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상달, '세존(世尊)단지'의 내력

불교 세시풍속

2007-09-15     관리자

11월의 세시(歲時)

양력으로 11월이 음력 10월이니 바로 '상달'에 해당한다.
상달을 한자로는 '上月'이라 적으니 1년중 가장 귀한 달, 높은 달로 여겼다.
이는 우리 민족에 있어 아주 오랜 유풍으로 이미 상고시대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옛 문헌에 "…천신(天神)과 제신(諸神)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國中大會)등 제천의식(祭天儀式)을 가졌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사사로운 문중(門中)과 집안의 의식으로도 '시제(時祭)'를 지내거나 '조상단지'를 위하고 성주치성〔城主祭〕과 말의 고마움을 기리고 그를 위하는 말날고사〔馬日告祀〕등이 있는바 뒤에 살펴보기로 한다.
음력 10월의 시절음식은 아주 다양하다.
첫째로 한 겨울 양식이기도 한 김장을 한다. 갖가지 김치를 한꺼번에 담그는 것을 김장이라 하는데, 입동(立冬)을 전후해서 그 해의 일기에 따라 일정이 정해진다. 일단 무와 배추가 얼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이다.
재료로는 무·배추·갓·파·마늘·고추가루·생강·소금과 갖가지 젓갈이 있어야 한다. 종류로는 통김치·쌈김치·깎두기·석박지·동치미·젓국지·겉절이·채김치·채깎두기·짠지….
옛날 서울의 삼개〔麻浦〕 포구(浦口)는 김장을 앞두고 무척이나 붐볐다.
온갖 젓갈을 실은 배가 모여들었으니 지금도 '마포 새우젓'이란 이름이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포는 서울의 일상 생활용품을 실어 오르내리는 관문이어서 쌀·무우·배추는 주로 하류에서 올라오고 겨울에 뗄 장작은 상류로부터 배에 실려 내려왔다.
한 겨울에는 강물이 얼어 배가 통행할 수 없게 되므로 서둘러 왕래하는 배가 많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날씨가 쌀쌀해서 만둣국이 인기였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동글 납작하게 편 다음, 고기와 야채를 다져서 넣고 싸서 장국에 끓인다. 지방에 따라 만두의 크기가 다르니 서울·중부지방의 것에 비하여 평안도·황해도의 만두는 그 크기가 몇 곱절 되는 것도 있다.
전통적인 우리의 과자〔韓果〕라 할 '강정'도 특이하다. 찹쌀가루를 물과 술에 반죽하여 동글거나 모나게 모양내어 만들어서 기름에 튀겨 꿀을 바르고 그 위에 깨·콩·잣 등을 묻혀 먹으니 그 맛이 달고도 고소하다. 그 묻힌 것에 따라 깨강정·콩강정·잣강정 등으로 불리운다.
규모가 있는 집에서는 화로 위에 전골 틀을 올려놓고 쇠고기, 달걀에 파·고추가루·마늘·당근 등의 갖은 양념을 넣고 끓여서 먹는데, 이것을 '열구자탕' 또는 '신선로'라 한다.
'뒤주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듯이 넉넉하고도 한가한 달이어서 이름 그대로 1년 중 가장 귀한 '상달'이라 이르는가 싶다.
양력 11월 10일 '지장재일'이요, 16일이 '관음재일'이다.
시제(時祭)·성주굿〔城主祭〕·말날〔午日〕. 이제는 옛 법도를 지키는 문중이 점점 없어져 가지만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까지만 해도 5대 이상 조상께는 음력 10월 15일을 전후해서 산소〔墓〕에 차례를 올리니 이를 '시제' 또는 시사(時祀)라 했다.
4대 조상까지는 사당에서 기일에 제사를 올리고 5대 이상 조상께는 한꺼번에 산소에서 묘제(墓祭)를 지내고 이 풍속이 근년에 와서 다시 살아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성주굿'은 시제와는 달리 집 안에서 올리는 한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식인데 지금도 농어촌에서는 꽤나 지켜지고 있다.
상달에 들어 특히 말날〔馬日〕이나 그 밖의 좋은 날〔吉日〕을 잡아 '성주'께 치성을 올린다. '성주신'은 한 집안의 안녕을 관장하는 신이라 믿어 햇곡식으로 술과 떡을 빚고 과일을 장만하여 제를 드리는 것이다. 성주굿은 대개 주부에 의하여 간소하고도 정성스럽게 치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부잣집에서는 무당을 불러 본격적인 굿판을 벌이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 성주굿·성주받이굿·안택굿이라 한다.
우리 민족은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민첩함으로 동양 3국(한국·중국·일본)에서 따를 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10월 상달이면 천지신명과 조상께는 물론이요, '말'을 위한 치성도 따로 마련했다.
음력 10월의 오일(午日)을 '말날'이라 하여 '팥떡'을 해서 마굿간 앞에 차려 놓고 말이 병 없이 건강할 것을 비는 고사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말을 기르는 집은 거의 없어졌고 주로 소를 기르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 비율이 반반에 가까웠었다. 말은 장거리 교통수단으로 더 없을 뿐만 아니라 농사에도 이용되고 특히 유사시 전마(戰馬)로 충당되니 나라에서 말 기르기를 권장했다.
그 예로서 조선시대의 문헌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도 말날 마제(馬祭)때 부르던 노래인 '군마대와(軍馬大王)'이 전하고 있다.
'말날' 중에서도 무오일(戊午日)을 으뜸으로 쳤는데 그 까닭은 무(戊)와 무(茂)가 음이 같아서 무성(茂盛)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였으리라 믿어진다. 이와 반대로 말날 중에 병오일(丙午日)은 고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이 역시 병(丙)과 병(病)의 음이 같아 말의 병을 꺼려한 데서 생겨난 것이라 믿어진다.
지방에 따라서는 말날에 시루떡을 해서 외양간과 또는 방 안에 차려놓고 주인의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비는 치성을 하거나 안택(安宅)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이 날 '조상단지'에 담겨있는 묵은 곡식을 햇곡식으로 갈아넣는 것도 세시풍속의 하나였다.
'조상단지'란 일종의 가신(家神)으로 한 집안의 길흉을 제도하는 영험한 존재라 하겠는데, 이 조상단지를 지방에 따라서는 '세존(世尊)단지'로 부르고 있음은 불교와 토착신앙의 자연스런 만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