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제따와나 선원 개원한 일묵 스님

사성제와 팔정도, 중도의 법을 퍼뜨리는 교육과 수행의 도량 만들 것

2018-11-23     유권준

제따와나 선원이 개원했다. 개원을 앞두고 일묵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인터뷰 내내 사성제와 팔정도, 중도의 수행법을 강조했다. 제따와나 선원을 춘천에 개원한 이유도, 사찰의 건축양식도 모두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을 따르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법을 밝히고, 바른 수행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국불교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대안이고, 비전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불고 있는 명상붐에 대해서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선을 그었다. 

사진 : 최배문


|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중요하다

일묵 스님은 지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선원 개원이 계속 미뤄져 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납골당이 들어선다’는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 선원 개원을 막아왔다.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전통사찰의 모습이 아닌, 처음 보는 건축양식이 오해를 키웠다. 춘천시도 건축 심의에서 두 번이나 퇴짜를 놨다. ‘사찰로 허가받은 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춘천시를 설득하고 나니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진심은 통했다. 춘천시도 스님의 설명을 듣고 중재에 나섰다. 계속된 소통과 대화는 문제를 풀어냈다. 주민들과의 분쟁은 모두 해결됐고, 선원은 지난 10월 14일 개원했다.

“제따와나 선원이라는 이름은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원래 이름입니다. 근본 가르침을 따르고 당시의 모습을 닮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죠. 우리의 지향점을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던 곳의 이름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절을 수행하는 곳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벽돌만 남아 있던 기원정사 터를 떠올려 설계에 반영했습니다.”

제따와나 선원은 부부건축가 노은주, 임형남(가온건축) 소장이 설계했다. 붉은 벽돌 40만 장을 사용해 지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밋밋한 벽돌을 피하고 파키스탄에서 일일이 손으로 만든 수제 벽돌을 사용했다. 선원의 외관은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파격적이다. 일체의 장식이 배제됐다. 탱화도, 단청도 없다. 불상도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박물관에 있는 부처님을 형상화했다. 겉모습은 파격의 연속이지만, 가람배치는 전통적인 양식을 따랐다. 높이가 4m씩 높아지는 세 개의 단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는 일주문과 종무소, 공양간, 신도들의 숙소가 위치한다. 두 번째 단은 스님들의 거처가 있다. 세 번째 단에는 법당과 선방이 모셔졌다. 세속의 공간에서 일주문을 거쳐 재가자와 행정의 공간이 나타나고, 스님들의 공간과 법당과 선방이 차례로 위치한다. 법당에 오르는 길은 일부러 한번 꺾이도록 했다. 단조로움을 피하고 수행의 길이 간단치 않음을 상징한다. 

“우리 도량은 사성제 수행도량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주문도 좌우로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사성제를 의미하죠. 한쪽은 괴로움의 진리, 한쪽은 행복의 진리입니다. 괴로움의 문으로 들어가 행복의 문으로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괴로움은 고성제와 집성제, 행복은 멸성제와 도성제의 의미죠. 첫 번째 단의 건물 배치도 사각으로 이뤄져 중정을 감쌉니다. 그것도 사성제를 상징합니다. 일주문을 지나 법당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를 의미합니다. 수행을 통해 열반을 향해 간다는 상징이죠. 법당과 선방은 교학과 수행이 함께 가야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1층인 법당에서 교학을 배우고 2층의 선방에서 배운 바를 실천한다는 의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방의 경우는 법당과 살짝 어긋나 허공으로 나온 필로티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수행과 실천을 통해 출세간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으로 만들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단순해 보이는 건축양식에 확고한 철학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낯선 건축양식에 대해 주변의 반응은 어땠는지를 물었다.  

“우리 절에 계신 분들은 모두 좋아하셨습니다. 절 밖에 계신 분들은 낯설어 하신 분들이 가끔 계셨는데, 취지를 설명해드리면 대부분 공감하셨어요.”

일묵 스님이 건축양식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은 기도중심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을 장엄하게 하고, 그 장엄함을 바탕으로 신심을 불러일으켜 기도에 집중하게 하는 그런 구조라고 볼 수 있죠. 우리는 수행하는 선방을 기본 개념으로 잡았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수행자들이 수행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어요. 그래서 법당도 부처님만 모시고, 가급적 단순하게 구성했습니다. 미얀마나 태국 등 수행처들을 가보면 대부분 돌 위에 부처님 한 분만 모시고 단순하게 법당을 꾸밉니다. 치장하고 그런 것 말고 깔끔하게 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    초기불교를 강조하는 이유

널리 알려진 대로 일묵 스님은 1996년 서울대 수학과 박사 과정을 밟던 중에 출가했다.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원택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대학에서 함께 불교를 공부하던 10여 명이 잇따라 출가하며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출가 이후 스님은 지독한 방황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출가 전 스승이었던 강정진 거사에게 배운 수행법이 발목을 잡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아론眞我論의 오류에 빠져있었어요. 강정진 거사는 삼매 위주의 수행을 하면 된다는 논리였죠. 출가 이후에도 강정진 거사와의 인연이 오랜 기간 계속됐습니다. 그분과의 인연을 끊으면서 불교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먼저 나왔고, 함께 출가했던 분들도 2-3년 지나며 모두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강 거사가 깨달은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수행을 하면 할수록 아상이 더 강해지고 번뇌가 깊어졌죠. 결별하고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기존의 생각이 무너졌고 의지하던 것이 다 사라졌으니까요. 다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동국대에 입학해 한 학기 정도 다녔습니다. 그때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집중적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습니다.”

스님은 책으로 확인한 것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미얀마로 떠났다. 파욱국제수행센터를 찾았다. 그리고 틱낫한 스님이 있는 플럼 빌리지에서도 수행을 했다. 태국에서도 한동안 수행을 했다. 수행센터마다 다른 수행의 방법과 체계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사성제와 팔정도의 본질을 파고 들었다. 지혜 없이 선정수행만 하는 것도 부작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주석서에서 벗어나 부처님 말씀을 직접 보기 위해 초기불교의 경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부처님 당시의 법과 수행을 고민했다. 그러면서 팔정도와 사성제에 담긴 부처님의 의중이 보였다. 이번에 개원한 제따와나 선원도 그런 고민의 연속선이다.

“전통강원은 기존 시스템이 있다 보니, 새 프레임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저는 불교가 시작될 당시 운영되던 시스템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래야 어떤 가르침이 어떤 수행과 연결되는지를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죠. 뿌리와 가지를 구별해 찾아들어감으로써 통합과 소통의 루트가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뿌리부터 시작해야 어떤 가지로 뻗어나갔는지를 알 수 있는 이치죠. 그래야 불교가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스님은 제따와나 선원에서 불교교육시스템을 구축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종단 차원에서 전통적인 교육시스템을 바꾸려면 제약조건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에 맞는 것을 다양하게 시도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성제와 팔정도, 중도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그런 교학과 수행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목표죠. 좀 더 나아간다면 부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사회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연구하는 연구소도 운영해볼 생각입니다. 불교교학과 사회적 활용을 연구하는 곳 말이에요.”

기존의 한국불교가 가진 전통적인 수행법과 일묵 스님이 지향하는 수행법의 차이를 물었다.

“중도라는 개념은 교리적인 ‘견해’의 측면이 있고, 실천수행법의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큰스님들께서는 연기를 설명하실 때 ‘중도’라 하지 않고 ‘중간’이라고 설명하시죠. 중도는 빨리어로 ‘맛지마 빠띠빠다majjhima-patipada’ 라고 해서 중간의 길이라는 의미죠. 중간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의한 가르침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나 힌두교 신자들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진아론’과 ‘영혼불멸’을 이야기하고 유물론자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는 ‘단멸론’을 이야기하죠. 중도는 그런 설명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중도의 수행법을 터득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저는 개념으로서의 중도만이 아니라 수행법으로써 방법론인 중도수행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빠진 것이 있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라는 견해에 빠지면 허무론에 빠질 수도 있죠. 부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사성제와 연기를 통해 말씀하신 내용은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는 것을 설하신 것이죠. 그런데 이 작용 중에 유익한 작용이 있고 해로운 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명과 갈애가 그치고, 그것이 소멸되면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는 게 12연기에서 설하신 겁니다. 그러면 나에게 일어나는 작용이 유익한지 해로운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죠. 현상은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것일 뿐이지만, 나에게 괴로움이 일어나게 하는 불선법(不善法 akusala dhamma) 이라면 삼가해야 하는 것이죠. 전통수행법에는 이런 방법론이 좀 빠져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묵 스님은 팔정도가 들어 있으면 불교수행법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교수행법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사마타나 위빠사나 수행도 수행의 테크닉일뿐, 중요한 것은 정견正見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사성제의 지혜라는 것이다. 고성제에서 말씀하신 것은 오온五蘊이고 오온은 무상하고 괴로움의 속성이라는 것. 일묵 스님은 설명을 이어갔다.

“중도수행을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을 연기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건 지어져 만들어진 세상과 현상을 이해하는 바른 눈이 바로 연기의 눈이죠. 조건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사라질 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작용이 드러나지만 드러나는 순간 무상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죠. 무상하기 때문에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터득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행복을 추구하는데 부처님이 보시기엔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 불완전하고 행복과 불행을 반복하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배우고 깨닫고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는 마음이 청정해야 하고 두 번째는 깨끗한 마음으로 진리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중도는 다른 말로 하면 균형과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잘 조화시킨 수행법이죠. 지관쌍수止觀雙修, 정혜쌍수定慧雙修죠. 또 하나는 감각적 욕망의 행복을 수행을 통한 삼매의 행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삼매 자체가 탐욕과 성냄에서 벗어나는 행복 즉 출리의 행복인데, 이 행복은 세속의 행복보다 본질적인 행복이고,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이죠. 이런 수행이 바로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중도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 : 최배문

|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수행법에 대해 더 물었다.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와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대표되는 수행법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니까야를 보면 깨달음을 얻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심을 따르는 자가 있고 하나는 법을 따르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신심이 강한 자는 한마디만 해도 100% 믿음이 생기는 사람이고, 후자는 법을 설하면 그 법을 받아들여 견해가 바뀌는 사람이죠. 수다원須陀洹이 되는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는 믿음, 다른  하나는 지혜라는 거죠. 화두선은 믿음이 강한 것 즉 대신심이 전제가 되는 것이죠. 대신심을 전제로 분발심도 내고, 지혜를 닦아 의심을 통해 수행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선지식이 법문이나 지도를 통해 보완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을 따라 깨달음에 이르는 자는 법에 대한 체계적 학습을 통해 믿음이 확고해지는 방식인데, 요즘 사람들에게는 후자가 더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그렇고요.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 이거 잘 안 들어가요. 그것보다 법을 차근차근 설명해주면서 체계적으로 원리를 따라가다 보면 확신이 생기고 그것을 수행으로 연결하는 방식이죠.  저는 법을 설명해주고 이해하는 게 잘 맞아요. 그런데 우리 불교 시스템은 모호하고 방향이 잘 안 보였습니다. 특히 대승불교로 가면서는 팔정도가 많이 사라져요. 대승경전을 보면 팔정도 이야기가 많이 안 나옵니다. 12연기에 대한 것도 많이 줄어들고요. 그런데 초기불교를 공부하면서 사성제와 팔정도를 공부하다 보니 길이 명확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말고도 이런 경험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속에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교육을 받은 분들이라면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    범람하는 서구 명상법은 유용하지만 진리는 아니다

일묵 스님은 서구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명상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유용성 면에서는 분명히 효과가 있다고 봐요. 하지만, 그것이 진리인가 라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라는 증상에 그것이 유용한가 하는 것과 그것이 진리인가 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봐요. 모든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가기보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골고루 존재하는 것이 필요하죠. 뇌과학의 경우도 자칫 단멸론으로 갈 위험성이 있습니다. 과학은 만능이 아닙니다. 뇌에 대해 연구되는 것도 아직은 어린애 수준이라고 봅니다. 지금은 진리인 것 같아도 시간이 흐르면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시도는 좋다고 봅니다,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다보면 자리를 잡으리라 생각해요.”

제따와나 선원은 오후 불식을 실천한다. 청정하고 수행처다운 계율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수행의 기본은 계율입니다. 계율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계율만 잘 지켜도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계율과 법의 핵심인 사성제와 팔정도, 중도를 잘 학습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미얀마에서 수행하면서도 깜짝 놀란 것이 바로 모든 행동을 계율에 비추어 보는 태도였습니다. 계율에 비추어 보고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바로 시정하는 것이죠. 그게 비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고, 수행자의 태도라고 봅니다.”

사진 : 최배문

|    한국불교에 대한 생각

스님은 한국불교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이탈리아를 예로 들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 많다보니, 의지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많은 이탈리아에 가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활력이 부족하고, 과거의 자산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탈리아에서도 관광자원이 적은 밀라노 같은 북부지방을 가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고, 훨씬 생명력이 넘친다는 것.

“한국불교는 너무 자산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문화재 보수다 입장료다 해서 목돈이 넘치죠. 그러니 신도들의 시주가 눈에 들어올까요?”

그러고 보니, 제따와나 선원은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종무소 밖에 게시한다. 어느 날 공양은 누가 시주했고, 어떤 물품은 누가 보시했는지를 적어 감사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다. 

스님은 또, 제따와나 선원을 재와 기도를 하지 않는 수행처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힘과 이익이 지배하는 곳이 아닌 법이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티베트불교가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데 큰 역할을 한 분들이 바로 ‘게쉐’라는 불교 박사들입니다. 약 1,500명의 게쉐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티베트불교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죠. 엄격한 교육 과정을 통과한 티베트불교의 사상적 코어(핵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불교박사 1,500명이 티베트불교를 세계에 알린 것이죠. 우리도 그러한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불교 리더들 중에서 체계적 학습과 수행을 통해 불교를 체득한 핵심을 양성하는 것이 저희 제따와나 선원의 최종 목표입니다. 한국불교의 사상적 코어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일묵 스님은 지금은 불교계가 분열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잘못을 가지고 비난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미래불교를 위한 대안과 비전을 생각하고 나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잘못을 덮어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준비하자는 뜻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