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뜨겁게 역사를 기록해온 사관, 李離和”

2018-10-26     유권준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불광출판사에서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라는 책을 냈다. 1995년 『한국사 이야기(22권)』을 펴내 대중역사서의 시대를 열었던 선생은 불교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 사상사 중심의 불교사에서 벗어나 민중사, 생활사 관점으로 풀어낸 한국불교사를 담았다. 이이화 선생은 현재 파주 헤이리에 집을 짓고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그를 만나 그의 삶과 불교와의 인연이야기, 그리고 책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교유명야당蛟猶明也堂!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이 살고 있는 파주 헤이리 자택의 당호堂號다. 교유명야蛟猶明也는 선생이 존경하는 네 명의 역사인물의 호號에서 따왔다. ‘교蛟’는 허균의 호 교산蛟山에서, ‘유猶’는 정약용의 당호인 여유당與猶堂에서, ‘명明’은 전봉준의 어릴 적 이름이었던 명숙明叔에서, 그리고 ‘야也’는 선생의 선친 호인 야산也山에서 가져왔다. 선생께 의미를 물었다.
“아웃사이더들입니다. 시대의 잘못된 질서에 저항했었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셨던 분들이셨죠”
내친 김에 선생의 이름의 뜻도 물었다. 이이화 선생의 이름은 주역의 대가였던 선친 야산也山 이달(李達·1889~1958) 선생이 지었다. 주역의 팔괘중 하나인 이괘離卦에 돌림자인 ‘화和’자를 썼다. 주역의 이괘離卦는 불(火)을 의미한다. 불은 뜨겁고 왕성함을 상징한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항상 뜨거운 마음으로 민중의 역사를 살핀 선생의 삶이 이름에 녹아있다.

사진: 최배문

|    순탄치 않았던 어린 시절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했던 부친에게 한문을 배웠다. 부친 야산也山은 뜨거운 사람이었다. 야산에 관한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강호의 동양학자 조용헌 선생이 중앙일보에 썼던 글을 보자.

일제는 1944년 무렵 부소산의 삼충사三忠祠터에 신궁을 짓기 위한 기초공사를 시작하였다. 일본신日本神을 조선 땅에 이식시킴으로써 영적靈的 차원에서마저 조선을 병합하고 말겠다는 의도가 담긴 공사였다.

조선 주역의 대가이자 조선의 호국신護國神을 신봉하였던 야산 이달은 이 공사현장을 지켜보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네놈들은 상량식上樑式을 하기도 전에 망할 것이다!” 현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야산을 일본 경찰이 잡아다 취조하였지만 광인으로 판정되어 곧 풀려날 수밖에 없었다…(중략)… (1945년) 8월 13일 (경남 산청) 화계리 주막집에 머물렀던 야산 일행은 다음날인 14일 경북 문경군 문경읍 문경리로 이동한다. 왜 문경입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으니, 야산은 “경사스러운 일을 듣기 위해서는 문경으로 가야 한다”는 대답을 하였을 뿐이다.

문경聞慶이라는 글자 자체가 ‘경사스러운 일을 듣는다’는 뜻이 아닌가. 14일 저녁 문경리에 도착한 야산은 그 제자들에게 잔치판을 벌이라고 명령했다. 문경리의 촌로들을 모아놓고 닭고기와 술을 대접하는 춤판을 벌인 것이다.

야산은 “오늘같이 기쁜 날, 내가 닭춤을 한번 추겠다”고 하면서 멍석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내막을 모르는 제자들은 “우리 선생이 진짜로 돌았나 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스승의 닭 춤을 구경하였다. 한판 신나게 놀고 난 다음날 8월 15일이 밝았다. 그날 해방이 되었음을 알았다.(중앙일보 2004년 4월 8일자)

부친은 신식학교에 가면 서양식으로 세뇌가 된다면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야산도 뜨거운 사람이었지만, 이이화 선생도 뜨거운 사람이었다. 이이화 선생은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친을 떠나 가출한다. 그의 나이 15살이었다. 

집을 떠난 그는 부산과 여수의 고아원을 전전했다. 그러다 전남 광주의 명문이었던 광주고에 입학한다. 그는 광주고에서 낮에는 학교에서 학예부장을 하고 저녁에는 여관에서 일을 했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에는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 카뮈의 작품을 읽었다. 선생은 2층 서재에서 당시 썼던 ‘까뮤와 창조적 윤리’라는 글을 보여줬다. 누렇게 바래고 으스러지는 책속에 선생의 소년시절이 담겨 있었다.

 

|    「불교시보」 에서 기자생활도

광주고를 졸업한 선생은 문청文靑의 꿈을 안고,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다. 동국대 총장을 지낸 홍기삼, 소설가 김주영, 천승세, 시인 이근배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돈이 없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어요. 술집 웨이터에 보험 외판원 등을 전전했습니다. 명동에서 군밤 장사도 했는데 삼일빌딩 뒤에 리어카를 숨겨놓고 밤이 되면 명동으로 가 군밤을 팔았죠. 한번은 한옥집에 빈대약을 뿌려주는 일을 했는데, 약을 뿌리다 쓰러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죠. 또 가루치약을 기차에서 팔다,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모든 것을 빼앗긴 적도 있었어요. 세상이 두렵고 무서운 시절이었습니다.”

생활고로 대학을 중퇴한 그는 당시 을지로 입구 지금의 롯데호텔 주차장 자리에 있었던 국립도서관을 제집 드나들 듯 했다. 고교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해 문학평론을 하고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역사책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그에게 불교와의 인연이 찾아왔다.

명동에서 공초 오상순 선생을 만났는데, 그곳에 최종화라는 사람이 「불교시보」라는 신문을 창간한다며 기자일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 사찰을 돌아다녔어요. 스님들도 많이 만났고, 어릴적 아버지께 배웠던 의상 대사 「법성게」에서 한 걸음 더 공부할 수 있었죠. 한문에는 자신이 있었으니 경전을 읽는 건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3년쯤 기자 생활을 했는데, 신문발행을 건너뛰기도 하고 월급도 자주 밀렸어요. 그래서 그만뒀죠.”

마침 대전의 홍륜학원이라는 곳에서 교사직 제의가 들어왔다. 정규학교는 아니었지만,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대전에 있을 때는 효천동의 심광사에서 숙식을 했다. 학생들을 모아 불교학생회도 만들어 지도했다. 당시 심광사의 주지였던 대의 스님이 좋아했다. 일요일마다 학생들과 법회를 하고, 방학 때는 광덕 스님이 주지로 계셨던 봉은사에서 수련회도 했다. 보람 있는 시절이었다.

사진: 최배문


|    동아일보에서 ‘학사과정’을, 규장각에서 ‘박사과정’을 

1967년 가을 그는 친구였던 홍기삼의 소개로 동아일보사 출판부 임시직원이 됐다. 연감을 교정하는 일이었다. 한문을 많이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감 일을 마치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신동아’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원고를 청탁하고 교정하는 일도 했다. 시간이 남으면 국립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해 책을 읽었다. 6년 남짓 동아일보에서 일했다. 자유언론실천 운동을 했던 이부영과 이길범 등 기자들을 그때 알게 됐다. 나중에 한겨레신문 사장을 역임한 김중배 차장이 술자리로 불러내 술을 사주곤 했다. 동아일보 재직 시절은 대학을 마치지 못한 그에게 ‘학사과정’과 같은 공부가 됐다.

1972년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난 후, 한동안 그는 고전을 읽고 글쓰기를 하며 지낸다. 학생들의 유신반대 시위가 격화됐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를 외치다 강제해직됐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긴급조치가 발동됐다. 시절은 엄혹했다. 그즈음 고교시절부터 즐겨 읽던 ‘사상계’가 폐간되어 읽을 수 없게 되자 ‘창작과 비평’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신경림 시인이었다. 신경림 시인은 동화출판공사에서 편집부장을 맡고 있었다. 이이화 선생은 신경림 시인에게 한국학 관련 글을 쓰고 싶다는 부탁을 했다. 신경림 시인의 주선으로 창작과 비평에 ‘허균과 개혁사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반응이 좋았다. 

1974년에는 문인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이호철, 김우종, 정을병, 임헌영, 장백일 등 5명의 문인이 간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문학평론을 하던 임헌영은 친구였다. 친구가 구속돼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지켜보며 역사 속의 개인의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국역연수원 시험에 합격해 강의를 들으며 국역사업을 하던 것이 그때쯤이었다. 1977년부터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해제 원고 고치는 작업을 하게 됐다. 그는 박사학위 과정을 밟는 서울대 학생들과 함께 일을 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른바 그의 장외 ‘박사과정’시절이었던 셈이다.

 

|    민중사적 관점의 ‘한국사 이야기’ 

이이화 선생을 말할 때 반드시 붙는 수식이 바로 ‘재야 사학자’라는 말이다. 기성 학계는 조롱 섞인 표현으로 이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가 정규 학위를 취득하지 않음을 은연중에 비꼬는 표현이었다. 이이화 선생의 공식 학력은 고졸이다. 대학은 서라벌 예대를 중퇴했고, 성균관대를 청강생으로 잠시 다녔다. 그러나 그는 부친에게 배운 한학실력에 박람강기博覽强記한 독서편력으로 박사 이상의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서원대에서 석좌교수를 역임하고, 원광대에서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학계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학위도 없는 그를 삐딱하게 보았지만, 세상은 그를 박사로 인정했다. 

세상이 그를 박사로 인정한 결정적 계기는 그가 1995년부터 10년에 걸쳐 22권의 분량으로 풀어낸 책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때문이다. 이 책은 대중성을 바탕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다. 권력과 왕조를 중심으로 풀어낸 책이 아닌 민중사, 생활사 중심으로 풀어낸 민초들의 역사책이었다. 무려 50만권이 넘게 팔렸다.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이 로마인이야기 같은 한국사 책을 써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1995년에 전북 장수의 한 폐교에 들어가 쓰기 시작했어요. 벌레도 나오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 덥고 그랬죠. 그곳에서 2년을 지내며 1차분 4권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집에 있으면 지인들이 자주 찾아와 어쩔 수 없었죠”

책이 나오고 날개 돋힌 듯 팔리기 시작하자 기성 역사학계의 삐딱한 시선은 더 이상 호응을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세상은 그에게 ‘단재학술상(2001년)’과 ‘임창순 학술상(2006년)’을 안겼다. 

그는 불교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2000년부터 2년 여간 「불교신문」에 ‘다시 쓰는 한국불교사’를 연재한다. 이를 모아 낸 책이 『역사속의 한국불교』(역사비평사)다. 그리고 그로부터 16년만에 불광출판사에서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를 펴냈다. 새 옷을 입히고 많은 곳을 수정 보완했다. 

그는 책의 머리말을 통해 “과거를 반성하는 자료의 하나로 쓰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상사적 접근보다 불교사적 실체에 치중했다고 강조했다. 고통받는 민중과 불교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 그는 불교사의 부끄럽고, 어두운 부분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불교사에는 여러 가지 부끄러운 장면이 나옵니다. 예컨대 신라 말의 타락했던 불교가 그렇습니다. 민중들은 잇따른 전쟁으로 피폐한 삶을 사는데, 당시 불교계는 불사에만 공을 들였죠. 원효대사의 실천은 불교가 가야 할 중생제도의 길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신라말기의 구산선문을 개창한 선승들의 활발한 활동은 타성에 젖고 타락한 교단에 반작용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의 책 『이야기 한국불교사』에는 그런 불교사의 부침이 그대로 묘사된다.

 “부유한 절에서는 베나 곡식 따위를 가지고 장리 놀이를 했다. 승려들은 각 고을에 관리인을 보내 해마다 이자를 거두어들였다. 승려들은 일을 보려고 다른 지방에 나들이하면서 역관에서 잠자고 먹었다. 벼슬아치가 아닌 승려가 역관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데도 도리어 역에서 일보는 벼슬아치와 백성들에게 접대를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매질을 가했다.(202쪽)”

그는 불교가 역사를 통해 엄격하게 자신을 뒤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좋은 일, 훌륭한 일만 보고 기억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불교만큼 부침이 심했던 종교가 없습니다. 신라 귀족과 결탁해 타락한 경험을 갖고 있고 그때 도의 국사를 비롯한 구산선문이 개창되면서 국가적으로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으며 개혁을 이뤄냈죠. 고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족화되고 불사중심으로 민중의 삶을 도외시하면서 유학자들에 의해서 배척받지 않습니까. 결국 조선이 개국하면서 온갖 수모를 받게 됐죠. 그런 수모를 받으면서도 서산 대사나 사명 대사 같은 분이 계셔서 나라를 구하고, 전쟁을 수습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적 인과법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어요.” 

사진: 최배문


|         불교현대사의 쟁점,불교정화에 대한 생각

선생은 쓴소리를 이어갔다.

“해방 이후 토지개혁을 할 때 사찰 토지가 생각보다 많았어요. 그리고 부산과 마산, 광주, 서울 등에 불교계에서 세운 학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혼란한 와중에 관리를 제대로 못 해 다른 재단으로 넘어간 학교가 많았습니다. 비구 대처의 분규 중에 교육기관에 대한 관리나 재산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어요. 그런 점들이 안타까워요.”

그는 이승만 정권이 기독교 국가를 만들기 위해 헌법을 위반하고 기독교 인재들만 등용했다고 강조했다. 불교계에서는 백성욱 박사나 김법린 박사와 같은 극소수의 인재만 발탁했다고 말했다. 그마저도 등용 기간이 매우 짧았고, 불교는 이용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역사 연구를 하면서 김태흡이나 변설호 같은 대처측 스님들도 많이 만났어요. 해인사 주지를 역임한 임석진도 만났었고. 모두 친일행위를 했던 대처승들이었죠. 이런 사람들이 해방후 비구승들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어요. 비구 대처간 분규에는 그런 배경도 있었어요. 그때 만약 서로를 인정하고 타협했더라면 정화의 과정에서 있었던 비불교적 상황이 노출되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비구승들의 정화 자체가 틀렸다고는 보지 않아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진 잘못까지 옳다고 봐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도 정화과정에서 벌어진 잘못 때문에 불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이화 선생은 “한국불교가 전체적으로 보면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종교 중에는 불교보다 훨씬 문제가 많은 종교도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불교가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상황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불교는 천주교에서 배울 것이 많아요. 첫째는 재정관리의 투명성이에요. 재산관리가 투명해져야 합니다. 둘째는 민주주의 시대에 맞는 정체성을 가져야 해요. 독재정권 시대에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불교가 끼친 영향은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적어요. 그런 점을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중생제도가 별다른 게 아니에요. 시대정신에 맞게 민주적 시스템과 인권을 중시하는 모습이 바로 중생제도예요.”

 

|    외부활동보다는 집필에 몰두

이이화 선생은 예술인 마을인 파주 헤이리로 거처를 옮기고 원칙을 정했다. 지인들이 찾아오거나 화가나 시인 등 마을주민들이 막걸리를 들고 오더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놓고 가라고 한다. 번잡한 곳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데다, 사료를 읽고 집필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선생이 요즘 관심을 두고 하는 일은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일과 국사편찬위원회의 구술사 인터뷰에 응하는 일, 그리고 책 쓰는 일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고려대 강만길 명예교수와 이이화 선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구술사 인터뷰는 사후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불교 관련 책도 쓰고 있는데 이번엔 인물을 주제로 한 책이라고 했다. 통사적 불교사를 썼으니 인물사도 써볼 작정이라고 했다. 현재 17명의 불교 인물의 삶과 사상을 담은 책을 불광과 준비 중이다. 원효와 의상, 도선, 의천, 묘청, 보조, 신돈, 무학, 김시습, 서산, 사명, 이동인, 경허, 만공, 용성, 만해 등이 그 대상이다.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제도하려 했던 인물들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이화 선생에게 인터뷰를 마치며 마음에 남는 법구를 하나 일러 달라 부탁드렸다. 그러자 부친에게 배운 의상 대사 「법성게」의 다음 구절을 들려준다.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보배와 같은 비가 내려 중생에게 이익됨이 허공에 가득하나, 중생은 자기가 가진 그릇에 따라 이익을 얻는다.
세상에 진리를 담은 법은 언제나 가득하지만, 그것을 알아보고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이다. 자력신앙을 강조하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주장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빠진 역사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이화 선생의 관점은 ‘민중’과 중생이다. 중생에 이로움을 주고, 중생의 관점에서 본 역사다. 뜨겁게 계속되어온 그의 역사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