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들] 광주 길상사 수담마 스님

스리랑카 스님이 전하는 행복을 찾는 방법

2018-08-28     유윤정

전라도 광주에 위치한 송광사 포교당 길상사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크게 의지하는 스님이 있다. 언제나 넉넉한 미소를 전하는 스리랑카에서 온 수담마 스님(35)이 그 주인공이다. 유창한 한국어를 뽐내는 스님은 길상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부처님 법을 전하고, 외국인 근로자들이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을 소매 걷고 돕는다. 길상사로 향하자 수담마 스님이 종무소 창문을 활짝 열고서 인사를 건넸다. 하얀 이가 빛으로 느껴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신도들을 맞이하는 스님이 한국에 들어온 지도 벌써 8년이 흘렀다. 스님은 왜 한국에 오게 됐을까?

사진 : 최배문

|    새벽 2시, 꺼지지 않는 휴대폰
새벽 2시. 수담마 스님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스님께서 와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이 새어 나왔다. 스리랑카 근로자가 작업장 계단에서 떨어져 유명을 달리했다는, 함께 일하던 친구의 전화였다. 다급히 병원으로 향한 스님은 함께 일하던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의식을 집전했다. 스님은 이어 수습과 장례 등 외국인 근로자들이 직접 하기 어려운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광주에 거주하는 등록 외국인의 수 2만1천400여 명. 수담마 스님은 광주에만 1,000여 명의 스리랑카 사람이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에게 수담마 스님은 의지처다. 말도 쉽게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수담마 스님을 먼저 떠올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스님의 손길은 관세음보살의 가피처럼 느껴질 것이다.

“일이 벌어지는 때는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래서 전화를 받지 않는 시간은 없습니다. 지방 곳곳에서 연락이 와요. 주로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병원이나 경찰서, 법원 등에 함께 가주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스리랑카 친구들이 절에 찾아와서 상담해주기도 하고요. 법회를 열고 함께 기도도 하지요.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돕고 싶어요.”

수담마 스님은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24시간 스님의 전화기를 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인구 70%가 불자인 스리랑카 사람들이기에 스님으로써 의지하는 것도 있지만, 더욱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까닭은 스님이 다문화복지센터 (사)아시아밝음공동체(이사장, 길상사 주지 도제 스님)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담마 스님은 이주민을 대상으로 법회를 집전하고, 노무 상담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더불어 사단법인이 운영하는 이주노동자 쉼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손 내밀어 이끈다. 

“회사를 그만두면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머물 데가 없어요. 다행히 주지스님의 지원으로 이주노동자 쉼터로 도움을 줄 수 있게 됐습니다. 평균 12명 정도가 쉼터에 머물다 갑니다.”

길상사 주지 도제 스님은 수담마 스님이 광주에 있는 이들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고 전했다. 인근의 장성, 화순, 나주까지 범위를 넓히면 스리랑카인들의 수는 1,500명으로 늘어난다. 목포, 여수, 전주까지 눈을 돌리면 3,000여 명이 있다. 도제 스님은 “수담마 스님이 살피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 지난해 8월에는 스님이 완주 송광사에서 1박 2일 스리랑카 전통법회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 덕에 인근 스리랑카 근로자 400여 명이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고 크게 칭찬했다. 그때 한 참가자는 “8년 만에 스리랑카스님을 뵀다. 이 시간이 행복하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목포 인근 섬에서 어업을 하는 근로자였다. 수담마 스님은 이 친구들이 다치지 않고 일하기를, 건강히 스리랑카에 돌아가기를 기도했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    100% 무료 이용 시설, 자비복지병원을 위하여
“한국의 복지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서 왔습니다.” 한국에는 왜 오게 됐는지 묻자,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수담마 스님이 한국에 첫발을 디딘 2011년, 스님 나이 28이었다. 8살에 출가한 스님은 한국에 오기 전 스리랑카의 자야와르데네푸라 대학(University of Sri Jayewardenepura)에서 불교 철학을 공부했다. 남을 돕는 것은 숨 쉬듯 당연한 일. 스리랑카에 요양원을 짓고 싶었다. 복지 시스템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공부하러 갈 계획이었지만, 한국에 있던 스리랑카스님의 권유를 받고서 한국행을 결심했다.

“우리나라에는 사고로 몸이 마비된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스리랑카 물리치료 시설은 큰 병원 몇 곳밖에 없어요. 돈 때문에 치료받기 힘든 사람도 있고요. 시내에 있는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약도 먹고 물리치료도 받지만,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오일 마사지만 하고 집에서 생활을 해요. 물리치료를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스리랑카에 물리치료센터를 짓고 있어요. 100%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 겁니다.”

스님이 가만히 휴대폰을 내밀었다. 공사 중인 건물 사진이 있었다.

“스리랑카 호라나horana 지역에 장애인 복지관과 물리치료센터를 짓고 있어요. ‘Parama Maithree Hospital. 자비복지센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2280ft²(약 212m², 64평)의 2층, 3층 건물을 2채 올리려고 합니다. 2017년 3월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1층을 마쳤네요.”

작년 3월에 시작했지만 이제 막 1층이 완성된 이유는, 건축자재 구입부터 인력 동원 비용 등까지 모두 수담마 스님 자비로 해결하기 때문이다.

“보시를 받으면 모두 스리랑카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쉽지 않아요. 스리랑카의 후배스님이 자재를 가져다주는 등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운동치료실과 물리치료실, 요양실이 마련된 3층짜리 건물을 구상했습니다. 2019년 완공 계획을 잡았는데, 조금은 한계가 있어요. 3층까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차근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100% 무료 이용 자비복지센터. 스님은 거북이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목적을 이룰 거라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외국 친구들과 스리랑카 친구들도 스님의 뜻에 힘을 실어주려 모금 활동을 해보겠다고 팔을 걷고 있었다. 스님은 이 모두가 “선한 힘을 얻고픈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사진 : 최배문

|    마음에 남는 행복을 찾기를
수담마 스님은 최근 영주권 취득을 위해 일정 시간 이수해야 하는 프로그램을 통과하지 못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다가 지각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님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프로그램은 다시 들으면 된다. 단어 몇 개 공부하는 것보다 도움을 주는 게 우선”이기에, 스님은 도움이 필요한 이가 있다면 누구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차별하지 않고 도와주겠다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수담마 스님은 한국 사람들이 이주 노동자들에게 조금만 더 따뜻한 관심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말이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면 좋겠다’입니다. 이 친구들이 말하는 건, ‘월급이 적어도 좋다. 아프면 아프냐고 물어봐 주기를, 따뜻하게 대해주면 좋겠다’예요. 이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장님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기도 하잖아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걸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덧붙여 스님은 듣는 사람이 대신 사과하게 되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스님은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과 스리랑카의 문화 차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머리를 만지는 건 굉장히 민감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일을 하다 보면 뒤통수를 때리며 말을 전하기도 하죠. 그럴 때 이들은 심한 욕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몸이 다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크게 다쳐요. 또, ‘이 새끼’라는 말에 상처받습니다. ‘이 단어는 거칠긴 하지만 상대를 재미있게 부르는 말이다’라고만 설명해줘도 마음을 다치지 않습니다. 한국문화는 이렇다 하고 알려주고 적응하는 시간이, 문화의 차이를 이해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담마 스님은 이런 차이를 이해해준다면 좋겠다고 차분하게 전했다. 스님이 한국에서 살면서 바라본 안타까운 점이었기에, 스님은 더욱 시간을 쪼개어 한국과 스리랑카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과의 대화는 느긋하고도 때론 아팠지만, 희망찼으며, 미래를 향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묻자, 스님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오래도록 고민한 후 천천히, “모든 사람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를 바란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 방법을 찾잖아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행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순간 반짝하고 끝나는 행복임을, 사람들은 모르고 산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한국 사람도 우리나라 친구들도 많이들 그렇게 생각해요. 예를 들어 밥을 먹으면 금방 행복합니다. 그렇지만 조금 지나서는 허기져 또 먹고 싶어지죠. 그런 것보다 마음에 계속 남을 수 있는 행복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동물은 동물,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좋은 일 많이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자기 가슴에 계속 남길 수 있는 행복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남아있는 삶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