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이는 어디에 태어났을꼬?

2018-10-26     박재현
그림 : 이은영

에어컨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더위가 겨우 지나갔다. 기상학자들은 ‘북극 최후의 빙하’가 녹아내렸다고 전했다. 그들은 “이례적인 일”이고 “무섭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는 이들은 정작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잘 몰라서 두렵지 않은 게 아니다.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은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닥치는 고생이나 불행은 어쨌든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서운하거나 두려운 것은 내게만 닥치거나 나만 감당해야 할 때다. 

위정자들이 민심을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왜 나만 손해 봐야 하는데, 왜 나만 고생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만 들지 않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살림살이가 팍팍하고 살기가 좀 고생스러워도 사람들은 원망하지 않는다. 전기요금 누진제가 그렇다. 사람들은 우리나라 전기세가 비싸다는 걸 문제 삼는 게 아니다. 가정에만 누진제라는 걸 적용해서 왜 내게만 비싸게 받느냐고 원망하는 거다. 그런 마음의 이치도 모르고 몇 푼 깎아 준다고 대책이라는 걸 내놓으니 사람들의 마음은 이제 딱 한군데로 모인다. “누굴 거지로 아나!”

국민연금도 마찬가지다. 연금 수급 연령을 68세로 조정하려 한다는 말이 돌자 사람들의 마음은 또 나만 가지고 그러는 것 아닐까 의심했다. 그리고 물었다. “군인연금은 이미 45년 전에 바닥났다면서, 군인연금은 왜 나이 상관없이 막 주는데?” 이 질문에 누구도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 군인연금을 국민연금 수준에 맞추어 먼저 개혁했거나, 국민연금을 군인연금에 맞추어 개혁하겠다고 했으면 사람들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위정자들은 정책 짜는 것보다 백성의 마음을 살피는 공부에 치중했다. 한가해서 그랬던 게 아니다. 사람에게 ‘나’라는 마음이 이처럼 가까이서 모질고 질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마음은 젖 먹고 자란 것들이 살아생전에, 어쩌면 죽은 이후까지도 짊어지고 가야 하는 숙명 같은 것이다. 마음은 너무 질기고 집요해서 육신이 사라진 다음에도 유령처럼 떠돌다가 윤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 부처님 시절에 인도 땅에 한 의사가 살고 있었다. 이름이 기바耆婆였다. 동양의 화타에 버금가는 명의名醫였는데, 소리만 듣고도 환자의 병증을 알아내고 치료하는 신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세존께서 그와 함께 무덤 사이를 지나다가 다섯 개의 해골을 보시고, 그중 하나를 두드리면서 말씀하셨다.

“이는 어디에 태어났을꼬(此生何處)?”
기바가 말하였다.
“이는 지옥에 태어났습니다.”
세존이 다시 한 해골을 두드리면서 
말씀하셨다.
“이는 어디에 태어났을꼬?”
기바가 말하였다.
“이는 축생에 태어났습니다.”
세존께서 다시 한 해골을 두드리면서 
말씀하셨다.
“이는 어디에 태어났을꼬?”
기바가 말하였다.
“이는 아귀에 태어났습니다.”
세존께서 다시 한 해골을 두드리면서 
말씀하셨다.
“이는 어디에 태어났을꼬?”
기바가 말하였다.
“이는 인간에 태어났습니다.”
세존께서 다시 하나를 두드리면서 
말씀하셨다.
“이는 어디에 태어났을꼬?”
기바가 말하였다.
“이는 하늘에 태어났습니다.”
세존께서 다시 따로 한 해골을 
두드리면서 말씀하셨다.
“이는 어디에 태어났을꼬?”
기바는 태어난 곳을 알지 못했다.

『선문염송禪門拈頌』 가운데 스무 번째 대목에 올라있는 이야기다. 제목은 촉루觸髏 즉 해골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사체는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수행에 좋은 기제로 작동했다. 원효 대사가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얘기도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죽음이라는 사건과 주검이라는 대상은 산다는 건 뭔지, 마음이란 뭔지 그리고 ‘나’란 도대체 뭔지를 전면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앞의 이야기를 그냥 쭉 읽어나가면 부처님 시절에 있었을 법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뭐가 이상한지 잘 모른다. 조금 썰렁하고 무서운 기운이 감돌뿐이다. 이런 이야기가 왜 선가의 문헌에 실려 있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평이하게 느껴진다. 두어 번 다시 읽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세존은 해골을 모두 여섯 번 두드렸고 또 어디에 태어났냐고 여섯 번 물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분명 해골이 다섯 개 있었다고 했다. 

마지막에 두드린 해골은 도대체 뭘까? 어떤 이는 이런 질문을 하면 쓸데없이 알음알이를 일으킨다고 야단치기도 하지만,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고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선禪에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묻고 또 물어서 마침내 더 묻지 못해야 선을 하는 것이지, 묻는 것을 겁내거나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면 그건 선이 아니다. 해골이 다섯 개라고 해 놓고선 세존은 왜 여섯 번 두드린 거로 나오는지, 마지막 여섯 번째는 두드렸던 해골을 다시 두드린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굴러온 다른 해골을 두드린 것인지, 그리고 기바는 왜 아무 대답도 못 했는지, 이해가 될 때까지 그냥 막 계속해서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이야기가 화두로 바뀐다.

세존이 묻는 부분을 한문 원문에서 살펴보면 “하나를 두드리며 말했다(一鼓云)”고 똑같이 다섯 번 반복해서 적혀있다. 그런데 마지막 여섯 번째만 “따로 하나를 두드리며 말했다(別一鼓云)”고 표현되어 있다. 원문의 저자는 마지막 여섯 번째에 이전의 다섯 번과는 다른 어떤 메시지를 ‘별別’ 한 글자 속에 교묘하게 감춰 두었던 것이다. 그걸 알아보면 눈 밝은 이라고 하고, 못 알아보면 인연 없는 중생이라고 그런다.

여섯 번째 해골을 두드린 것은 그 앞의 다섯 번과는 시차를 좀 두고 일어난 사건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다섯 해골을 두드린 후에 다시 몇 리를 더 가서 어느 무덤에 이르렀을 때, 세존이 한 해골을 보고 두드리면서 물었다는 것이다. 가비가 대답하지 못하자, 부처가 말씀하시기를 “이는 아라한의 해골이니 태어난 곳이 없다(此是阿羅漢觸髏無有生處)”고 했다고 한다. 『오분율五分律』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염송설화拈頌說話』에 적혀있다. 해골의 옛 주인이 마음에 상相을 벗어던진 아라한이므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골에 주목한 설명이다.

다르게 설명하기도 한다. “다시 하나를 두드렸다(別敲一)”고 함은 다섯 개 가운데 하나이니, 앞의 다섯 차례 두드린 것은 경계와 마음에 젖어 들었으므로 각기 태어난 곳을 알았는데, 여섯 번째는 자수용삼매自受用三昧에 들었으므로 태어난 곳을 몰랐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도 역시 『염송설화』에 그렇게 적혀있다. 간단히 말하면, 다섯 번째 해골을 두드릴 때까지 기바는 마음과 경계를 구별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여섯 번째는 삼매에 들어 경계를 구별하는 마음이 없어져서 모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기바에게 주목한 설명이다.

선禪은 사람의 마음이 본래 그러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살면 된다고 하지 않는다. 마음이 그런 줄 알았으면 이제 어떻게 좀 해보라는 게 선이 가리키는 도리이다. 모질고 질긴 마음은 육신이 죽고 난 뒤에도 여전히 정정해서 윤회의 추동력이 되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어떻게 하지 않으면 끝내 걷잡을 수 없다. 마음은 힘이라서 무조건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다. 마음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마음은 일단 생겨났다 하면 마구 돌진한다. 선禪에서는 이 마음을 거둬들여야 살길이 트인다고 했다. 여섯 번째 해골은 마음을 거둬들인 자의 흔적이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