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마애불] 홍성 용봉사마애불입상과 신경리마애석불입상

홍성 용봉산에서 내포신도시를 굽어보는 두 마애불을 만나다

2018-09-28     이성도
사진 : 최배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가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했는데,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일컬어 내포라고 한다. 예산, 당진, 서산, 홍성 등이다. 이곳은 구릉 같은 야산과 함께 평평하고 넓으면서 기름진 땅과, 소금과 물고기가 많아 대를 이어서 사는 사대부들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가깝고 풍토와 지리적 조건이 좋아 재경在京의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았다. 당시에는 홍주목이 지역의 중심이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항만과 산업이 발달한 당진과 서산이 부상했다. 또한 충남 행정 중심의 내포 신도시 조성, 장항선 복선 전철화 및 서해선과 익산문산고속도로 등 주변 발달이 기대되는 곳이다.

홍성 용봉산은 381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비산비야인 내포일대의 우뚝한 홍성의 진산이다. 내포 신도시를 굽어보는 용봉산은 용의 몸체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 형상이다. 용봉산 정상에서 굽어보면 내포 신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충남 도청을 비롯한 주요 기관들이 발아래에 있다. 이제 용봉산은 내포 신도시의 진산이다. 용봉산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소나무와 어우러져 암산의 기품을 드러내고, 용봉사는 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홍성용봉사마애불입상은 일주문 왼편 위쪽 바위 면에 돋을새김으로 만든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실제 인체보다 조금 큰 마애불은 큰 절벽의 바위 면이 세모꼴로 떨어져 나간 곳에 감실형으로 쪼아 양각으로 새긴 불상이다. 230cm(현재의 높이 210cm)의 불상은 머리 부분을 고부조로 표현하고 하체로 내려갈수록 저부조로 표현하고 있다. 

머리 정상부는 육계가 펑퍼짐하게 낮으며 육계와 머리는 선으로 구별 짓고 있을 뿐, 나발이 없는 맨머리(素髮)다. 목은 짧고 세 줄의 삼도三途가 있다. 불두가 큰 데 비하여 어깨, 팔, 다리의 비례에서 자연스러움을 잃어 불신이 평면적이면서 경직되어 보인다. 전체적으로 대장부의 균형 잡힌 건장한 몸매가 아닌 어린이나 노인처럼 유약해 보이면서 천진스럽다.

얼굴은 불신에 비해 긴 타원형으로 크고, 어깨는 빈약하며 손은 유난히 작다. 이마는 좁고 눈썹은 타원형으로 반달모양이며 코는 가늘고 오뚝하다. 귀는 길게 형식화된 표현을 하고 있으며 눈은 가는 실눈으로 표현했으며, 입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근육(口輪筋)이 평평하고 볼이 아래로 처지면서 빙그레 미소 띤 할머니의 얼굴처럼 친절하고 자비로운 표정이다. 입 좌우가 움푹 들어가 수줍게 웃는 모습은 노인의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다. 작은 입가의 미소와 함께 가는 눈이 만들어 짓는 눈웃음은 고졸하고 소박한 얼굴로 자연스럽다. 귀는 길어서 어깨 가까이까지 길게 표현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수직으로 단층 진 암석으로 된 문 사이에 서 있는 붓다를 뵈는 듯하다.

불신은 평평하고 납작한 타원형으로 신체의 굴곡을 느끼기가 어렵다. 법의는 양어깨를 걸치는 통견通肩 방식이다. 가슴의 옷깃이 불분명하지만, 목 주위로 돌고 있어서 굽타 불상 착의법과 유사하며 매우 도식적이고 얕아 더욱 평면적으로 보인다.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붙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두 손이 몸에 비해 현저하게 작다. 불상의 손가짐(手印)으로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법의를 잡고, 왼손은 어깨까지 올렸으나 손의 훼손으로 구체적인 수인은 알 수 없다. 

사실적인 인체 표현은 얼굴에 치중하고 하반신으로 내려갈수록 바위 자체에 묻혀가면서 평면화된다. 발의 표현은 별석의 연꽃무늬 대좌에 두 발을 조각했으나, 근래에 만든 공양석에 가려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 없다. 광배는 바위를 파면서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주위를 깊게 새겨 광배모양이나 불신과의 거리가 별로 없어 광배답지 않다. 머리 위에서부터 바위 면이 삼각형으로 떨어져 나간 채 그대로 방치되어 불상이 바위에서 출현한 듯하면서, 또 다르게는 바위에 갇혀 있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탄력을 잃고 기운마저 빠져 버린 평면화된 불신과 함께 8세기가 끝나는 쇠퇴기의 무기력함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 : 최배문

이 불상의 오른쪽 어깨 옆의 바위에는 3행 31자 명문이 있다. “貞元十五年 己卯四月日 仁府 O佛願大伯士元鳥法師 O香徒官人長珍大舍” 즉 신라 후기인 소성왕 1년(799) 4월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각가(元鳥法師), 발원자(長. 大舍) 등도 있어서 통일신라 하대 불상연구의 한 기준 작품이 된다. 이곳 마애불은 8세기의 이상적 사실주의가 엿보이면서도 9세기 불상 양식의 특징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어 9세기 불상 양식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다. 이 불상은 양식적으로는 통일되지 않은 일면이 있다. 고려 조각 양식과 상통하는 점도 있고, 자연스러운 신라식 수법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당시 지방 양식이 강하게 나타난 통일신라 불상으로 판단된다. 

홍성신경리마애석불입상은 용봉사 지장전에서 약 200m 올라가면 용봉산 정상 가까이 우뚝 솟은 큰 바위(노각시바위)에 새겨진 4m 크기의 고려 초기 마애불이다. 마애불 앞에는 넓은 시야를 확보한 터가 있는데, 이 넓은 터는 옛 용봉사 가람 터로 보인다. 주변의 산세들이 옹위하고 산의 기운이 모이는 이곳에 마애불을 주불로 모시고 수행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산 아래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내포 신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석불입상은 큰 바위 면을 타원형으로 깊게 파고들면서 얼굴은 고부조로 환조에 가깝게 조각하고, 어깨에서부터 불신을 점점 얕게 조각했다. 몸 전체가 약간 S자형으로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나 얼굴과 같은 양감을 가지지 않아 신체의 자연스러운 동세와 균형을 잘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비만한 큰 두상에 통견 방식의 법의가 어깨와 가슴까지는 볼륨과 신체의 굴곡을 그럭저럭 그려내고 있지만, 가슴 아래로는 매우 평면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발은 연화좌 위에 돋을새김의 별석으로 조각했지만 매우 투박하다.

머리는 민머리인 소발이며 육계가 반구에 가까운 큰 편이다. 긴 타원형의 풍만한 얼굴은 이목구비의 비례가 적절하며 덕스럽고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잔잔한 미소가 흘러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은 거의 없으며 삼도三道를 가슴에 표현했다. 따라서 가슴을 포함한 상반신의 길이가 짧게 보인다. 얼굴이 큰 편인데 볼륨마저 풍성하니 실제 비례보다 위축되어 5등신이 채 안되어 보인다. 얼굴 중심의 조각은 불신이나 법의의 표현에서 더욱 평면적이고 경직되어 보인다. 

또한 골반의 폭을 포함한 허벅지나 종아리도 빈약하다. 손가짐은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대퇴 부분에서 자연스레 붙인, 소원을 들어주는 여원인與願印의 변형으로 보이고, 왼손은 가슴에 올려 손바닥을 보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다. 광배는 큰 타원 모양의 보주형이고, 파낸 바위 면을 이용해 약한 음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의 윤곽선만 나타내었는데 언뜻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법의의 옷 주름은 가슴 아래로 갈수록 점점 선으로 도식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통견 방식으로 착의한 법의는 가슴에서는 선이 굵은 옷 주름을 만들다가 목 아래에서 큰 U자형의 포물선으로 형식화되어 내려오면서 점점 가는 음각선으로 약화된다. 목 밑에서는 굵직한 몇 가닥의 선으로 표현되었고, 아래쪽은 가느다란 음각선으로 도식화 됐다. 옷 주름은 복부 아래에서 양다리로 나누어져 무릎 아래에서 큰 V자로 모아지는데 자연스럽지 않다. 전체적인 법의나 옷 주름 표현은 간략하고 도식화되어 일정한 질서와 적절한 균형, 세련되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갖지 못한다. 

사진 : 최배문

이렇게 세련되고 양식화되지 못한 미숙한 조형 수법은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경리마애석불입상은 전체적으로 평면화된 불신과 불신에 비해 커진 얼굴은 부드러운 듯하지만, 8세기의 고전주의 이상미를 추구하던 통일신라불상의 관념화되고 형식화된 쓸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주문 근처 통일신라 후기의 용봉사마애불입상과 산정 가까이 고려 초기의 신경리마애불입상은 얼굴이 크고, 신체를 왜소하고 평면적으로 표현했다. 어쩌면 상반신 아래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얼굴 중심의 표현을 하고 있다. 오늘날의 균형 있는 몸매를 강조하는 미적 감각과는 사뭇 다르다. 두 불상은 신체의 자연스런 굴곡의 볼륨을 드러내지 못하고 빈약하면서도 균형 잃은 모습과 별석의 연화좌에 두 발을 조각하고 있는 모습 등에서 서로 닮아 있다. 두 불상을 만든 조각가는 시대를 달리하지만 그들의 미적 감각과 표현 방법에는 공통성을 간직하고 있어 미소 짓게 만든다. 마치 한곳에 오랫동안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질과 심성이 닮듯이. 아마도 노각시바위의 불상을 만든 이는 서로 보고 또 보면서 만들지 않았을까? 

삼복더위가 치성한 보름 가까운 날 오후 내내 용봉산과 펼쳐진 내포의 자연 경관을 조망하면서 답사를 했다. 마애불 앞을 서성거리며,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 달빛 아래 고요하게 비치는 마애불은 바위와 자연과 하나 되는 모습이었다. 천지신명과 부처님 앞에서 촛불을 밝히면서 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달만큼 나의 소망도 들어주십사하고 기도했던 수많은 할머니, 어머니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고, 거기에 부는 한줄기 청량한 바람은 한여름의 기원이 된다.                          

이성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4회 개인전과 270여 회의 초대, 기획, 단체전에 출품하는 등의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국 마애불의 조형성』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현재는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