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개론 ]불교 흥기 전야의 사상계

바라문교와 사문

2018-10-01     장휘옥, 김사업

“아뜨만(=나의 본질)은 생하지도 늙지도 멸하지도 죽지도 않고 평안하다.”
 (『브리하드 아란야까 우빠니샤드』 4.4.25)

“본인의 마음을 의지처로 하는 모든 욕망이 방기될 때, 죽어야 할 자, 그는 불사不死를 얻고 이 세상에서 브라흐만(=우주의 최고원리)에 도달한다.”(同 4.4.7)

 

|    다종다양한 종교 지도자와 사상가들

모든 괴로움에서 초탈하고자 한밤중 남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출가의 길에 들어선 싯달타 태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참으로 다종다양한 종교 지도자와 사상가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지향하는 명상가, 제사 지상주의자, 쾌락주의자, 유물론자, 도덕부정론자, 회의론자, 고행론자…. 이들 사상가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국왕이나 도시인들의 초대에 응해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싯달타 태자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길을 택했을까? 그가 어떤 길을 걸었으며 불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알아보기 전에, 불교 흥기 전야의 사상계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 흥기 전야의 사상계는 복잡다단하기는 했지만 석가모니 당시를 기점으로 그것이 전통 사상인가 신흥 사상인가를 기준으로 분류하면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장구한 전통을 이어 온 정통 바라문교 사상이고, 또 하나는 이에 반기를 들고 새롭게 등장한 사문들의 사상이다.

바라문교는 오늘날의 힌두교의 모태가 된 종교로 불교가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바라문교에 토착 신앙이 결합된 것이 힌두교다. 불교 흥기 이전에 최고의 계급인 바라문婆羅門을 중심으로 베다 성전에 근거하여 발달해 온 종교를, 그 이후의 힌두교와 구별하여 통상 바라문교라고 부른다. 바라문교의 전통은 불교 흥기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고 힌두교에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 인도에서 사용되던 언어의 종류는 크게 산스끄리뜨와 쁘라끄리뜨라는 두 범주로 나뉜다. 산스끄리뜨는 세련된 문어文語인 반면, 쁘라끄리뜨는 속어이며 구어口語다. 인도에서 불교는 이 두 범주에 속하는 언어로 전승되어 왔다. 쁘라끄리뜨에 해당하는 언어에는 여럿 있는데, 불교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빨리어다.

‘사문沙門’에 해당하는 인도 원어는 산스끄리뜨로는 ‘쉬라마나śraman.a’이고 빨리어로는 ‘사마나saman.a’인데, ‘철저하게 정진하는 자’를 뜻한다. 학계에서는 이 당시 사문들을 ‘자유사상가’라 부른다. 당시 정통 바라문교의 주류는 가정을 가지고 혈통을 중시했지만, 사문들은 세속적 생활 일체를 버린 다양한 출신의 출가자였다. 불교 문헌은 이러한 사문들의 유파가 62종에 달했다고 하며, 자이나교에서는 363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불교도 이러한 사문의 종교에 속했으므로, 불교의 전통에서 사문은 스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하게 된다. 먼저 정통 바라문교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자.

 

|    인도・아리아인의 이주와 베다 성전

싯달타 태자가 태어나기 약 1,000년 전인 기원전 1,500년경, 서양인 혈통의 ‘인도・아리아’인들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 서북부의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강 유역의 펀잡 지방으로 이주해 왔다. 이에 앞서 이곳에는 세계 4대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을 일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 인도 남부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드라비다’인들의 조상으로 추정되며, 인도・아리아인들과는 달리 피부색이 검고 코가 낮았다. 

선주민先住民을 정복하여 펀잡 지방에 정착한 인도・아리아인들은 기원전 1,200년 무렵에 신神들에 대한 찬가를 집성한 『리그 베다(R.g-veda=리그 베다 삼히따)』를 편찬한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이며 최초의 베다 성전이기도 한 이 저작에서는 바라문・왕족・서민・노예로 이루어진 사성四姓계급의 근거와 우주 전개 원리의 맹아도 설해져 있다.

이후 기원전 500년경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방대한 베다 성전이 편찬되는데, 베다 성전에 언급되는 내용이 바로 바라문교의 사상이다.

기원전 500년 무렵부터 기원후 120년에 이르는 기간은 바라문교에 대항한 신흥 사문들이 크게 활약한 시대다. 특히 불교가 이 시대 종교・사상계의 주류를 형성했다. 바라문교는 이 시기에 인더스 문명을 꽃피운 선주민의 토착 신앙을 받아들여 힌두교로 변모해 간다. 힌두교 신자들은 현재도 바라문교의 베다 성전을 인간의 저작이 아니라 하늘에서 계시해 준 것으로 절대시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과 앞으로 언급할 내용을 합쳐서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BC 1,500년경 : 인도・아리아인의 펀잡 이주
BC 1,200년경~BC 500년경 : 『리그 베다』를 비롯한 베다 성전 편찬
BC 800년을 전후한 수백 년간 : 브라흐마나 문헌 편찬
BC 500년을 전후한 수백 년간 : 우빠니샤드 문헌 편찬
BC 6세기~5세기 : 석가모니 활동 시기
BC 500년경~AD 120년경 : 사문들의 활약. 불교가 주류. 바라문교가 힌두교로 변모해 감

‘베다veda’라는 말은 산스끄리뜨이며 ‘지식’ 특히 ‘신성한 종교적 지식’을 뜻한다. 또한 그러한 지식을 수록하고 있는 방대한 문헌들을 총칭하여 ‘베다’라 부르기도 한다. 베다에는 『리그 베다』・『사마 베다』・『야주르 베다』・『아타르와 베다』의 4종이 있다. 이들 4종 베다의 구분은 신들에 대한 제사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 제관祭官에 속하느냐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면, 신들을 제사장으로 초빙하여 찬송을 읊는 호뜨리hotr. 제관에 속하는 것이 『리그 베다』다. 

또 이 4종의 베다 각각은  ‘삼히따’・‘브라흐마나’・‘아란야까’・‘우빠니샤드’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삼히따가 중심이 되며, 나머지 셋은 삼히따에 대한 주석 내지 부속 문헌으로 후대로 가면서 점차 성립하는 방대한 문헌들이다. ‘베다 성전’이라 할 때는 이 네 부분을 통틀어 말한다. 

‘삼히따(Sam.hitā, 本集)’는 각 제관이 읊는 만뜨라mantra, 즉 찬가와 주문 등을 집성해 놓은 것이다. 위에서 말한 호뜨리 제관이 읊는 만뜨라를 집성해 놓은 것이 『리그 베다 삼히타』인데, 이것을 일반적으로는 ‘삼히따’를 생략하고 그냥 『리그 베다』라고 부른다. 나머지 3종의 ‘삼히따’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사마 베다 삼히따』를 그냥 『사마 베다』라고 부르는 식이다. 최초의 베다 성전이라 한 『리그 베다』는 정확히 말하면 『리그 베다 삼히타』를 가리킨다.

‘브라흐마나(Brāhman.a, 梵書 또는 祭儀書)’는 4종의 ‘삼히따’에 실린 찬가나 주문 등에 대해 신학적 설명을 행하고 제사 방법을 규정한 저작들을 총칭하여 부르는 용어다. 이 브라흐마나 문헌들은 기원전 800년을 중심으로 전후 수백 년간에 걸쳐 출현한 것으로 추정한다.

브라흐마나 문헌의 특색은, 종전과는 달리 신神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세계관의 중심에 둔다는 것이다. 제사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신들을 제어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신조차도 제사를 행해야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역설한다. 제사를 집행하는 바라문들은 이제 신들에 봉사하는 경건한 사제가 아니라 제사의 힘에 의해 신들을 지배하는 자가 된 것이다. 

『샤따빠타 브라흐마나』는 “학식 있고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은 인간이라는 신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제사 만능주의의 풍조에서 『리그 베다』 이래의 신들은 숭배는 받고 있었지만 그 위신은 저하되었다.
‘아란야까(Āran.yaka, 森林書)’는 브라흐마나 문헌의 뒤를 이어 출현한 문헌들로, 깊은 숲속에서 전수되는 비밀스런 가르침을 수록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제사에 대한 설명 외에 만물의 원리에 관한 철학적 문제도 다룬다.

성립 시기로 볼 때 가장 늦게 출현하는 것이 ‘우빠니샤드(Upanis.ad, 奧義書)’라 총칭되는 문헌들이다. 우빠니샤드라는 말의 의미는 통상 ‘스승에게서 비밀스럽게 전수받은 깊은 뜻’이라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500년을 중심으로 그 전후 합쳐 수백 년에 걸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빠니샤드를 ‘베단따Vedānta’라고도 부른다. 베단따는 ‘베다veda’와 ‘안따anta’가 합쳐진 말인데, ‘안따’는 ‘끝’을 뜻한다. 따라서 베단따는 ‘베다 성전의 최종 부분’이라는 의미이고, 이것은 우빠니샤드의 성립이 베다 성전 가운데 가장 늦었음을 나타낸다.

후대에는 베단따가 ‘베다 성전의 극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빠니샤드가 베다 성전, 곧 바라문교 사상의 백미라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우빠니샤드 시대에 이르면 그동안 서서히 전개되어 온 사상적 고찰이 점차 제사에서 독립하여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게 된다. 번영과 복을 가져다준다는 제사의 실행보다도 해탈로 인도하는 예지의 눈이 훨씬 더 중요함을 알게 된 것이다.

바라문교 사상이 가장 완성된 형태로 설해져 있는 것이 우빠니샤드이고, 더구나 그 초기의 저작은 석가모니 이전에 이미 성립해 있었다. 따라서 초기 우빠니샤드를 통해 싯달타 태자의 눈에 비친 바라문교의 사상과 수행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면, 불교와 바라문교의 차이점도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초기 우빠니샤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업에 의한 윤회와 범아일여의 자각에 의한 해탈-바라문교의 윤회와 해탈 사상

바라문교의 성직자인 바라문들의 주류는 여전히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 초기 우빠니샤드의 철인들은 세속적 삶을 버리고 출가하여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고자 했다. 이 체험들이 우빠니샤드에 반영되어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우빠니샤드 문헌에서 비로소 업・윤회・해탈에 대한 개념이 명확한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빠니샤드의 철인들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는 그에 합당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힘을 남기고 이 힘은 존속된다고 생각했다. 우빠니샤드에서 ‘업(karman, 業)’이라는 용어는 주로 행위의 결과로 남게 되는 이 힘을 지칭한다.

우빠니샤드 시대에 이르면, 이 업에 의해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가 있게 되며, 윤회의 와중에서 다음 생에 어떤 몸을 받을까도 이전 생에서의 업이 선이냐 악이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통찰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윤회는 고통이며, 이 속박에서의 해방인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통찰도 이루어지고 있다.

우빠니샤드에서 정립된 ‘업에 의한 윤회와 그로부터의 해탈’이라는 통찰은 이후의 불교나 자이나교, 힌두교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업에 의해 어떤 원리로 윤회와 해탈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각 종교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업에 의한 윤회와 그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대전제는 공유하고 있었다.
초기 우빠니샤드는 윤회와 해탈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초기 우빠니샤드의 아뜨만(ātman, 我)에 대한 이해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학계에서는 아뜨만을 ‘자기의 본질’ ‘영혼’에 해당한다고 본다. 아뜨만에 대한 한자 번역어가 ‘아我’다.

최초기 우빠니샤드인 『브리하드 아란야까 우빠니샤드』와 『찬도기야 우빠니샤드』에 산재해 있는 아뜨만에 대한 설명을 요약・정리하면 이렇다.

아뜨만은 말이 없고 초연하며 심장의 내부에 있다. 아뜨만은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고 영원하다. 속박되거나 훼손되는 일도 없으며 평안하다. 감각과 생각으로는 알 수 없고, 말로 규정할 수도 없다. 단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neti neti)’는 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행동도 본인의 아뜨만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 아뜨만이 나의 본질인 것이다.

또한 아뜨만은 인식되지 않는 인식의 주체요, 생각의 주체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을 때나 숨 쉬고 말하고 있을 때도, 그 배후에 있으면서 그것을 성립시키고 있는 당체이며, 그 기능의 내부에서 그것을 제어하는 내제자內制者인 것이다. 

이렇게 아뜨만은 인식을 포함한 모든 행위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한 과보도 맡게 된다. 행위가 남기는, 합당한 과보를 초래하는 힘인 업을 내세에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도 아뜨만인 것이다. 따라서 바라문교에서 윤회의 주체는 아뜨만이다. 

그러면 윤회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까? 사후에 육체는 소멸하지만 나의 아뜨만은 소멸되지 않는다. 임종이 다가왔을 때 아뜨만은 신체에서 빠져나간다. 이때 지금까지 행한 행위의 결과인 업도 아뜨만에 부착되어 아뜨만의 뒤를 따른다. 마치 수를 놓는 여인이 다 놓아진 수를 풀어 새로운 모양의 수를 놓듯이, 아뜨만은 부착된 업에 따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모습의 몸을 취한다. 이 새 몸이 다하면 아뜨만은 다시 그 몸을 빠져나와 직전까지 쌓은 업에 합당한 몸을 새로이 취한다. 이런 식으로 윤회는 지속된다.
윤회의 종식인 해탈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뜨만을 직관하여 ‘우주의 최고원리’이자 ‘최고실재’인 브라흐만(brahman, 梵) 그 자체가 되면 된다. 원래부터 브라흐만(梵)과 아뜨만(我)은 동일한 것이었다.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브리하드 아란야까 우빠니샤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태초에 이 세상은 실로 ‘브라흐만’만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자각했다. 그 결과 그것은 일체(=우주의 모든 것)가 되었다. 신들 중에 이 브라흐만을 자각한 자는 누구라도 일체가 되었다. 이것은 성선(聖仙, r.s.i, 신비적 영감으로 베다 성전을 감득感得한 성자)에게도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현재도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아는 자는 이 세상의 일체가 된다. (1.4.10)

내가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자각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우주의 최고원리에 합일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나의 아뜨만의 진상을 자각할 때 이루어진다. 이것은 곧 우주의 최고원리인 브라흐만(梵)과 개체로서의 자기 본질인 아뜨만(我)과의 일체성(一如)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때 ‘나’는 더 이상 숱하게 많은 다른 ‘나’, 즉 타인과 구별된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우주의 일체가 된다. 윤회의 사슬이 끊기는 것은 바로 그때다.

이 글 초두의 인용문은 모든 욕망이 방기될 때, 죽어야 할 자가 불사不死를 얻고 브라흐만에 도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해탈을 방해하는 것은 욕망이다. 사람들은 욕망에 따라 의도하고, 의도한 그대로 행동하며, 행동한 대로 과보를 받으면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를 지속한다.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버리고 명상에 의해 정신을 통일하여 아뜨만의 본질에 전념하는 자는 아뜨만의 진상을 직관한다. 아뜨만이 곧 브라흐만이라는 범아일여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때 그의 아뜨만은 일체의 부착물 없이 홀로 몸을 빠져나와 브라흐만 그 자체가 된다. 그 몸은 개밋둑 위에 버려진 뱀의 허물처럼 생명 없이 눕혀지고, 이때의 몸을 갖지 않는 불사不死의 아뜨만이 바로 브라흐만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이 해탈이며, 이제 다시 윤회하는 일은 없다. 우빠니샤드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이 해탈에 있다.

웃달라까 아루니는 석가모니 이전 시대에 살았던, 당대를 대표하는 우빠니샤드 철인이다. 그와 아들 간의 대화가 『찬도기야 우빠니샤드』에 실려 있다. 아들은 다른 스승 아래에서 베다 학습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 웃달라까는 그가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웃달라까는 아들에게 냐그로다 나무 열매를 가져와 쪼개게 한 다음, 그 속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조그마한 씨들이 꽉 차 있습니다.” 그 씨앗 하나를 다시 쪼개게 한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고 재차 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웃달라까가 말했다. “너에게 보이지 않는 이 미세한 것에서 이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미세한 것,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을 본질로 하고 있다. 그것은 아뜨만이다.”

사문의 사상은 다음 호로 넘긴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