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강의실 357호] 석가모니가 답하지 않은 질문

석가모니가 답하지 않은 14개의 질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18-08-28     홍창성

횟수를 더해 가면서 내 강의는 자연스럽게 불교철학의 첨예한 논증들을 점점 더 많이 선보이게 된다. 그런데 불교가 제시하는 멋진 철학적 논리들에 감탄한 학생들은 가끔 뜬금없이 묻기도 한다.

“불교는 어렵고 중요한 질문들에 잘 답변하고 대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나 이론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도 있겠지요? 있다면 어떤 것들입니까?”

아, 이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고얀 녀석들이 엉터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자인 내게 불교의 한계와 약점을 내보이라고 요구한다. 물론 이런 질문이 무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 괘씸하다. 그리고 질문은 주제의 범위가 좁은 특정 문제에 한정해야 하는데, 이렇게 ‘불교 교리의 약점 일반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추상적인 요구는 세련된 질문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해 전 부교수 시절에 대학으로부터 강의 계속 잘하라고 무슨 상까지 받은 터라 어쩔 수 없이 친절한 척하며 석가모니의 십사무기十四無記 이야기를 소개해 준다. 

십사무기十四無記. 형이상학 전공인 내게 석가모니가 ‘쓸모없다(?)’며 고의로 답변을 하지 않았다는 14개의 소위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솔직히 좀 불편하다. 불교계가 이유도 제대로 모른 채 형이상학을 폄훼한다면 옳지 않겠기 때문에, 나는 이 형이상학적 질문들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질문이 모두 14개라지만 사실은 네 개의 형이상학적 주제를 14개의 질문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 첫 여덟 질문이 다루는 두 개의 주제는 실은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1724~1804)가 그의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다룬 독단적(dogmatic 그래서 쓸모없는) 형이상학의 첫 번째 주제인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 유한성 및 무한성(時空의 有無限性)의 문제와 일치한다. 

칸트는 우주의 시공간적 유무한성에 대한 어떤 주장(시간은 유한하다, 시간은 무한하다, 공간은 유한하다, 공간은 무한하다 등)도 모두 옳다고 보일 수 있음을 철학적으로 논증한다. 우주가 시간적으로 시작점을 가지고 있다거나 아니거나 또 공간적으로도 한계가 있다거나 아니거나 모두 각각 옳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지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어 모순된 주장이 동시에 모두 참이라는 황당한 결과가 바로 그가 말하는 이율배반(二律背反 Antinomie)이다. 지적知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칸트의 비판철학의 체계에서는 수학과 논리학 그리고 자연과학과 같이 그 주장의 진위(眞僞 truth value)를 분명히 가릴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종래의 독단적 형이상학의 주장들은 처음부터 질문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석가모니의 14무기無記에 대해서는 통상 그것들이 모두 형이상학적 질문들이어서 열반에 이르는 길에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답변을 거부했다고 해석되어 왔다. 에드워드 콘지 같은 이는 칸트가 이런 질문이 물어지면 안 된다고 한 이유는 그의 철학체계에 따르자면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만, 석가의 무기는 그런 질문이 단지 실질적으로 열반에 이르게 해 주는 실천 행위와는 무관하고 아무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석가가 무시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칸트의 이율배반二律背反과 석가모니의 무기에 대한 비교논의는 무의미하다고 속 편하게 무시한다. 나도 쉽게 그럴 수 있으면 장수하는 데 도움 되겠지만, 그러기에는 나는 석가모니가 최첨단 철학논증을 구사하는 장면을 너무도 많이 접해 왔다. 여기서 나는 석가모니가 그 14개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던 이유를 서양철학적 관점 특히 20세기 이후 영미 계통의 분석철학적 관점에서 한번 재구성해 보겠다. 

시공의 유무한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 같은 것들은 각각 옳다거나 또 그르다고 주장해도 모두 그럴싸하게 논증을 만들어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이런 주장이 인간의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는 영역 밖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서양에서는 인간의 적절한 지적 탐구가 가능한 영역을 두 가지로 분류해 왔다. 라이프니쯔(1646~1716)는 이성의 진리(truth of reason)와 사실의 진리(truth of fact)를 논했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은 관념들의 관계(relations of ideas)와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를 나누었다. 칸트는 분석판단(anayltic judgment)과 종합판단(synthetic judgment)을 분류했는데, 이 전통은 20세기 초반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 수학 및 논리학과 자연과학만이 그 주장의 참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우리의 올바른 연구 영역이라고 주장되었다. 데이비드 흄은 “이 두 영역에 속하지 않는 문제들을 다루는 책들은 모두 환상을 좇으며 사기와 기만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도서관에 가서 그런 책들을 보면 모두 불살라야 한다”고 하는 과격한 주장마저 내놓는다. 그가 제일 먼저 불살라야 한다고 한 책들은 신학과 형이상학 서적들이었다. 

분석판단이란 한 문장에서 술어의 개념이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어서 그 참 거짓이 논리적으로 결정되는 판단들이다. 예를 들어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은 ‘총각’이라는 주어의 개념이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뜻이 되어 그 참이 쉽게 드러난다. 산수나 기하학과 같은 순수 수학도 마찬가지다. ‘2’는, 예를 들어, ‘1+1’로 정의되고 ‘3’은 ‘1+1+1’로 정의되는데, ‘2+3’은 ‘1+1+1+1+1+1’이 되어 ‘5’의 정의에 맞게 된다. 그래서 ‘2+3=5’가 참이다. 이와 같이 논리학과 수학은 개념들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이성의 진리, 관념들의 관계)를 다루는 엄밀하고 확실한 학문이다. 자연과학은 이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감각 경험을 바탕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많은 경우 그 주장의 참 거짓을 제대로 가릴 수 있다. ‘하늘은 푸르다’라는 문장은 ‘하늘’이라는 개념과 ‘푸르다’라는 개념을 종합해서 만든 (종합)판단이고, 우리는 이 문장이 참임을 시각 경험으로 안다(사실의 진리, 사실의 문제). 그래서 자연과학도 우리가 제대로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을 연구하는 올바른 학문분야이다. 흄과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논리학과 수학 그리고 자연과학만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제대로 된 학문분야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이들 서양철학자들은 우주의 시공간적 유무한성을 비롯한 석가모니의 십사무기에 관련된 질문들이야말로 논리학이나 수학 또는 자연과학의 문제들이 아니어서 그 답변의 진위를 결코 가늠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의 시간만 낭비할 뿐인 엉터리 질문들이라고 주장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질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물어져서는 안 될 질문들이 물어진 엉뚱한 경우들이다. 왜냐하면 참 거짓을 가릴 수 없는 주제에 대한 질문들이니까. 석가모니는 당시 보통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을 접하면 그것을 지적知的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 등을 통해 부처의 법을 배우고 또 참선수행에 정진해서 열반에 이르는데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답하지 않은 14개의 형이상학적 질문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 그가 그 오랜 옛날 이미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올바른 지적 탐구와 연구의 영역(legitimate areas of human inquiry)이 있음을 꿰뚫어 보았고 또 우리 보통 사람들 대다수는 이 영역 밖에 있는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씨름하느라고 지나치게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 드러난다. 이는 17세기 이래 서양철학전통 주류의 판단과 일치한다. 물론 석가모니가 시기적으로 22세기 정도 앞섰다는 점만 빼고. 

나는 필요할 때마다 그토록 첨예한 철학논증으로도 법을 설했던 석가모니가 특정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냥 머리 쓰지 말고 실천 참선수행 정진으로 열반하는 데나 애쓰라고 말하려 한 것’이라며 쉽고 편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경전에 석가모니가 그 이유들을 좀 더 세밀한 논의로 설명하지 않은 것처럼 되어 있는 이유는, 석가모니가 듣는 이들이 자질(근기)이 부족해서 설명해 줘도 이해 못 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또 실은 자세히 설명했더라도 듣는 이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외워 기록으로 전승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후자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석가모니가 답변하지 않은 질문들의 성격을 더 철저히 연구하여 그가 답변 않은 이유를 좀 더 논리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내가 시도한 바는, 현대 서양 철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해 보면 석가모니가 14개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철학적 이유가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 질문들은 참이나 거짓이라는 답이 없기 때문에 답을 안 한 것이고, 답이 없다는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자들이 쉽게 따라올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불교에서 교리에 대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이해가 전혀 쓸모가 없고 또 불교가 단순히 명상 수행 등 실천에만 관련된 가르침의 체계라고 받아들여 진다면, 나는 그 누구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가진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14무기에 관련된 형이상학적 질문들이 도대체 왜 그리고 과연 어떻게 별 쓸모가 없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가를 그래도 좀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해야만 그런 것들에 너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실천 참선수행에 더 정진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