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빛의 샘, 내 인생의 보람

2007-09-15     관리자

우리나라에 외래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민중들은 샤머니즘에 젖어 있었다. 샤머니즘의 논리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거의 모든 종교가 天사상을 믿고 있음)으로부터 복수(福壽)를 부여받고 명(命)을 받고 나오게 된다고 믿고 있다. 이때에 '명'이란 일종의 직분과 소명을 뜻하는 것이다. 즉 일정한 시간 동안 세상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본래의 곳으로 복귀하라는 약속을 받고 태어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렇게 하늘이 부여한 삶을 충만하게 채워서 살지 못하면 억울하다고 여기게 되어 죽어서도 저승의 공간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이승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는 것이다.
밀양지방의 설화인 '아랑각설화'나 고소설 '장화홍련전'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는 하늘이 준 목숨을 채워서 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한을 품었기 때문에 파생된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앞서 우리나라 문학에 잠재되어 있는 샤만적 논리를 예로 든 것은 바로 하늘로부터 우리는 누구나 복수(福壽)를 부여받고 '명(命)'을 받고 태어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자신의 삶의 고귀함과 존재가치를 깨닫고 나름대로 세상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데 충실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행스럽게 필자는 대학교수로 교육을 통해 '봉사'하는 직분을 부여받았다. 그것도 특히 한번의 교육기회를 잃어버리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대학교육을 받고자 하는 집념과 의지를 가진 이들을 가르치는 방송대학에서 22만 명(17개학과)을 상대로 강의와 봉사를 한다는 데 상당한 보람을 느낀다. 국문과 학생들만 한 학년에 5천명씩 4개 학년에 2만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므로 모든 학생들을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TV강의와 라디오 강의, 교실 강의 등을 병행하면서 수준 높은 문학강의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예술계통의 동아리인 '극예술연구회'나 '수용미학연구회', '민속연구회' 등을 지도하여 학생 스스로 연극배우나 연출가, 소설가 등으로 사회에 진출하도록 개별지도를 하고 있다. 이렇게 학생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개인시간이나 가족과 같이 보낼 시간이 거의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많은 학생들과 접촉하다 보니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몇 명의 뛰어난 작가를 배출하여 문단을 풍성하게 한 점과 연예인을 몇 명 가르쳐 화제가 되었던 점이 추억에 남는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도 하나의 보람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전에 친한 화가 한 분의 작업실에 놀라 가기로 몇 사람이 약속을 하였다. 그 중에는 최근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휘날리고 있는 소설가도 있었고, 시인이며 정신과 의사로 이름을 날리는 분도 있었고, 소설가 지망생인 여성도 있었다. 구파발 근처의 소주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그 화가가 한 명의 여성 소설가를 초대하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전갈이 있었다. 전화를 받으니 그 술집을 찾지 못해 구파발 전철역 앞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밝은 목소리가 전화수신기를 통해 울려나오고 있었다.
화가의 말로는 그 여성 작가가 필자를 잘 알고 있으며 필자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밤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오기로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전화수신기를 내려놓고 전철역으로 가서 그 여성 작가를 마중하여 데려왔다.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어울려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여성 소설가에게 궁금증에 대해 물어 보았다.
'세상은 좁고도 넓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것일까? 그 여성 작가는 컴퓨터 통신을 통해 명성을 얻은 작가로 현재 스포츠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주부 소설가이다. 그녀는 바로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국문과에 다니고 있으며 논문만 쓰면 졸업이 되는 고학년에 다니다 일이 바빠서 잠시 휴학 상태라고 자신의 신상에 대해 밝혔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세상인가? 학생수가 너무나 많으니 교수가 일일이 모든 학생을 알 수는 없는 것이 방송대학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 작가는 4년 전 학과 축제날 필자의 옆자리에 앉아서 뒤풀이 시간에 막걸리를 주고받았다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구운몽」속의 성진 이처럼 이전의 체험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기이하다.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한 명의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보태기로 한다. 6년 전의 일이다. 집으로 밤 12시가 넘어 전화가 왔다. 애 엄마가 여자 전화라면서 퉁명스럽게 전화를 바꾸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이리에 사는 국문과에 다니는 주부학생인데 학업과 창작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으로 상당한 시간을 통화했으며 지방 학생 치고 매우 진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한 번 만난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각종 일간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바 있다. 그 해에 어느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신문기자들과 같이 만나 회식자리에서 신문기자들이 그 시인을 칭찬하는 것을 들으며 스승으로서의 기쁨과 보람을 만끽한 적이 있다.
'청출어람(靑出於藍)'과 '후생가외(後生可畏)'의 보람 이상의 기쁨이 또 있겠는가? 이는 맹자가 언급한 삼락(三樂) 중 하나가 아닌가?
박태상 님은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교환교수를 지낸 바 있고,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에 재직 중이다. 저서로 「한국문학과 죽음」등 10여권이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