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재 넘으며 부처님 불렀던 민초들의 삶이 담긴 마애불

[길 위의 마애불]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

2018-10-26     이성도
사진 : 최배문

충북은 바다가 없는 육지이면서도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충북은 국토의 중심으로서 삼국시대부터 세 나라의 각축장으로, 전략적 요충지가 많다. 괴산은 충북 가운데도 산이 많은 오지로 첩첩산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쪽으로는 속리산과 소백산맥이 뻗어나와 경북 문경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음성, 증평으로 작은 산들이 이어진다. 고려시대에는 진천군과 괴산군이 충북 내에서도 군사, 교통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괴산은 경상도의 관문인 문경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가 북진과 남진을 되풀이한 전략적 요충지다. 신라가 희망하던 한강 지역으로 가는 통로이며 또한 고구려나 백제가 영남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괴산과 문경을 통과해야 한다. 이 길은 조선시대 교통로 가운데 한양에서 동래로 이어지는 영남대로의 한 길목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꾸준하게 마애불이 조성되었다. 도내의 15기 중에 4기가 괴산에 있다. 길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교통로이지만 다르게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가 오가는 것이다. 삼국이 각축하는 것도 길을 확보하고 또 다른 문명이나 문화와 만나면서 외래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교섭과 교류를 만들어 내어 자국의 정치적 안정은 물론이거니와 문화를 풍요롭게 해 그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정치적 포석이기도 하다. 

지금은 대부분의 산악지역이 사통팔방 도로가 뚫려 고개를 넘는 자동차 통행은 보기 어렵지만, 과거 조선시대까지 고개를 넘는 여행은 다반사였다. 그것도 도보로 걷는 험난한 여정이다. 고개에는 도적이나 맹수가 있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새재(鳥嶺)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관문이다. 새도 넘기 어렵다는 험한 고갯길로 알려진 새재를 무사하게 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는 믿음과 안심이 절실하기에 절대자에게 의지하려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여행자는 성황당, 산신각, 사찰 등에서 칠성, 산신, 불・보살에게 안전과 행복 그리고 무사여행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영남대로의 주요 관문인 조령의 길목인 이곳 원풍리마애불도 여행자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였던 전형적인 길 위의 부처님이었다. 

사진 : 최배문

충북 괴산 연풍면 원풍리에 소재하는 이 마애불은 충주에서 연풍으로 가는 문경 새재를 넘는 길 옆 거대한 수직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높이 12m 암벽의 중간 위부분에 감실을 마련하면서 두 분의 부처님을 조각한 것이다. 감실 속 불상의 상호는 넓은 원형으로 뭉툭한 코에 평면의 얼굴이며, 반듯한 어깨, 과장된 팔, 평평한 가슴 등이 볼륨은 얇고 형태도 형식적인 표현이다. 얼굴부터 하반신으로 내려가면서 많은 훼손이 있지만, 전체적인 비례는 알아볼 수 있다. 앉은키는 짧으며, 무릎의 넓이나 높이 그리고 팔의 길이 등이 정상적 인체 비례에서 벗어나 있다. 어깨선은 각이 진 듯 딱딱한 편이다. 넓은 어깨에 비해 상반신이 짧으며 가부좌한 다리 또한 짧고 볼륨도 빈약하다. 반면 어깨와 양팔은 부풀려 있다. 이곳 불상은 씨름 선수마냥 다부지고 강건하게 보이는 남성상이다. 훼손이 심한 두 상의 팔의 자세는 상상이 되지만, 구체적인 발의 위치나 옷 주름은 알아보기 어렵다. 법의는 둔탁하고 도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마치 점토로 만든 형태가 외부에 노출되어 비바람에 심하게 풍화가 된 듯하다.

두 불상은 얼굴 중심으로 보면 닮은 듯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왼쪽상이 하악골이 넓으면서 얼굴이 평면적이고 육계 또한 낮아 보인다. 오른쪽상은 하악골이 각지면서 뺨의 볼륨이 부드러우며 육계는 솟아 전체적으로 타원형이다. 왼쪽상은 한 일 자 눈과 경직된 입술로 남성스러운 인상이라면, 오른쪽상은 둥근 얼굴에 통통한 뺨의 볼륨에 반달의 눈과 미소 짓는 입술 등으로 여성스러운 인상이다. 그래서 부부상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깨는 오히려 왼쪽상이 더 각지면서 매스mass가 강조되어 형태가 과장되면서 더 당당하기에 건강한 쌍둥이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수인手印은 현재의 불신의 윤곽선과 형태로 미루어 몇 가지 추측을 하는데 왼쪽상은 왼팔을 복부 가까이 단전에 내려놓고 오른팔은 ㄴ자로 꺾어 가슴 한가운데에서 올려 수인을 취하고, 오른쪽상은 U자형의 통견의 착의 방식과 팔의 옷 주름으로 미루어 선정인禪定印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수인을 추측한 것은 불상의 성격을 알기 위한 것으로 팔의 자세에 따라 옷 주름의 방향이 달라지기에 현재 남아있는 희미한 주름으로 그렇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의는 통견 방식의 무디고 둔탁한 각법刻法을 보이며 옷 주름 또한 도식적이다. 광배는 둥글며 위 끝이 올라간 원형으로 주변에는 5구의 화불이 있다. 표현은 저부조로 매우 얕다. 

양 불상의 가장자리 어깨 부근엔 보살상의 얼굴이 저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양 주존불에 비해 그 크기가 작다. 왼쪽은 어깨의 윤곽선도 보이는 반면 오른쪽은 얼굴만 보인다. 감실 속의 깊이가 머리 위쪽에는 1m 이상의 깊이를 가진 반면에 무릎 아래 결가부좌한 다리가 놓인 지점은 거의 깊이가 없다. 이곳의 거대한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려는 야심찬 계획과는 다르게 제작 과정에 화강암의 견고함에 막히어 감실을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부조의 높이도 얼굴 아래에는 저부조 방식으로 형식적으로 처리한 것이 아닌가 유추된다. 결과적으로 불신佛身 전체의 노출이 많아지면서 훼손이 심해졌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표현 방식은 화강암의 견고함과 열악한 제작 여건에서 조각가의 현실 타협과 안일함이 한 몫하였을 것이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다르게 유추해볼 수도 있다. 다른 마애불에서 볼 수 없는 표현적인 특징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표현기법 면에서도 한국 마애불에 없었던 것을 시도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오랜 시간동안 풍화가 지속되어 처음 만든 형태가 마멸돼 있는 현재 상황에서 유추하여 그 가능성을 검토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석조 위에 부분적으로 소조적인 표현을 가미했을 가능성이다. 거대한 바위에 매스 중심으로 거칠게 조각을 하고 그 위에 석회 같은 재료로 디테일detail을 섬세하게 소조로 작업하고 여기에 채색까지 하여 장엄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재 먹선과 채색의 흔적이 남아 있고 또한 불상 부분에 작은 구멍이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충분한 가능성을 가졌다고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석조 바탕의 매스에 소조 기법으로 마감하면서 채색까지 한 혼합 기법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감실 위쪽의 질서 있는 작은 구멍에 철심이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불 존상에 비바람을 피하고자 한 가설물이 설치되었을 것이라고 유추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불상이 독존이 아니면 삼존의 형식을 띠는데 비해 이 마애불은 암벽에 감실을 파고 좌상의 두 부처가 앉은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두 불상은 쌍둥이처럼 닮은 의좋은 형제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다. 
이불병좌상은 중국에서는 북위北魏 시대, 특히 5, 6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 조성 사례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이불병좌상으로 이 불상 외에는 전대전사傳大典寺 출토 금동이불병좌상이 있고, 벽화로는 통도사 영산전의 견보탑품변상見寶塔品變相 등이 있다. 이불병입상二佛竝立像은 청주 보살사 이불병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불이 있다. 또한 이불와상臥像으로는 화순 운주사 와불상이 부부처럼 누워있는 거대한 불상이 있다. 또 다른 이불병좌상은 경주 불국사 대웅전 구역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들 수 있다. 두 탑의 설화는 『묘법연화경』의 ‘견보탑품’에 나오는 석가여래상주설법상과 다보여래상주증명상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이불병좌상은 앞에서 언급한 『묘법연화경(法華經)』의 두 부처님을 상징한다.

이곳 마애불은 조선시대 탈춤놀이의 탈처럼 보이기도 한 얼굴로 지극히 서민적이고 해학적인 풍모를 가졌다. 둥글고 얇은 볼륨 속에 서툰 이목구비의 표현이 고요 속에 신성의 종교상이기보다 일상의 감정을 실은 이웃 노년의 한 부부상이나 의좋은 형제상을 보는 듯하다. 이곳 마애불상이 희귀한 이불병좌상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고려시대의 작품이면서도 고식古式을 남기고 있다. 오늘날에도 조령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애불상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새재를 향하는 많은 사람들은 마애불을 가슴에 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그리운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을 것이다.                                                           
 

이성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4회 개인전과 270여 회의 초대, 기획, 단체전에 출품하는 등의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국 마애불의 조형성』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현재는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