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살행론] 선정바라밀

나와 남이 같다는 평등성을 알아차리게 하는 선정바라밀

2018-08-28     재마 스님
그림 : 재마 스님


나와 남이 같다는 평등성을 명상해야 하나니 누구든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같으므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듯 남들을 보호해야 하리라.(90) 그러므로 나는 남들의 고통을 없애야 하리니 그것은 나 자신의 고통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며, 나는 남들에게 행복을 주어야 하리니 그들도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네. 나와 남이 모두 행복을 바란다는 점에서 같은데 우리들을 차별할 무슨 차이가 있다고 나는 나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가? 나와 남이 모두 불행을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같은데 우리들을 차별할 무슨 차이가 있다고 나는 나만을 보호해야 하는가? 고통을 겪는 본인이 자신의 고통을 막아야 한다면 발의 고통은 손의 고통이 아닌데 어째서 손이 그것을 막아야 하는가.(94~99)
  

오늘의 문聞수행의 말씀은 초기불교에서 자비를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경지인 무상ㆍ고ㆍ무아의 시선에서는 너와 내가 분리되지 않은 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벗어난 승의勝義의 삶이기 때문에 붓다와 샨티데바 스님과 수많은 성인들은 돕는다는 상이 없이 자비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범부들, 온전한 불성을 자각하고 실현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나와 너를 분리하며,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샨티데바 스님은 제8 선정바라밀장에서 끊임없이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인 욕망의 부당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흔히 선정은 마음을 고요히 멈추어 기쁨과 고요함에 머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온하고 고요함만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선정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붓다께서는 선정주의의 위험을 벗어나서 지혜와 통찰을 위한 분석을 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지혜와 통찰의 분석은 자비로 드러남을 당신 삶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샨티데바 스님께서도 우리 수행을 보리심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보리심은 일체 존재들의 완전한 행복인 열반(깨달음)을 위해 내가 깨닫겠다는 발심입니다. 보리심은 또 다른 욕망인 선정주의의 치유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선정바라밀로 지혜와 통찰, 자비를 달성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보리심에 의지하여 마음을 길들이고 선정을 얻기 위해 정진(38)’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욕망은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자아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정을 통해 잘못된 자아 개념을 사유하고, 무아에 대한 바른 진리를 깨닫는 세계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나와 남이 같다는 평등성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샨티데바 스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같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감정을 느낍니다. 우울함, 외로움, 분노, 슬픔, 두려움, 위축감, 소외감, 결핍감 등으로 견뎌내기 힘든 괴로움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분 좋거나 기쁜 일은 상쾌하고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자각합니다. 이들을 미세하거나 둔감하게 알아차리는가 하는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서는 일치합니다. 인간은 행복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 명성과 부를 원하고, 칭찬과 인정을 갈구하고, 건강과 장수를 원하는 면에서 평등합니다.

이 평등함을 조금 다른 시각, 몸이라는 관점으로 한 번 바라볼까요?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4대 요소를 닮는 수행을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몸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기 위해 몸 관찰수행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이 몸 관찰수행을 통해 무상ㆍ고ㆍ무아의 이치와 연기적인 존재에 대한 지혜에 도달하라고 하십니다. 몸 관찰수행을 통해 너와 내가 각각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것, 생명 공동체의 일원이자 하나라는 사실을 깨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작고 한정된 개아라는 좁은 인식사고 체계는 관계적ㆍ연기적 자아에서 마침내 무아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성요소인 4대는 땅, 물, 온도, 바람의 요소입니다. 땅은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물질입니다. 지구 깊은 곳, 높은 열에 의해 녹아 있는 마그마가 지구 속에서 돌며, 뿌리가 미립자를 빨아들일 때 흙은 달의 인력에 따라 움직인다고 합니다. 화산이 폭발하며 지표면을 뚫고 나온 식은 고체로 변한 것이 다양한 돌이 되고, 거기서 떨어진 돌가루들은 재가 되죠. 흙에 대한 사유는 지구 표면과 땅속에 있는 흙과 달과 우리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유체계가 가능하도록 지혜를 깨웁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들이마시고 섞어서 내뱉는 재와 먼지도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지탱하는 뼈와 관절 등 딱딱한 부분은 모두 땅의 요소입니다. 그리고 흙으로 된 우리 몸의 세포는 7년에 한 번 갈아주면서 우리 몸속을 흐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지구에서 살아가는 이상 저와 여러분은 흙과 땅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입니다.

물은 어떨까요? 우리들의 몸은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혈액과 림프액, 점액과 땀, 눈물 등은 달의 인력에 의해 출렁이는 바다의 조수와 같은 물입니다. 몸 안에 있는 정맥과 모세혈관을 따라 흐르면서 영양분을 주고 깨끗하게 씻어주는 이 액체들은 땅을 적셔주고 윤택하게 하는 비와 강과 시냇물들과 같은 수분입니다. 이들은 구름과 안개, 물로 모습을 변화하면서 나와 여러분의 몸속으로 드나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물의 성분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요.

모든 생명의 연료가 되는 불은 태양 에너지에서 옵니다. 불의 따뜻한 온도는 식물 안팎에서 수분을 하늘로 끌어 올리고, 다시 그 물이 땅으로 떨어져 수분을 보충할 수 있게 해주는 순환의 도구입니다. 우리 몸의 신진대사를 담당하는 몸속의 화로(온도)는 물질과 에너지를 최초로 시공간에 퍼뜨린 빅뱅의 불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불은 생명이 탄생한 지구 초기의 원시 바다에서 생물이 만들어지도록 촉매 역할을 한 그 번갯불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요. 우주가 시작되는 최초의 에너지인 불이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다는 것이죠. 마치 태양 에너지로 우리 모두 빛을 받아 이생의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같은 불과 에너지로 연결된 하나입니다.

공기는 어떨까요? 제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은 여러분에게도 들어갔다 나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모두 같은 공기를 흡입하고 내뱉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로부터 더 많은 공기를 주고받을 수 없고, 아무리 싫어해도 그와 주고받는 공기를 차단할 수 없지요. 또한 우리가 내뱉는 이산화탄소를 나무가 들이마시고 나무가 내뱉는 맑은 산소를 우리가 들이마십니다. 이 공기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지구의 생명체들이 적절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대기권을 형성하는 보호막입니다. 우리 몸이 생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세포를 깨우고 활성화하는 것도, 질서정연한 신진대사와 상호침투를 하게 하는 것도 모두 공기가 있어 가능합니다. 이 공기와 불과 물과 땅을 통해 우리는 너와 나의 경계를 초월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커다란 생명 공동체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으로 ‘우리 몸에는 팔다리와 같은 여러 부분이 있지만 이들 모두가 우리가 보호해야 할 하나의 몸이듯이, 세상에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가 자기 자신처럼 보호해야 할 한 사람(91)’이라는 말씀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고요히 멈추고 사유한 생태적ㆍ연기적 자아에 대한 통찰은 나만 보호하고 잘살아야 한다는 이기심을 내려놓고, 나와 남이 같다는 평등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자비심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랬을 때 너와 나의 주관과 객관을 벗어나 ‘고통은 어디까지나 고통일 뿐이므로 구별하지 말고 우리는 모든 고통을 없애야 한다(102)’는 산티데바 스님의 평등성의 사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요일마다 고요히 멈추는 시간을 갖고, 그날의 자연과 연결성을 알아차리고 그 자연의 성품을 닮으려는 사유를 해보면 어떨까요? 일요일은 태양처럼 나와 타인을 동등한 에너지로 비추기, 월요일은 달과 별을 바라보며 우주적 존재를 사유하기, 화요일은 냉담한 이기심을 불로 태우기, 수요일은 번뇌를 물처럼 흘려보내기, 목요일은 나무처럼 아낌없이 내어주기, 금요일은 마음의 풍경을 주의집중해서 관찰하기, 토요일은 대지처럼 받아들이기를 실천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자연의 평등한 성품에 좀 더 가까이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함께 해보시겠어요? 고맙습니다.             
          

재마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아사리로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과학연구소에서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움직이는 법당, 춤추는 절을 꿈꾸며 소마명상여행을 이끌고 있다. 또한 종교를 초월해 마음비추기 피정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완화의료병동에서 영적돌봄 봉사를 하고 있다. 박사 논문으로 「사무량심의 가치 재발견과 체화프로그램 개발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