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수인(囚人)과의 인연

인연이야기

2007-09-15     관리자


1960 년대 초만 해도 교도소 법회는 기독교 일색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 조병일 장관이 들어서면서 불교계에서도 눈이 떠져 황석연 변호사, 이외윤 학장님, 안청정행 보살님이 중심이 되어 재소자 교육을 시작하였다. 전국 37개소의 교도소와 6개 소년원, 2개 감호소를 합해 총 45개를 돌아가면서 법회를 하는데 어느 날 생일 파티를 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서서 제안을 하였다.
"우리들은 기약이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법사님이나 스님들께서 보증만 서 주신다면 나갈 수 있으니 보증 좀 서 주십시오."
보증만 서면 나갈 수 있다고 하면 보증을 누가 서지 않을 자 있겠는가, 생일파티 28명 중 7명을 골라 보증을 섰다. 모두가 12년부터 18년 이상 교정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나온 뒤는 어떤지 몰라도 10년 이상 감옥 생활을 한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체념된 상태에서 생활의 방편을 얻은 사람들이므로 모습도 맑고 깨끗하지만 그 마음 또한 청정하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무기수를 한번 보증하면 죽을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단서를.
다섯 사람은 각기 인연되어 갔으나 출가를 희망한 두 사람만 남았다. 어떤 스님께서 한 분을 데려가고 가장 나이가 많고 근실한 사람 한 사람이 남았다. 직장을 알아보나 직장이 되지 않았다. 나이가 쉰살이 넘은데다가 간첩죄에 밀수죄, 살인까지 겸한 사람이다.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9척 장신에 90킬로가 넘는 거구를 가졌기 때문에 쳐다만 보아도 숨을 죽인다.
그러나 죽어도 스님만 되겠다니 어떻게 할 것인가. 3년을 함께 살면서 종단마다 스님마다 탐색해 보아도 승적은 가망 없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스님이 되기는 틀렸다.' 한탄하자 그날로 그는 서울에 나와 혼자 머리를 깎고 승복을 사입고 돌아왔다. 속은 어쩔망정 겉으로 볼 때는 큰스님이다. 객승이 와서 물었다.
"스님은 종단이 무엇이요?"
"석가종이요."
"스승은?"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아닌 그런 법이 있어-."
하자 "스님은 석가부처님 제자가 아닙니까?" 하며 안 죽을 만큼 때려 놓았다. 종단 때문에 멍이 들고 스님 때문에 가슴이 맺혔기 때문에 한꺼번에 분풀이를 한 것이다. 행자는 그 큰 몸을 하고 어린애처럼 울었다.
"중노릇도 마음대로 할 수 없군요. 이럴 바에야 장가나 가겠습니다."
나이 쉰 여섯. 누가 데려가겠는가. 나는 법회때마다 노래부르듯 자랑을 하며 "누가 거구 장사를 데려갈 사람 없느냐."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 기적이 일어났다. 젊고 튼튼한 한 미녀가, "내 아이 하나만 잘 길러 주신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자청하고 나섰다. 그분은 바로 경찰 출신으로 경찰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아이 하나만 데리고 살고 있었다.
드디어 결혼식이 올려지고 방 한 칸을 얻었다. 그런데 곤란한 것은 결혼 후에도 행자는 머리를 기르지 않고 승복을 벗지 않는 것이다. 승복을 벗으면 세상이 괴롭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걱정하고 있던 중 갑자기 두 사람이 행방불명되었다. 사방으로 찾았으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4년 후 갑자기 김포쪽에서 전화가 왔다.
"나좀 도와 주셔야 겠습니다. 속히 와 주십시오."
정신없이 택시를 대절하여 가 보았더니 3칸 법당에 여덟칸 요사채를 지어 놓고 간판과 주련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너무너무 놀라하자, "도둑질한 물건이 아니니 걱정마십시오." 위안하였다. 얼마 후 땅주인이 왔다.
"4년 전 노는 밭을 빌려달라 하여 빌려 주었더니 저처럼 과수원을 만들어 밭은 수확을 하게 해놓고 거기서 멧돼지를 길러 부자가 되었습니다.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절 하나 짓는 거라고 하여 땅 200평을 시주했습니다. 부처님 제자치고 이렇게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하고 칭찬하였다.
서둘러 은사를 정하고 종단에 등록하니 과거의 죄는 씻은 듯이 없어지고 현재의 복만 무량하게 넘쳐 흘렀다. 지금도 그는 불전 보시는 교도소 후배들에게 쓰고 새식구의 생활은 영농으로서 하되 밭을 가나 씨를 뿌리나 잠시도 스님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