.

이것은 결국 『아함경』과 『니까야』 자체도 전승되는 과정에서 변용을 겪었다는 말이 아닐까? 이 중에서도 변용을 비교적 덜 겪었다고 판단되는 오래된 부분만을 초기경전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지 않을까? 여기에는 변용이 전혀 없는 경전을 복원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고백이 묻어 나온다. 초기불교 연구의 종착점이 어디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초기경전으로 인정받았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석가모니의 말씀 100퍼센트 그대로일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을 것 같다. 

|    고전적 불교 문헌은 금광석과 같다
이상의 고찰을 감안한다면,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경전, 또는 고전적 불교 문헌은 비유해서 말하면 금광석이라 할 수 있다. 그 원초의 부분을 금이라 한다면, 변용된 부분은 금 이외의 물질에 해당한다. 문제는 금광석의 경우에는 제련 과정을 통해 순금만을 추출할 수 있지만, 경전의 경우에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보인다는 점이다. 

현재의 『아함경』과 『니까야』도 금광석이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대승불교 시대에 새로이 편찬된 많은 대승경전도 금광석과 같으며, 고전적인 논들도 마찬가지다. 석가모니가 직접 하신 설법에 해당하는 순금의 함유량은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만을 완전하게 가려낼 수는 없다.

따라서 경전을 포함한 고전적 불교 문헌에 근거한 본인의 불교 이해도 금광석과 같다. 핵심은 순금 이외의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 고전적 불교 문헌에서 그 부분은 도대체 어떤 성격의 것일까? 그 부분이 여법如法하다면 석가모니는 그 부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여법한 그 부분이야말로 순금과 같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여법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다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