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평화를 보는 선禪의 시선

2018-08-28     박재현
그림 : 이은영

세상일에 마음을 쓰지 않거나 세상과는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 선禪의 도리인 양 생각되던 때도 있었다. 반대로 세상일에 무신경한 태도가 조선불교를 망쳐버렸다고 비판받던 때도 있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격동의 세월 속에서 특히 그랬다. 그 시기의 선사들은 입전수수入鄽垂手가 선의 본령임을 잊었느냐고 목청을 높였고 직접 실천하기도 했다. 입전수수는 단순히 몸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일을 남의 일인 양 도외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판단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 세상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지난 남북정상회담 취재에 참여한 언론사만 내외신 총 372개사 3,051명이나 되었다. 남북과 세계 평화의 문제를 시사로 보도하는 매체는 많고 뉴스도 넘쳐난다. 누가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했다느니, 어디서 언제 만날지도 모른다느니, 결국 만나지도 못하고 결실도 없을 거라느니,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라느니, 출처도 근거도 없는 별의별 말만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정작 통일과 평화의 방향성을 담은 굵고 큰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불교계에서도 별다른 메시지를 내지 못하고 있다. 

출가자가 줄어든다, 신도 수가 줄어든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지 오래다.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해법도 가지가지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사태가 초래된 근본적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세상일에 먼 산 바라보듯 하는 태도가 반복되고 길어지면,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왜 불교가 있어야 하는 건지 소리 없이 물을 것이다. 몇 번 물어봐도 신통한 대답이 들리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더 묻지 않고 아예 관심을 꺼버릴 것이다. 종교는 박해나 탄압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멸自滅해갈 뿐이다.

다시 한반도 전체의 정세가 꿈틀대기 시작하고 있다. 살기 어린 막말이 대륙을 넘나들다가 별안간 터진 대화의 물꼬를 보며 평화란 무엇이고, 한반도에서 평화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 남북은 평화로운 상태일까, 갈등하는 상황일까.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라는 사전적 의미로 평화를 이해하면 그만일까. 총소리가 멈춘 것이 평화라면 지금의 이 정전停戰 상태는 다툼일까 평화일까. 정전상태가 다툼이라면 다툼의 현상은 어디에 있는가. 정전상태가 이미 평화라면 왜 또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을 말하는 것일까. 다툼의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쪽이 제압되어 다툼 현상이 사라진다면, 그 상태는 평화일까 평화가 아닐까.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8.29~1944.6.29)은 평화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데 가장 좋은 단서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의 생애가 근현대 전쟁사의 한복판을 관통해 있고, 그 속에서 그는 두드러지게 평화를 모색하고 말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등 놀랍게도 이 모든 전쟁이 만해의 생애와 겹쳐져 있다. 그는 관군과 동학, 전통과 근대, 제국주의와 민주주의가 부딪치는 현장에서 생명生命의 보편성을 통찰했다. 그리고 이 생명성에 반하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그에 항거했다. 

만해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평화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를 근간으로 해서 3.1 독립선언, 신간회 활동 등 다양하고 폭넓은 정치 사회활동과 문예활동 또 승려로 활동하면서 제국주의에 맞섰다. 평화의 의미를 쫓아가는데 만해보다 더 좋은 사례는 찾기 어렵다. 그의 평화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는 「조선독립朝鮮獨立에 대한 감상感想」이다. 여기에 기술된 평화관은 너무 분명하고 적확해서 부연해서 설명하기가 오히려 민망하다. 만해는 에둘러 말하지도, 말하다가 그만두지도 않는다. 그의 글은 핵심을 곧바로 질러 들어간다.

만해의 평화관은 명료하다. 평화는 ‘평등’ 위에 서 있어야 하고 반드시 ‘자유’를 짝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과 자유가 서로 팽팽히 균형[相敵]을 이룸으로써 진짜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해는 현상적으로 대립과 갈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대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를 통해 평화를 모색한다. 현상적인 대립과 갈등이 있어도 사실은 평화일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평등이 가리키는 지점은 절묘하다. 상대를 무릎 꿇려 얻는 평화는 결코 평화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해는 제국주의를 격렬히 비판하고 그에 맞섰다. 그 이유는 제국주의가 끝내 평화를 향해 나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는 상대를 고개 숙이고 무릎 꿇게 하여 마침내 세상을 평안하게 하려는 정치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서로 대등하고 평등하지 못한 위치에서 그렇게 구현되는 평화는 일시적이거나 위장된 평화일 수밖에 없다.

자유가 가리키는 지점도 기막히다. 평화의 손짓은 대개 처음에는 “내가 너를 구해주겠다”라거나 “내가 너를 평안케 하겠다”라거나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로 다가선다. 그런데 그 구원의 손길은 상대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 괜찮다거나 이제 되었으니 돌아가도 좋다고 말해도 그 손길은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너를 구원해 주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그 손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구원의 손길이 사실은 자유를 속박하는 굴레였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통일정책 기조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공식방안으로 하고 있다. 인간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를 통일의 철학으로 하여 자주, 평화, 민주의 3대 통일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방안을 만해의 평화관에 입각해서 살펴보면 얼마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먼저 현재의 통일정책 기조에는 평등에 해당하는 내용이 약하거나 거의 없다. 통일이라는 대원칙은 있지만 남과 북 양 당사자의 ‘평등’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현재의 통일방안에는 ‘자유’의 맥락도 좀체 발견되지 않는다. 만해의 평화관을 미루어 보면, 평화를 모색함에 당사자의 자유가 보장되고 추구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흡수 통일의 구상은 평화라는 목적에 어긋남을 알 수 있다. 상대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흡수는 본질적으로 폭력의 한 양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이나 정치 사회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역시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라는 점에서 평화를 도모하는 대북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해는 제국주의가 내포하고 하는 ‘중심’의 질서를 비판했다. 강력한 중심주의는 수많은 주변의 자유를 강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근대 제국주의만이 아니라 중화中華로 상징되는 봉건적 전통 질서도 비판한다. 또 우리 안의 제국주의, 마음의 제국주의도 염려한다. 사람이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한 것이라고 더 크고, 개인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라고 더 작은 것은 아니라는 만해의 통찰에는 제국주의와 결부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내재하고 있다. 이런 그의 평화관에 탈근대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만해가 살았던 시기는 여러 정치 권력과 사조思潮가 각축하던 때였다.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굴복시키고 강탈하고 점령하는 것이 용인되는 것을 넘어 자랑하던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형성된 만해의 평화사상을 경계境界의 평화사상 혹은 다원주의적 평화사상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면 이렇게 명명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는 모든 존재를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으로 보는 관점이다. 만해가 일제에 항거한 이유도 일본 정부가 이런 생명성과 정면으로 상치되는 제국주의라는 정치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상대를 무릎 꿇려 평화를 얻어내려는 이들이 많다. 그건 평화가 아니라 폭력이다. 그 폭력성은 자기 안의 불안과 울분이 비집고 나온 것이다. 혹은 두려움을 팔아 이득을 취하려는 미혹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는 그런 마음을 돌이켜 두려워하거나 미혹되지 않기를 바라는 선禪의 시선이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