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대흥사 천불전 송학도

그렇게 어른이 된다

2018-10-26     강호진
사진 : 최배문

“요즘 상황이 상황인지라 쉽지 않네요. 외부인이 취재하는 자체를 반기지 않는 분위기예요. 다른 사찰을 찾아야 할 듯싶습니다.”

담당기자는 전화로 벽화취재를 위한 섭외가 실패했음을 알려왔다. 언제부터 한국불교는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교계 매체를 외부인으로 취급할 만큼 삭막해져 버린 것일까. 

“그래도 대흥사에선 허락이 났습니다.” 

경상도 지역의 이름난 대찰들이 줄줄이 퇴짜를 놓은 상황에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소식이었다. 해남 대흥사에 간 횟수를 세어보니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 될 터였다. 첫 새벽에 서울을 출발해 대흥사 절 마당에 당도했건만 낯섦에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15년 세월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세상이 분초를 다투며 변해 가는데 절집만 옛 자취를 고수해야 할 법은 없겠지만 뭔가 억울하단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절집의 상전벽해를 처음 목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흥사의 변모가 유독 서운한 이유는 푸르던 시절의 비망록 몇 페이지가 뜯겨 나간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적혀있었던 싱그러운 이름들이 두륜산 능선 주변을 맴돌다 희미해진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불전으로 향했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벽화가 있는 천불전은 대흥사 전각 가운데 가장 은밀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가허루駕虛樓를 통과하면 자그마한 사각형 모양의 중정中庭이 나타나고 그 마당을 가로질러 서있는 건물이 천불전이다. 용화당龍華堂과 봉향각奉香閣 건물은 천불전을 좌우로 호위하며 외부와 차단하고 있어서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안온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천불전 주련을 보니 이곳이 천 명의 부처를 모신 전각임을 강조라도 하듯 ‘천千’이란 글자가 두 번이나 등장한다. 
 
“부처님이 도량에 앉으시매(世尊坐道場)  
청정하고 큰 광명이 쏟아지는데(淸淨大光明) 
마치 천 개의 해가 떠오른 것 같아서(比如千日出)
모든 세계를 환히 비춘다.(照耀大千界)”

천개의 해(千日)는 깨달음의 세상인 지정각세간에 해당하는 천불이고, 모든 세상(大千界)은 중생세간과 기세간(산하대지 등 자연물)을 말하는데, 주련의 글귀는 이 세 가지 세간이 광명, 즉 세존世尊의 가르침과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에 포섭되어있음을 드러낸다. 하나(세존)에서 시작해 무한으로 뻗어나가고 무한은 다시 하나로 수렴함에 걸림이 없으니, 경전에서 ‘헤아릴 수 없다(不思議)’라고 하거나, ‘오직 부처님만 알 바이지 나의 경계는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 뜻이다.

나는 나의 경계가 아닌 것을 더 헤아려보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천불전에 오른다. 흔히 송학도松鶴圖라 불리는 벽화는 천불전 내부 좌우 벽에 한 점씩 쌍으로 그려져 있다. 19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는 여느 사찰에서 민화 풍으로 그려지는 학의 모습과는 달리 문인화와 같은 고졸古拙한 맛이 있다. 단아한 필치와 채색에서 화사가 천불전 중심벽화로서 품격을 갖추기 위해 정성을 다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대흥사 송학도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과감하게 화면의 절반을 툭 잘라 허공처럼 비워둔 미덕에 있다.

이 여백은 단순히 동양화 특유의 기법으로 치부하기엔 그 함의가 깊다. 대흥사 천불전 특징은 주련의 글자에서 보듯 반복과 중첩을 통해 불교적 의미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인데, 천불전의 입구인 가허루가 허공에 메어놓은 누각이란 의미이고, 천불전의 천이라는 숫자 또한 다양한 중생의 근기에 맞추기 위해 허공의 꽃(空花)을 따라 시설(施設, 방편으로 가설된 가르침)된 것임을 볼 때, 벽화 속 여백은 이러한 허虛와 공空이란 전체적 테마와 내밀하게 조응하고 있는 셈이다. 『금강경』에선 형상이나 음성으로 부처를 구하는 일이 그릇된 도(邪道)라고 꾸짖고 있지만, 법화나 화엄과 같은 일승(一乘)의 도리에선 허虛에 기대지 않으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고, 공空이기에 형상 또한 방편의 가르침으로 펼쳐진다고 말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처님만 알 바이지 나의 경계는 아닌 것이다.  
    
천불전의 두 벽화는 공통적으로 한 그루의 소나무와 두 마리 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측 벽의 그림은 소나무 위에 앉은 학과 괴석 사이로 핀 화초를 향해 역동적으로 하강하는 학의 모습이, 좌측 벽에는 바위에 서서 대화하듯 머리를 마주하는 두 마리의 학이 그려져 있다. 학의 머리에 붉은 무늬가 있고 깃털이 흰 것으로 보아 단정학丹頂鶴이라 불리는 흰 두루미를 그린 것인데, 흥미롭게도 좌측 벽화 속 학 한 마리는 청색의 깃털을 지녔다. 동양에선 예부터 학이 천년을 사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겼는데, 실제 학의 수명은 80살 언저리로 당시 사람들보다 오래 살았기에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학이 천 년을 살면 깃털이 푸른빛으로 변한다고 믿어 청학靑鶴이라 불렀고, 이천 년을 살면 검은색으로 변한다고 해서 현학玄鶴이라 했다. 화사는 천불전 안에 천 년을 상징하는 학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청학까지 더함으로써 천千의 의미가 중중무진重重無盡인 세계를 펼쳐낸다.

사실 냉정한 눈으로 보면 벽화 속 학의 생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다. 학과 소나무는 보이는 것처럼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학은 추수를 마친 논이나 습지에서 서식할 뿐, 나무 위에 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동양화는 사실의 모사보다는 뜻이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을 우위에 둔다. 호작도虎鵲圖가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있는 실제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쁜 소식이 들려오길 바라는 기원이듯, 송학도 또한 하나의 기호처럼 정형화된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림에 속한다.

송학도가 그려지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장수長壽의 축원이다. 벽화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는 영원한 젊음을, 두 마리의 학은 부부의 원만한 해로, 소나무 위의 학은 장수를 상징한다. 이러한 기복적 그림이 전각의 중심벽화로 자리 잡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대흥사 천불전의 민중적인 성격을 짐작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진 : 최배문

아마 대다수의 한국인은 벽화 속의 학이 소나무 가지 위에 둥지를 튼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학은 멸종위기 1급 동물로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가 아니다보니 학이 소나무에 깃든 그림을 의심 없이 믿어왔기 때문이다. 예전 국어교과서에 실린 이범선의 「학 마을 사람들」이 대표적 사례인데, 소설이 아무리 허구의 이야기라지만 그의 소설에 나오는 학은 “마을 가운데 노송 위에 집을 틀”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겨울을 나고 시베리아로 떠나는 시기인 3월에 마을을 찾아오는 상상 속 동물이다. 작가의 안일함에서 비롯한 허황된 묘사는 공산주의자가 된 청년 바우가 마을의 상징인 학을 죽이고, 끝내 학이 살던 나무까지 불태우고 사라지는 결말로 이어진다.

하지만 당시 국정교과서에 이 글을 실었던 이들의 입장에선 있지도 않은 ‘학 나무’를 불태워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란 증오를 다져놓은 작가의 노련함이야말로 환幻으로써 중생의 환幻을 제거하는 보살의 선교 방편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비해 함께 교과서에 실렸던 황순원의 「학」은 학의 생태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없다. ‘삼팔선 완충지대’에 서식하는 학 떼를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고 섰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어릴 적 단짝 동무였던 성삼이와 덕재가 한국전쟁 속에서 서로 적이 되어버린 비극적 상황을 어루만지고 화해시키는 결정적 계기는 학이다. 절대선도 아니고 절대악이라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인간들이 시대와 연기적緣起的으로 얽혀나가는 이야기는 문학의 본령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고등학생 시절에도 나는 「학 마을 사람들」보다 「학」이 더 좋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돌아보니 나는 친구들과 성삼이와 덕재처럼 서로 아우르고 풀어주며 산 것이 아니라 덕이와 바우처럼 단절하고 불태우며 살아왔다. 때론 소소한 오해가 쌓여서, 때론 신념이 달라서 함께 할 수 없었다. 내 삶과 견주어 볼 때 「학 마을 사람들」이야말로 현실이었고, 「학」은 판타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천불전을 나와 두륜산의 봉우리들을 올려다본다. 그 사이로 대흥사 천불전을 참배하고 함께 산을 올랐던 얼굴들이 아스라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대흥사의 변화에 민감했던 이유는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그 풋풋한 마음들이 여기에서라도 보존되어 있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대흥사가 예전 그대로였다면 상심은 더 깊어졌으리라. 이제 나는 안다.

우체국에 간다고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없듯, 천년 학이 돌아오더라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순 없음을. 어디선가 날아오르지 못한 학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나는 하릴없이 주머니에서 오백 원 동전 하나를 꺼내 새겨진 학을 바라본다. 세파에 시달린 마음에 품을 수 있는 학이란 오직 이것뿐일까.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