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강의실 357호] 불성佛性에 대한 새로운 이해

2018-10-01     홍창성

 

나는 학생들과 매시간 5분 정도 입정入定한 다음에 강의를 시작한다. 그러면 학기 중반을 넘어설 무렵 학생 몇몇이 명상의 교리적 근거에 대해 이렇게 질문하곤 한다.

“5분의 참선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집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도 종종 참선을 합니다. 그런데 참선이 깨달음과 열반에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마음이 한없이 맑아지면 깨닫게 되나요? 아니면 명상과 관련된 다른 근거가 있어서 깨닫는가요?”

구체적인 예로 문제에 접근하기 좋아하는 영미권英美圈 학생들을 위해 나는 선禪에서의 수행방법을 소개한다. 일본 조동종曹洞宗 선사들을 통해 소개되어 서구에서 인기 있는 묵조선黙照禪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잡념이 모두 떨어져 나가게 해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비추어 보아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불성佛性을 깨치면 깨닫는다고 한다. 한편 한국 불교의 간화선看話禪은 화두花頭를 잡아 그것을 마치 마음을 청소하는 세제처럼 사용해 마음속 모든 상념을 씻어 내어 어느 순간 웅크리고 있던 불성을 깨치면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투철하게 이해하려는 미국학생들은 또 반대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불성은 깨끗한 영혼 같은 것 같습니다. 참선수행을 통해 원래의 순수한 영혼을 되찾으면 기독교에서 구원받듯이 불교적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아도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불성이 영혼이나 아뜨만과 어떻게 다릅니까?”

이것은 선문禪門의 불성에 관한 견해가 붓다의 무아론無我論과 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느냐는 의문이다. 똑똑한 학생들이 제기할 수 있는 좋은 질문이다. 주지하듯이 불성 여래장 사상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선禪이야말로 이 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해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의 형태이다. 그래서 선禪이 현대적으로 해석되어 계속 진화하기를 희망하는 나는 그 목표를 위해 학생들과 함께 일단 불성 사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도한다.

불성 사상이란 모든 유정물有情物이 (혹자는 모든 무정물無情物까지도) 이미 근본적으로 깨쳐 있어서(本覺) 원래부터 붓다라는 주장이다. 이 사상에는 모든 유정물이 깨달아 붓다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으로부터 이미 모두 부처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기만 하면 성불成佛한다는 강한 주장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해석이 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공통된 주장은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한 본성本性으로서의 불성이 평등하게 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성사상이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에 그것을 그것이게끔 만들어 주는 아뜨만a-tman 또는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붓다의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과는 과연 양립가능한가(compatible)? 그럴 수 없는 것 같다.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서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붓다의 연기에 관한 가르침이 불교 교리의 근본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붓다의 연기론을 받아들이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다음과 같은 내 철학적 논증으로 불성(과 아뜨만 그리고 자성)의 존재가 반박된다고 생각한다.

 

불성이 존재한다면 불성은 조건에 의해 생멸生滅하거나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다.

(1)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면 불성의 존재는 조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無常한) 조건들에 의지하는 한 불성은 사물의 고정불변한 본성(本性 intrinsic nature)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하다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지 않았다면 그 불성은 스스로부터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성의 자기기원(self-origination)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불성은 자기기원 당시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2-1) 불성이 자기기원 당시 존재했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다시 솟아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2-2)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지 않았으면서 자기기원 당시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는 없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1) 과 (2) 에 의해 고정불변하며 상주常住하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의 논증에서 ‘불성’ 대신 ‘아뜨만’이나 ‘자성’을 대입하면 그것은 바로 아뜨만이나 자성의 존재를 반박하는 논증이 된다. 내 불교철학강의를 들은 미국 학생 가운데 아직 아무도 위의 논증에 이의를 제기한 녀석은 없다. 오히려 강력한 논증이라며 논증의 매력을 즐기는 녀석들이 여럿 있었다, 가끔 자기들이 믿는 영혼이나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같은 구조의 논증을 적용해 보면서. 

그런데 실은 나는 ‘불성’이라는 대단히 편리한 개념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겠다. 일상 언어에는 우리가 흔히 쓰기 때문에 마치 그 말의 대상이 세계에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어휘가 많다. 책상, 펜, 엔진, 날개 등 그것들이 수행하는 기능(function)에 의해 정의定義되는 사물들이 모두 그렇다. 예를 들어 엔진은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변환시켜 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라고 정의된다. 자동차 엔진은 휘발유를 연소시켜 나오는 화학에너지를 이용해 바퀴를 돌리는 운동에너지를 생산한다. 엔진의 모양은 다양하며, 그 재질이 반드시 금속일 필요 없이 원칙적으로 세라믹이나 돌 또는 플라스틱 같은 재료로도 엔진을 만들 수 있다. 어떤 물체가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변환시키기만 한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재질, 모양, 색깔, 크기 등에 상관없이 모두 엔진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책상, 펜, 날개 등에도 모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내 눈앞에 주차해 있는 이 자동차의 엔진, 한강 위에 떠 있는 저기 저 작은 보트의 선박용 엔진, 그리고 하늘을 나는 저 은빛 비행기의 엔진을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또 원칙적으로 만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엔진 그 자체와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어떤 구체적인 엔진이면 엔진이지 어떤 황당한 형이상학적 공간에 존재한다는 (플라톤이 말할 법한) 엔진의 형상形相 같은 것을 존재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펜, 날개, 선풍기, 냉장고 등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은 이 내 손안의 볼펜, 하늘을 나는 저 새의 날개,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도는 옆방의 선풍기, 그리고 우리 집 냉장고같이 구체적인 물체들이다.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의 펜 그 자체, 날개 그 자체,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선풍기의 형상, 냉장고의 본성 그 자체와 같은 추상적인 대상들은 우리 자연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단지 ‘펜’이라는 개념, ‘날개’라는 표현, ‘선풍기’라는 지시어, 그리고 ‘냉장고’라는 편리한 말에 불과할 뿐, 그것들이 가리키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대상들이 우리 세계에 존재한다고 보아 줄 이유가 없다. 

불성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불성도 이 세계 안에 형이상학적 존재인 추상적 대상으로 내재內在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비록 추상적인 엔진이나 날개는 존재하지 않지만 구체적인 개개의 엔진 장치나 각각의 날개들이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듯이, 만약 우리가 ‘불성’을 ‘어떤 한 유정물이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깨달음과 열반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몸과 마음의 특정한 상태’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나는 구체적인 존재자로서의 불성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그 근기根機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는데 적합한 심신心身의 상태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에서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깨달음을 위해 적절한 심신의 상태가 상이하게 결정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다양한 심신의 상태에 공통된 어떤 필연적 속성 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각각의 경우 주어진 유정물에 있어서 깨달음을 위해 적합한 구체적인 심신의 상태를 그때그때마다의 불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 그 다양한 펜들을 경우마다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펜’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듯이, 나는 우리가 각 유정물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깨달음과 열반을 위해 잘 맞는 (optimal) 심신의 상태를 그때그때 지시하기 위해 ‘불성’이라는 말과 개념을 얼마든지 써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불성은 모든 유정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을 가진 아뜨만과 같은 실체가 아니고 각 유정물마다 다르고 또 한 유정물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찰나마다 다른 심신의 적절한 상태를 말할 뿐이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