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제주 원명선원 대효 스님

우리는 이미 구족해 부족함이 없다

2018-08-28     김성동

어려운 인터뷰다. 첫 질문부터, 그 질문 자체를 친다. 몇 번의 질문이 이어지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느끼게 한다. 필요 없는 질문만 준비한 듯했다. 언어와 문자를 벗어나는 것이 참선 수행의 기본 태도인데, 그것을 전제로 질문한 셈이다. 대효 스님은 “지식 습득으로 질문하는데, 흥미를 유발할 뿐이다”며 지식 습득은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자꾸 경책했다. 20여 개 항목의 질문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깐의 참선 경험자에게는 이런 상황이 곤혹스럽다. 스님의 표현처럼 “산에 가서 물고기를 찾으려고 하거나, 바다에서 호랑이를 잡으려는 것”과 같았다. ‘문자’로 밥 먹는 이의 한계인 듯했다. 스님은 꾸짖듯 이야기한다. “지금 다들 병들어 있는데, 문자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그러거든. 다들 문자가 부족해서 지금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라. 다들.” 

사진 : 최배문

|    몸 성한 사람이 왜 약을 먹나
- 화두 참구는 중학생 정도만 되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 색안경을 끼고 보며 사물을 이해하려면 아주 어려워. 근데 색안경 벗고 보면 있는 그대로라. 선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색안경을 끼니까 접근을 못 하는 것이지.”

- 색안경은 무엇인가요?

“지식이지. 임제 스님은 ‘살불살조殺佛殺祖’라고 말씀하셨어. 또 ‘살부살모殺父殺母’라고 하지. 앞은 불법적 관념과 사상을 벗어나는 것이고, 뒤는 사회윤리적 관념과 사상을 다 벗어나는 것이지. 그게 다 색안경이야. 색안경을 고수하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노란 색안경을 아무리 닦아도 노란색이지. 그냥 색안경을 벗어버리면 간단하지.”

- 색안경을 벗고 싶어도 벗는 방법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 지금 많은 스님들이 참선을 하는데, 왜 각자覺者가 나오지 않을까. 그것은 너무나 쉬운 길을 등지니까 그래. 이를테면 바다에 가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못 잡지. 또 바다에 수레를 끌고 가면 갈 수 없지. 반대로 배를 육지에서 띄우려면 되겠어? 육지에서 고기를 잡으려면 못 잡지. 선은 두 가지 길이 있어. 바로 실천하는 길이 있고, 또 이해를 한 후 이해를 버리고 실천에 들어가는 것이지. 결국은 두 가지 다 실천이야. 실천이나 체험은 언어가 아니야. ‘화두를 어떻게 해야 하죠?’ 묻는 것은 이해를 구하는 것이지. 길을 가는 것은 걸어서 가는 것인데 뻔한 일을 ‘어떻게 가나요?’ 이렇게 자꾸 물으면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 이런 태도는 버려야 해. 임제 스님이 할이나 방을 했던 것은 바로 이론이나 논리를 벗어난 실천이지. 바로 실천을 보여준 것을 실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하려고 하면 어긋나. 밥상 차려준 것을 먹으면 밥 차린 목적을 이룬 것인데, 이건 무엇으로 요리했어요? 어디에 좋아요? 단백질이 들어있나요? 등등 이렇게 이야기만 한다고 몸이 좋아지고 배가 부르는 것은 아닌 것과 같아.” 

- 이해가 되어야 실천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 이해가 더 어려워. 색안경 끼고 알려는 것이니 어렵지. 때 묻기 전에 참선을 해야 해.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어. 불교를 이해한 후 참선하려면 지적 유희로 놀다가 끝나. 말 천 마디보다 필feel 한 번이 중요하지. 실천을 통해서 필이 조금이라도 오면 달라져. 물 한 방울이 항아리 물 전체를 바꿀 수 있어. 살불살조, 살부살모가 다 그런 이야기지.”      

- 참선에서 교리적 지식은 오히려 방해가 되나요?

“참선하는데 교리가 왜 필요한데? 교리는 방편이잖아. 방편은 병이 있을 때 쓰는 게 방편이지. 병도 없는데 왜 약을 먹어야 하냐고. 방편은 약과 같아. 몸 성한 사람이 왜 약을 먹어. 되레 병이 나지. 아프지 않은데 왜 약을 먹어. 참선을 자꾸 어렵게 보니까 그래.”  

|    업이 아니라, 작용이다
대효 스님은 1966년 문경 김룡사에서 출가해 당대 선지식인 서옹, 서암, 성철, 향곡, 경봉 스님께 선을 배웠다. 김룡사에서 금선대로 수행처를 옮긴 후 스님의 표현으로 “불교가 정리됐다.” 이후 원적사, 심원사, 홍제사, 백련암 등에서 정진했고, 1976년부터 제주에 원명선원을 열어 참선의 대중화를 시작했으며, 2008년부터는 안성에 활인선원을 개원해 참선 전파에 매진하고 있다.   

“한번은 이곳에 노스님 두 분이 찾아오셨어. 한 스님이 참선하다 안 돼서 염불로 돌렸대. 자기는 업業이 두터워서 참선이 안 되어 염불한다고 해. 업이란 말은 한국불교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잖아.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것을 업으로 보면 안 된다. 모든 것을 업으로 몰아가면 업만 남게 된다. 술 먹은 사람은 갈지자 걸음도 하고, 발음도 시원찮고, 했던 말 또 하고, 그런다. 그것은 작용으로 봐야 한다. 작용으로. 술을 먹었으니, 술 먹은 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얻어맞으면 통증의 작용이 생기지. 바다의 파도도 물이 업이니까 파도가 친다고 하면 안 돼. 작용으로 봐야지, 이 세상의 각기 다 다른 현상을 하나로 몰아붙이면 안 돼. 눈은 눈의 작용을 하고, 귀는 귀 작용을 하고, 밥 많이 먹으면 배부르고. 다 작용으로 봐야지, 그걸 업에 가두어서 업에 꼼짝 못 하게 하면 되겠느냐. 그랬지.”

- 많은 사람들이 그 노스님처럼 봅니다. 

“업이 블랙홀이 돼서 전부 업으로 빨려 들어가. 가급적이면 업에서 벗어난 표현을 써야지. 업이 아닌 것도 업으로 사용해. 전부 업으로 봐.”

- 스승 없이 참선 수행하는 분들도 꽤 많습니다. 선방에서도 점검하는 것이 많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있을 수가 없어. 길 안내가 없는데 어떻게 길을 나갈 수 있어. 병자가 약방문보고 약을 짓는 꼴이지.” 

- 병자가 약을 스스로 짓는 꼴이다.

“독을 짓는 것이지. 약도 앞에 쓸 약이 있고, 뒤에 쓸 약이 있어. 순서를 바꿔 쓰면 약도 독이 되지.”

- 스님께서는 오랫동안 단식도 하셨고, 또 불자들에게 참선과 단식을 함께 할 것을 권합니다. 

“지금 시대는 단식이 필요한 시대라. 너무 많이 먹고, 소화가 안 돼. 병이 축적되지. 단식과 수행을 병행하면 수행에 많이 도움 돼. 내가 25년 동안 하루 한 끼를 먹었기 때문에 그 심리를 잘 알지. 몸이 홀가분해.”

- 원명선원은 기도와 축원을 하지 않습니다. 

“할 이유가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만족하려고 하는데, 부처님 근본 가르침과 어긋나지. 그렇게 자꾸 나가면 헐떡거림만 조장하게 되지. 자기 자신을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 것이지. 부족하니까 자꾸 채우려고 하고, 반복하게 되지. 스승다운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그렇게 돼.” 

-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수행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 가운데 욕망도 일부분이야. 욕망을 끝까지 부리다 보면, 자신이 욕망의 노예가 될 수 있어. 그런데 욕망을 욕망이라고 알 정도가 되면 달라져, 욕망의 문제는 지혜로운 스승을 만나면 금방 해결돼. 우리는 욕망을 어둡고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그런데 그렇게 보는 태도는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를 바로 못 쓰기 때문이지. 욕망에 갇히면 (모든 것이) 욕망으로만 보이지. 세상 사람들이 욕망에 다 사로잡혀 있구나, 하면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디 가나 다 욕망의 노예이고, 욕망 때문에 전쟁하고, 가정이 파탄 나고, 욕망 때문에 스스로 파멸하고…. 이건 욕망에 갇힌 사람의 이야기야. 그런데 스승은 그렇게 안 봐. 욕망도 하나의 작용일 뿐이야. 그 말은 수많은 작용 중에 일부분이라. 바다를 예로 들면, 바다는 깨끗한 곳도 있지만 온갖 잡동사니가 다 있는 곳도 있어. 쓰레기가 있는 바다도 바다야. 그게 바로 수승한 길로 가는 태도지.”  

- 사람들은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나는 못났는데 잘나고 싶다. 나는 가지지 못했는데 많이 가지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니 해결이 안 되는 거라. 잘나고 싶은 사람은 못났다는 것을 벗어나야 잘날 수가 있어. 못났다는 것에 빠져있는데 어떻게 잘날 수가 있어. 저 높은 산에 올라가면 낮은 곳이 보이지. 높은 지혜를 갖추면 자기 모습을 다 볼 수 있어. 욕심 있고, 못나고 하는 모습을 다 보지. 자신을 (낮은 곳에) 가둔 것은 바로 자신이야. 부처님이 가두었겠어? 자기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존재로 본다고. 못난 놈을 잘난 양반으로 바꾸겠다는, 그렇게 보는 태도가 잘못된 것이야. 그것은 진정견해眞正見解가 아니지. 나는 사람들이 사회생활에서 지혜를 통해서 해결하도록 해. 우리가 살다보면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잖아. 예를 들면 돈이 없어 쩔쩔매면 돈으로 해결하고, 기운이 없으면 먹어서 해결하고. 그런 식으로 해결하지. 그런데 그렇게 해결하면 방황의 늪에서 못 벗어나.”

사진 : 최배문

|    일상에서 지혜가 중심이 되는 길
-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죠?

“지혜로 해결해야지. 처음에는 다가오지 않을 수 있어. 생소하지. 안 하던 것이니까. 그런데 안 하던 거라도 해야 할 것은 (안 해왔지만) 꼭 해야 해. 그동안 잘 해왔던 것은 멈춰야 해. 근데 안 하던 것이니까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돼. 한 번 하고 나서 그다음에 또 해야 해. 모든 문제를 지혜를 통해서 자꾸 해결해나가도록 해야 해. 그러면 우리 일상에서 지혜가 딱 중심이 되어서, 지혜가 삶이 되는 것이지.”

-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무엇인가요?

“지혜는 작은 문제를 크게 보고 전부로 보이던 것을 바로 보게 해, 바로 보니 작아 보여. ‘나는 욕심이 많아. 욕심밖에 없어.’ 이렇게 보는 것은 아주 낮은 지혜야. 그런데 높은 지혜로 보면 욕망은 아주 작아지지. 높은 곳에서 보면 저 밑바닥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돈을 돈의 문제로 풀려하면 바람직하지 않아.”

- 그런 지혜는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요?

“지혜를 자꾸 쓰면 되지. 자꾸 쓰면 지혜로 돌아가.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지혜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태도가 중요해. 예를 들면 먹을 것은 없는 데 먹어야만 해결된다고 좌절만 하고 앉아 있는들 무슨 소용인가. 소외되고 외로우면 먹고 또 먹어도 만족되지 않아. 부자는 잠시 때를 놓쳤다하여 춥고 배고픔에 떨지 않아. 눈앞에 음식이 보이지 않아도 상실감에 빠지지 않지. 지혜는 자신의 능력과 자산을 과소하게 보지 않는 것이야. 이것이 지혜는 더욱 지혜를 쓰게 되고, 지혜는 더 확장되고, 지혜가 내 삶에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야.” 

- 스님께서는 참선하면 통찰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지혜와 같은 말이지. 간화선은 저절로 생긴 수행법이야. 간화선은 모든 것이 의구심이야. 알 수 없는 상태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는가. 전부 의구심이야. 전부 의구심일 때 아는 것은 다 사라지고 알 수 없는 것뿐이야. 나도, 대상도. 모두 알 수 없음으로 가득하지. 간화선은 한순간에 금방이야.”

- 경전이나 선어록이 독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선어록이 독이 되는 경우가 많지. 왜냐면 환자가 스스로 약을 지어 먹겠다는 것이라. 길을 아는 스승의 길 안내를 받아야지.”

- 제가 요즘 『임제록』을 읽고 있는데 혼자서 읽으면 독인가요?

“지식으로 읽는 것이지.”

- 참선하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것인가요?

“지식은 참선이 아니지. 냉정히 봐야지.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참선과 상관없어. 선은 곧바로 체득하는 것이지, 말로 해서는 안 돼. 요새 사람들이 관념에 빠져 있어서, 자꾸 표현을 잘하려고 해. 그러면 참선은 더욱 멀어져.”

- 어록을 읽어서 개인이 갖고 있는 고민을 해결하기도 합니다. 

“그 고민도 지적 욕구만 낳아. 선에서는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것이지. 밥을 먹어야 배부른 것이지. 물론 실천도 낮은 실천이 있어. 염불이 그런 경우지. 원효 스님이 그런 경우지. ‘나무아미타불이란 뭐야?’ 그렇게 따지면 염불이 아니듯이. 따지지 않고 그냥 지극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그런 것이 낮은 실천이지만, 실천이지.”  

- 스님이 말씀하신 실천을 좀 더 이야기를 해주세요.

“예를 들면 먹는 것이 실천이라면, 아무것이나 먹는 것이 아니라, 잘 가려서 먹어야지. 깨달음은 아주 수승한 지혜라. 또 실천했다고 전부 수승한 지혜는 아니야. 염불 등이 실천이지만 수승한 지혜는 아니지.”

- 수승한 지혜는 어떻게 다다를 수 있는가요?

“열심히 한다고 수승한 지혜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 일을 열심히 한다고 부자 되는 것은 아니라. 열심히 걷고 쉬지 않고 달려서는 일정한 구간은 잘나가는 것 같지만, 높은 산에 막히고 장강에 속수무책이지. 수승한 지혜는 참선을 해야지. 예를 들면 수승한 지혜는 어느 목적지에 가는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지. 비행기 좌석에 앉으면 가지. 단박에 가지. 장님도 가고, 아이도 가지. 누구나 갈 수 있는 것과 같아.”

|    받아들이면 쉽다
- 그만큼 쉽다는 것인가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쉽지. 그런데 쉬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렵지. 머리가 뛰어나든 아니든 상관없어. 선에 대해 아무리 학문적 성취를 했다고 해도 그 사람은 깨닫지 못해. 이해는 그만하고 실천해야지.” 

-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깨닫는다는 것은 없는 것을 보충한다든지 못나서 바꾸는 그런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는 거야. 내가 부자인데 그냥 정신이 깜박해서 밥을 얻어먹고 다니다가, 내가 부자인데, 하고 알면 그게 깨달은 것이지.”

- 그렇게 깨달았다면, 삶이 어떻게 변화되죠?

“자각하면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아.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다 부처 조사와 다름없이 구족되어서 부족함이 없음을 알지. 이것은 시간을 뛰어 넘는 것이기도 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해결됐기 때문에 어떤 때는 되고, 어떤 때는 안 되고, 그러면 안 되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아. 완전무결하지. 여기서는 나고 죽음도 벗어나.”  

- 참선하는 분들은 간화선이 최상승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선禪은 (다른 수행법과) 비교가 안 되지. 소승, 대승을 비교하며 최상승이라고 하는데, 대승에서 더 파고들면, 결국은 선으로 나가. 선에서 이런 의문이 생겨. ‘진짜 불법의 뜻이 뭐냐?(佛法的的大意)’ 이것은 대승, 소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선은 지혜와 삼매가 다 갖춰진 것이야. 육바라밀이나 계정혜처럼 나누어진 것이 아니야. 마조 스님과 방 거사가 나눈 대화 중 ‘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란 말이 나오는데, 바로 그런 것이지.”

- 불교의 기본 지식이 없어도 화두 참선을 할 수 있는 것인가요?

“화두 참선은 지식이 아니야. 자꾸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길을 아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 중요해. 곧바로 실천을 해야 해. 그걸 받아들여야 하지. 선에 들어가는 것은 복잡하지 않아. 지적 유희에 재미를 삼으면 안 되지. 지금 인류 문화가 낮아. 자꾸 나누고 분석하려고 하지. 경을 읽어도 모아지지 않아. 진정성이 없는 거야. 그럼 깨달음으로 나가지지 못해. 부처가 뭔가? 이런 상황은 앞뒤가 끊어진 자리야. 생각이 더 이상 펼쳐지지 않은 상태. 그런 곳으로 가는 것이지. 그 상태가 ‘알 수 없음’이야. 알 수 없음의 상태. 그런 상태이니까 뭘 봐도 그것만 보이고, 뭘 들어도 (그것 말고는) 하나도 흥미가 없어. 생각들이 다 떨어져 나가. 그런 상태를 표현할 때 말 잘 붙이는 스님들이 지어낸 말이, 나무가 썩어서 다 떨어지고, 그냥 물기도 하나 없이 썩어서 더 이상 떨어질 것이 없는 상태의 나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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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선원(제주) 활인선원(안성)
선회 2박 3일. 고땡캠프 1박 2일. 참선 단식수련회 5박 6일. 
매주 토요일(활인선원) 일요일(원명선원) 오전 11시. 
제주 064-755-3322  안성 1644-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