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강의실 357호] 미국 대학생들이 보는 불교의 문제

2018-09-03     홍창성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학기마다 강의의 약 2/3 정도를 마쳤을 때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학생들에게 불교에 대해 가진 의문점이나 비판할 것들을 솔직히 말해 보라고 부탁했다. 그동안 강의교재를 읽으며 좋은 점은 지루할 정도로(?) 충분히 논의했으니 이제 좀 솔직히 흉도 보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그래야 모두가 불교에 대해 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래야 불교공부가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코멘트를 유도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먼저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 정이Cheng Yi가 거의 천 년 전에 불교에 흠집을 내려고 쓴 글을 보여주었다.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다. 그런데 불교도들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이야기한다. 사람의 일이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그런데 불교도들은 분명한 것이 아니라 감춰진 것을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불교도들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 대해 거론한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은 일상(평상, 평범)의 도道인데, 불교도들은 일상이 아니라 굉장한 것을 말한다. 일상을 일상이게끔 하는 것은 원리(理)인데, 불교도들은 원리가 아니라 환상을 논한다. 우리는 출생과 사망 사이의 시간에, 즉 삶에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데 불교도들은 현생이 아니라 전생과 내생을 이야기한다. 보고 들음, 생각과 토론이 제대로 된 증빙證憑들인데, 불교도들은 이들을 참되다고 간주하지 않고 눈과 귀를 통해 얻을 수 없고 생각과 토론이 닿을 수 없는 것들을 말한다.” (한문 텍스트를 구하지 못해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느라고 어색한 곳이 많아졌다.)

중국에도 이렇게 오래전부터 불교에 대해 참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논의가 있었다는 점을 소개하면서 내 미국 학생들도 한번 불교의 문제점을 논의해 보자고 제안했다. 꽤 여러 코멘트를 받았는데, 네팔과 몽골 그리고 일본에서 유학 온 너무 공손한 학생들은 한 마디도 안하고 비판적이고 공격적이며 도전하기 좋아하는 (그래서 가르치기 신나는) 미국 학생들이 여러 문제를 지적해 주었다. 

이때 나는 학생들이 제기하는 비판에 대해 그 자리에서 반박하려 하지 않고, ‘고맙다’고 말하며 열심히 받아 적기만 한다. 내가 20여 년 전 대학원생 시절 당시 심리형이상학 분야 세계 최고 권위자였던 내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배운 지혜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비판적 논점을 제기해 올 때 그 자리에서 지지 않겠다고 싸우려 하면 안 되고, 그것을 겸허히 그리고 감사히 받아들이고 나중에 논문에서 그것을 다루며 긍정적인 논의의 자료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학생들의 논점을 하나하나 반박해 불교를 옹호하려 하지 않고, 그 대신 고맙다고 하면서 그들의 코멘트가 내 공부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며, 또 한국의 불자들에게도 전하겠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 학생들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더 잘하고 수업이 끝나면 밝은 표정으로 강의실을 나선다. 두 학기 동안 제기된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1) 왜 쇳덩어리 불상에다 그렇게 절을 하는가. 혹시 절하는 행위에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있더라도, 굳이 우상숭배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2) 불교는 너무 허무주의적인 것 같다. 삶이 고해苦海이고 모든 것이 환상이며 또한 공(空 empty)하다고 하는데, 왜 삶과 세계를 꼭 이렇게 염세주의적(pessimistic)으로만 보아야 하는가? 반쯤 빈 술병을 보고 “아, 벌써 술이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와, 술이 아직도 반병이나 남아 있구나!”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좋지 않은가.

(3) 굳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깨닫고 열반에 들어 고뇌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고통을 제거하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기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낫지 않은가? 또 좀 즐기며 사는 것이 뭐가 그리 문제인가?

(4) (술과 고기를 탐닉하는 좀 사이코 같은 티베트 출신 승려와의 경험이 많은 미국 학생 왈曰) 스님들의 재가자에 대한 학대(abuse)가 무척 심각하다. 스님들이 불교의 가르침과 너무 다르게 행동한다. 불자들이 신심信心으로 한다는 수행과정에서 (티베트) 스님들은 너무도 많은 권위와 특권을 가지고 있다. 스님들은 직업이 없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왜 직장생활하며 고달픈 재가자들이 불자의 길을 걷기 위해 스님들에게 가서 의지해야 하는가.

(5) 스님들은 비폭력을 주장한다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은 어떠한 험한 일도 안 하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쓰게 하는 이기주의자들이 아닌가.

(6)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은데, 나중에 발전된 여러 불교학파의 이론은 지나치게 복잡하다. 이론 자체가 복잡할 뿐더러 학파마다 주장하는 바가 정반대인 경우도 많다. 혼란스럽다.

(7) 업業과 윤회 같은 이야기는 정말 믿을 수가 없다. 또 화엄의 상즉상입相卽相入 등 법계연기설과 관련된 주장들은 황당하다. 너무 나갔다.

(8)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했고, 이것은 서양철학에서 불변의 진리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나(self)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이 옳을 수 있는가?

(9) 불교는 중요한 문제들에 직접 답을 안 하고 질문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깨달아 열반에 들어 윤회에서 벗어난 사람이 존재하는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물음에 성실하게 답변하지 않고, 그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지적知的으로 올바르고 성실한 태도인가?

내 미국 학생들이 제기한 위와 같은 문제점들에 대해 우리 불자들은 어떻게 답하면 좋을까? 이 질문들 가운데 반 정도는 내 강의를 적극적으로 들은 미국 학생이라면 스스로 답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불교 입장에서 답변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학생들이 불교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불교의 입장을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1)에서 우상숭배 문제와 관련해 스스로를 내려놓고 하심下心을 가지기 위해 절을 한다고 이야기해주면, 하심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왜 꼭 우상에다 절하는 것이어야 하느냐고 반문反問한다. 또 불자들이 깨달아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 그런 쇳덩어리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니까 불상이 우상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지 않느냐고 해도, 수천 년 동안 우상숭배를 절대죄악시 해 온 서양종교의 입장에서는 불상의 존재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한편, 절집에서는 스님에게 삼배三拜를 올려야 한다고 알려주면 거의 모든 미국학생은 그 큰 눈들을 더 크게 뜨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2)와 (3)과 관련해, 피상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불교의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인 모습은 만사萬事를 긍정적으로 보고 처리하기를 선호하는 미국인에게는 꽤 거부감을 느끼게 하나 보다. 또 (4)와 (5)에 대해서는, 미국은 불교의 역사가 짧고 그 영향력 또한 미미하다보니 미국학생은 스님에 대한 관성적인 존경심도 없어서 스님이라고 해서 그들의 비판적인 눈길에 예외가 되지 못한다. 한편, (6)과 관련해서, 거의 모든 중요한 이야기가 성경 한 권에 모여 있는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는 방대한 분량의 대장경의 존재가 증언해 주듯이 경전이 수없이 많고 또 경전마다 내용이 다르다. 이렇다보니 불교에 처음 입문한 사람이 혼란에 빠지지 않기 어렵다. (7), (8), 그리고 (9)와 관련된 논의는 좀 더 이론적인 문제여서, 나같이 연구하며 글을 쓰는 사람들이 더 노력해서 풀어야 할 과제이다. 

위에서 미국학생들이 지적한 모든 문제는 실은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한국인들도 동일하게 문제 삼을 수 있는 것들이다. 한국에서 불교는 개신교로부터 우상숭배라는 소리를 오랫동안 들어 왔다. 불교가 허무주의이고 염세적이라는 비판도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곳저곳에서 접해 보았음직도 하다. 스님에 대한 존경심의 결여도 점점 더 문제가 되고 있고, 초심자初心者가 불교공부 시작하기 어렵다는 불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문제가 오랫동안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구체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가시적으로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월간 「불광」의 독자들과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