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명법문]일상에서의 수행

2018-10-26     무각 스님

마음공부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쉼 없이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젖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우리 몸에 그것이 배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공부가 일상화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일상에서의 수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진 : 최배문

|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 잊지 않는 것
행자 때 이야기입니다. 제가 행자 때 계단 닦는 것으로 공부했습니다. 날마다 엎드려 수 개월간 계단 끝부분 구리로 된 신주를 청소했습니다. 워낙 때가 덕지덕지 붙어서 처음에는 철 수세미로 닦았습니다. 때가 잘 지워지지 않아 하루에 계단 두 개밖에 못 닦았어요. 계단을 모두 닦는데 여섯 달 넘게 걸렸습니다. 

아래까지 모두 닦고 나니 위에 또다시 녹이 슬어 있어요. 하지만 그때부터는 철 수세미가 필요 없었습니다. 파란 수세미에 광약을 묻혀서 힘주어서 닦고, 다음에는 거친 헝겊으로, 마지막에 부드러운 융으로 닦았습니다. 광약을 살짝 묻혀서 두 번만 닦으면 깨끗해졌습니다. 그다음에는 며칠이 지나도 얼룩만 조금 남아 있고, 녹슬지 않고 반짝반짝합니다. 

이게 바로 마음 닦는 얘기입니다. 처음에는 잘 안 닦이죠. 경계가 크게 오는 것은 업장이 두터워 계단에 때가 덕지덕지 붙은 것과 같습니다. 

역경계, 순경계가 닥치면 마음 닦으라는 재료인가보다 하고 이걸 통해서 ‘내 마음을 닦아야지’ 하고 알아채면 됩니다. 그것가지고 울고불고 하지 마세요. 외려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경계가 닥치지 않으면 내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계속 정화시켜서 업식을 닦으니 나중에는 반짝반짝 광이 나는, 그야말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본래 부처인데 지금은 새카맣게 때가 붙어서 중생 노릇을 하고 있거든요.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마세요. 

부처님 말씀을 귀하게만 여겨 들고 있지만 말고 잘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한테 잘 비추어서 보면 이치로서 더 깊게 알아지고 체험하게 됩니다. 성인의 말씀을 자주자주 접하고 자기화 시켜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바깥에 있으면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실천이 필요합니다. 염불하고, 봉사하고, 참선하고, 간경하고, 이런 것을 통해서 점점 내면이 깊어집니다.

 

|           지금 한 생각 올라오는 이때
내 마음을 닦는 것은 언제 해야 할까요? 바로 지금 한 생각 올라오는 이때 이 순간 도의 경지로 들어가세요. 보통은 큰일이 닥치면 나중에 “절에 가서 백팔 배하고 부처님께 기도해야겠다” 이럽니다. 기도는 절에 가서만 하나요?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기도처가 되어야죠. 언제 또 기다렸다가 기도를 하나요. 그러면 이미 삼천 년이 지나가 버립니다. 차 지나간 다음에 손 흔들어 봐야 이미 늦습니다. 선사들이 묻는데 머뭇거리면 삼십 방망이 날아오죠. 생사의 바다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한 생각에, 담대하게 척 믿고 맡겨 버리세요. 무서울 게 뭐 있고 어려울 게 뭐 있나요. 참선은 절차고 형식이고 순서이고 필요 없습니다. 곧장 자각해서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가 와도 자기 가슴속에 ‘참나’로 귀결시키는 작업만 끝없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귀가 트이고, 눈이 뜨이고, 입이 열립니다. 경계에 따라서 바깥 경계에 끌려다니면 완전히 어긋나 버립니다. 체험을 하면 어떤 소리도 다 하나로 귀결시킬 줄 압니다. 그때는 어떤 법문을 들어도 어디를 가도 상관없습니다. 

세상은 끝없이 변화무쌍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도 당하고 사랑도 식어 버리죠. 잘 지내며 좋았을 때도 진실이고, 배신당했을 때도 진실입니다. 배신했다 해서 그전에 좋았던 것까지 다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도 맛을 보고 저것도 맛을 보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냐? 자기 안의 부처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나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지극하게 죽기 살기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배신당하고 밤잠 설치며 괴로워하는 것조차도 그 자리에서 합니다. 인생의 단맛, 신맛, 쓴맛, 떫은맛 갖가지 맛을 다 볼 줄 알아야 자유자재하게 쓸 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 지혜를 기르기 위해서 죽도록 힘든 고통도 맛을 한 번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갖가지 맛을 다 보면 나중에 온갖 맛을 내서 사람을 건지는 데 능수능란하게 지혜를 사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끝없이 닥치게 하는 것입니다. 천 가지 만 가지 맛을 보아야만이 나의 인격이 보살로서 차원이 높아지고 모두에게 이익이 됩니다. 

 

|           모든 경계를 굴린다
이 가르침대로 살면 여여하게 삽니다. 큰 바다에서는 큰 배를 띄우고, 작은 바다에서는 작은 배를 띄우는 것입니다. 개울물에 맞게 조그마한 조각배를 띄우고, 큰 태평양에는 큰 배를 띄워야 풍랑을 헤쳐나가듯이 자유자재합니다. 그게 ‘무유정법無有定法’으로 정함이 없는 법입니다. 

나라는 걸 놓아야 큰 배가 되고 작은 배가 되고 자유자재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놓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고 이것은 싫고 하면 나라는 것이 한정됩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맛볼 줄 아는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이 내가 되니까 한정된 나라는 것이 없는 거죠. 

생이 석 달쯤 남은 시한부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자식은 학교도 안 가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많으니까 자꾸 싸우고 짜증 내고 야단을 쳤죠. 그러다가 시한부로 죽음을 받아들이니까 세상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남편이 술 먹고 늦게 오고 자식이 말썽 피워도 저렇게 하는 것도 건강하니 그러는 것이다 싶어서 이해가 되고, 또 그것조차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으니 감사했습니다. 석 달 뒤면 못 본다 싶으니까 하나하나가 생생하고 감사하게 다가왔어요. 내가 살아 있으니까 햇빛 비치는 것도 볼 수 있고 바람을 느낄 수 있고 꽃도 볼 수 있고, 이 삶 자체가 축복이더랍니다.

조금 빨리 죽고 늦게 죽을 뿐이지 우리는 모두 생멸법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생멸멸이生滅滅已’하면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생멸이 다하면 완전한 깨달음이 고요한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분이 여기까지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얘기 속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불교를 공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 속에 벌써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죠? 낱낱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싫고 좋고, 옳고 그르고, 너다 나다. 이게 전부 생멸입니다. 생멸이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게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나면 생이고, 한 생각 멸하면 멸입니다. 크고 작고 옳고 그르고 그런 것이 다 쉬어져 버립니다. ‘적멸위락’ 고요하니 진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낱낱이 전부 있는 그대로 실감나게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죠. 햇빛은 햇빛대로 실감나게 나와 둘 아니게 그렇구나, 참 감사하다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자성의 본래 부처가 내 부모입니다. 이 육신의 부모는 한 생의 부모이지만 자성의 부처는 영원한 세세생생 법의 부모입니다. 나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면 같이 가고, 천당에 가면 같이 가 있습니다. 항상 같이 있습니다. 의지할 바가 그곳밖에 없습니다. 그걸 믿어야 합니다. 울면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픈데 울지 않는 사람 있어요? 아프면 웁니다. 울면서도 이것이 내 부모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함이구나 하고 아세요. 부처 이루기 위해서 걸어가는 발걸음이라는 것을 알면 좀 고생스럽더라도 참을 만합니다. 그러면서 지혜가 향상되고 체험이 오고 깨달음이 생깁니다. 항상 자성의 부처에 의지하세요. 의지처는 거기밖에 없습니다.               
                            

법문. 무각 스님

공생선원 선원장. 오대산 문중으로 출가하였고, 혜거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등지에서 5년간 해외 포교에 진력하다 귀국했다. 도심 속 선 수행을 지도하는 대표적인 선사로 조계사, 불광사 등에서 참선을 지도했다. 『그대 삶이 경전이다』, 『선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 등의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