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 부처, 마애불]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

통일로 가는 길을 환히 비추다

2018-08-27     이성도

이 불상은 이상화된 불신의 사실적인 모습이기보다는 
사람을 압도하는 권위적이고 위엄 있는 모습이지만,
어딘지 친근하고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에 서 있는
원형의 관모를 쓴 불상은 키가 크고,
불신 또한 바위면의 2/3정도이며 주불로 조성하였다.
이에 비해 오른쪽 사각탑형 관모를 쓴 불상은 키가 약간 작다. 

사진=최배문

백두대간의 한북정맥에서 광주산맥의 곁가지를 타고 뻗어온 용들이 북한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과 봉우리가 둘러싸 서울을 만든 후, 숨어든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 파주 용미龍尾리라고 한다. 바로 이곳에 사람과 세상의 평안과 소망을 기원하는 거대한 석불상이 있다. 이 석불상을 사람들은 미륵불로 인식하고 쌍미륵, 쌍불로 불렀다. 예전 마을 이름도 미륵뎅이였다. 

‘파주용미리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 조선 초기. 화강암. 높이 17.4m, 왼쪽 원형 관모 불두 높이 2.45m, 오른쪽 사각형 관모 불두 높이 2.36m)’으로 부르는 이 큰 불상은 파주 용미리 장지산 중턱 가까이 수목에 둘러싸인 채 서 있다. 이 마애불은 이불병립二佛竝立상으로 약간의 키 차이를 가진 정다운 부부처럼 나란히 남서쪽 방향으로 서 있다. 두 불상이 나란히 표현되는 경우는 ‘괴산원풍리마애불좌상’의 사례가 있지만 매우 드문 예이다. 

거대한 수직 천연암벽을 그대로 살린 17.4m 높이의 불상은 큰 매스mass의 중량감으로 위엄이 넘쳐난다. 불신佛身은 거대한 자연 암면을 그대로 살려 얕게 돋을새김하였고, 얼굴과 관모는 4-5개 사각형 돌을 조각하여 쌓은 특별한 마애불상이다. 큰 암벽을 그대로 살려 불상을 조성하였으므로 실제적인 인체의 형태나 비례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 불상은 이상화된 불신의 사실적인 모습이기보다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권위적이고 위엄 있는 모습이지만, 어딘지 친근하고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에 서 있는 원형의 관모를 쓴 불상은 키가 크고, 불신 또한 바위면의 2/3정도이며 주불로 조성하였다. 이에 비해 오른쪽 사각탑형 관모를 쓴 불상은 키가 약간 작다. 

사진=최배문

왼쪽 불상은 볼륨이 약간 있는 둥그스름한 얼굴에 고졸한 미소가 있고, 오른쪽 불상은 사각형의 평면 얼굴과 꼭 다문 입으로 침울한 인상이다. 왼쪽 불상은 원통형 목과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으며, 시선은 멀리 바라보고 있고,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어깨 앞에서 연꽃가지를 쥐고 있다. 오른쪽 불상은 눈을 반개하여 아래로 응시하며 턱을 앞으로 당겨 관조적이고 소극적인 얼굴 모습으로 합장하고 있다. 

세부의 조각수법과 조성양식은 두 불상이 거의 비슷하다. 두 불상의 얼굴을 둥글거나 각이 있게 만들어 볼륨과 매스가 크게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싼 통견 방식의 법의는 바위 면을 살려 U자 모양의 곡선과 얇은 주름으로 처리하여 평면적이다. 그리고 가슴께에 보이는 큼직한 띠 매듭이 인상적이다. 불상의 옆을 돌아 석불의 뒤에서 바라보면 양 석불은 큰 매스의 어깨와 상반신으로 인하여 헌헌장부를 보는 듯 더욱 당당하게 보인다. 

국내 최대 크기의 이 마애불은 바위 자체를 인체의 모습으로 살려 조성하였으며, 비교적 얼굴의 비례에 유념하여 균형 잡힌 불상으로 만들었다. 법의 속의 사지나 드러난 손의 비례는 자연스럽지 않지만, 주불이 드러낸 오른손 두 손가락은 매우 짧고 투박하면서도 손톱까지 표현하는 세밀함이 있다. 자연암벽의 큰 바위로 거구의 몸 전체를 표현하였으므로 자연스럽고, 왼쪽 불상의 얼굴은 둥근 마름모형으로 더 크게 보이며, 오른쪽 불상은 사각형 얼굴에 턱의 볼륨이 얇고 평면적으로 보인다. 특히 두 얼굴 모두 이목구비가 분명하지만 자비와 사랑이 넘치기보다 무표정하다. 어쩌면 거불이 갖는 권위와 위엄의 카리스마가 아닐까? 이목구비가 굵직하고 시원스러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세상만사에 초탈한 담담함이 묻어나지 않는 이유는 모를 일이다.

자연 암벽을 다듬어 불신을 만들고 그 위에 불두를 따로 만들어 올리는 제작수법은 통일신라의 경주 굴불사지사방불, 경주 남산약수계마애불입상, 고려시대의 안동 이천동마애불입상, 논산 계룡산마애불입상 등에서 볼 수 있다.

사진=최배문

이곳 용미리마애불의 경우도 자연 암벽을 불신으로 삼아 장대한 불상을 조성할 때 바위 형태를 적절하게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인 인체 비례와 동세를 살린 입체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많은 덩어리를 깎아내면서 작업을 해야 하므로 조각가로서는 엄청난 노력이 든다. 또한 많이 깎아내면 덩어리는 약해지고, 정상적인 비례를 가진 사실적인 작품은 야외조각으로서는 빈약해 보이기도 한다. 더욱이 경도 높은 화강암에 적절한 비례를 가진 불신을 조각하는 것은 긴 시간과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마애불은 자연의 바위 형태를 존중하여 가능한 한 바위 면을 덜 깎아내면서 불신에 법의와 손의 자세를 새기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정상적인 인체비례를 넘어선 이 불상에서 인체의 비례나 해부학적 인체 구조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오히려 이러한 거대한 천연의 바위에서 부처의 모습을 발견하고 거기에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조형의식에 주목 하게 된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을 바꿔, 바위 그 자체를 존중하여 예경의 대상인 불상을 만든 마애조각에는 바위가 신령스럽다는 한국적인 바위신앙 즉, 민속신앙의 영향이 있다. 또한 표현 재료인 바위가 갖는 물성을 존중하는 자연주의 미학도 깃들어 있다. 즉 민속적으로 바위는 신령한 힘을 간직한 존재로 인식하고 여기에 기원하면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소박한 믿음이다. 오늘날에도 큰 바위 아래 소망을 기원하는 이들이 줄을 서고 있다.

미술가의 입장에서도 조각하는 바위나 돌은 그저 무정물로 여기고 작가의 의도대로 자르고 깎으며 새기는 그러한 물질이 아니다. 돌조각을 할 때는 자연 상태의 바위나 채석장에서 떠내어온 단순한 석재일지라도 이를 존중하면서 그 속에 깃든 형태를 발견하고 찾아내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사진=최배문

객관과 주관이 분리되는 서양 근대의 이원론적 사고로는 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객관과 주관이 일치하는 동아시아의 일원론적 사고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조각사에서는 만년의 미켈란젤로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조형사고를 하는 작가가 거의 없었다. 전통적으로 서양조각에서 돌이나 나무는 조각가가 극복해야 할 단순한 물질적 재료이므로, 자연재인 돌을 깊이 생각하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작업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동양적인 조형사고로 산속 큰 바위 형태를 존중하면서 작업하는 조형의식을 생각해야만 이런 유형의 마애불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처럼 생기지도 않은 자연 암벽에 불상을 새겨야 하는 조각가로서는 어떻게 장대한 작업을 감당해야 했을까?

바위의 형태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거대한 바위 면을 불신으로 삼고, 그 위에 불두를 만들어 올리면서 두 불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바위 형태와 면의 제약으로 때로는 위축되거나 과장될 수밖에 없는 불신과 불안佛顔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불신의 적절한 비례나 자연스런 동세, 신체의 굴곡 등을 고려할 때 이 마애불은 거기에 수렴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외형적인 사실성을 기준으로 이 불상을 봐서는 안 된다. 자연의 바위와 부처를 일체화하려는 조형의도와 조형어법으로 이 불상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마애불에서는 통일신라의 세련되고 균제한 조형성은 볼 수 없지만, 거대한 자연 바위에서 불신을 찾고 거기에 인공적인 조각을 더한 조형의식은 탁월하다. 자연의 바위에서 불신을 발견하고 그 위에 불두를 만들어 올린 예는 현대미술의 퍼포먼스 같은 조형의식이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 불상은 구체적인 이목구비 형태의 개념을 넘어선 바위 그 자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대한 바위를 보는듯한 장중한 불신과 위엄에 찬 상호에서 바라보는 모두를 압도하는 큰 힘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자연주의 미학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사진=최배문

이 마애불은 고려 선종宣宗과 연계한 불상 조성 설화가 있고, 양식적인 측면에서 고려 초기의 불상과 부합되는 점이 있으므로 많은 미술사가들은 고려 초기불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조선 성종成宗연간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쟁이 되고 있다. 마애불입상의 몸체에서 발원문을 새긴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은 조선 초기인 성종연간에 왕실을 중심으로 세조의 정토왕생과 단명한 그의 아들 의경 세자와 예종의 명복, 성종의 만수무강 그리고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복까지 기원하기 위해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논쟁점은 설화와 양식, 명문과 양식 그리고 당시 왕실의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와 연계되어 있으므로 전문가의 심도 있는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 마애불은 지혜와 자비의 따뜻한 부처이기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신비스런 힘을 가진 위엄의 부처님이다. 더욱이 마애불이 위치하는 파주는 개성으로 이어지고 평양과 신의주로 가는 평화와 통일의 길목이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주변의 여러 나라에 이 위엄이 미쳐 평화가 속히 다가오길 기대한다. 이곳 용미리마애이불의 위신력으로, 복잡하게 얽힌 한반도의 문제를 풀어내는 지혜의 빛이 비춰지길 기대해 본다.   

 

이성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4회 개인전과 270여 회의 초대, 기획, 단체전에 출품하는 등의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국 마애불의 조형성』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현재는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