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불교] 미얀마의 불교

세계의 불교

2007-09-15     관리자

미얀마 의 수도 랑군에 가면 사람들은 여러번 놀라게 된다.
그 첫 번째가 쉐다곤 탑이다. 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사찰인 이 파고다는 높이가 99.4미터에 달한다. 30층 빌딩의 크기인 것이다. 너무 커서 보통의 카메라로는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건조물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인간이 만든 황금 건조물 가운데 이처럼 거대한 것은 없다. 이 탑 하나에 자그마치 7톤의 순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는 대영제국 은행 지하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금의 양보다 많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탑에는 꼭대기에 73캐럿트 다이아몬드를 비롯 5천 5백 개에 달하는 다이아몬드와 2천 3백여개의 루비, 사파이어 등 크고 작은 보석들이 박혀 있다.
가히 세계에서 가장 비싼 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버마로 더 잘 알려진 미얀마는 전통적인 불교국가로 불탑이 많기로 유명하다.
인구 4천 2백만 명의 이 나라에는 무려 4백 40만 개의 불탑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나라 사람 10명당 1개꼴로 불탑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 이 나라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이와라디 강을 끼고 거대한 파고다군이 형성되어 있다. 강의 범람과 가뭄은 곧 사람들에게 생사의 갈림길을 의미했기에 생사의 갈림길을 의미했기에 사람들은 생전의 부귀와 내세의 행복을 위해 탑들을 세우곤 했던 것이다. 세계 최대의 와불인 길이 67미터의 치옥타치 와불도 이 나라 랑군에 있다.
남들보다 훌륭하고 화려한 불탑을 세우는 데 분주했던 옛 버마인들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들의 부와 풍요를 소진했고 지금은 최빈국의 하나로 전락한 아이러니한 현실을 체험하고 있다고 얘기된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양복을 입지 않는 유일한 나라로 꼽히고 있는 미얀마에서는 아직도 먹고 살 것만 해결되면 모든 것을 불전에 공양하는 전통이 숭상되고 있기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구차하다고 생각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눈은 맑고 그윽한 기품을 간직하고 있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전통적으로 국교의 위치를 누려왔다. 역대 왕들은 그들의 신성을 불교에서 찾았고 국민들의 일상생활도 불교적으로 정화되어 왔다. 국민들의 교육도 대부분 사원에서 담당하며 8 ~ 9세의 어린이들은 지방 사찰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기초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다.
미얀마에 불교가 개교된 것은 11세기경 파간 왕조를 세운 아누라타왕(1044-1077재위)때의 일이다. 역사가들은 미얀마에서 불교가 공식으로 개교되기 전에 이미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가 들어와 있었던 흔적을 발견해 내고 있다.
아누타라왕은 갖가지 종교가 혼합되어 있던 미얀마에 스리랑카에서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확립하여 오늘날의 미얀마불교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버마에서 불교를 전해준 스리랑카는 9세기 중엽 남인도의 치올라 왕조의 침입을 받아 사원과 불탑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고 있었다. 심지어 득도식 등 승단의 의식을 행하는데 필요한 숫자의 승려가 모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무렵 버마에서는 스리랑카에 장로를 파견했고 많은 경전을 보내 주기도 했다.
버마불교는 13세기 무렵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의 법통을 계승받아 종주국의 위치에 선 일도 있으나 곧 되돌려 주었고 스리랑카가 16세기 경 포르투갈의 침공을 받아 멸망 직전에 놓였을 때도 장로와 비구를 파견해 상좌부 불교의 법통을 계승케 해준 일도 있다.
미얀마불교가 정치권력에 의해 최초로 시련을 겪은 것은 1826-1848년까지 22년간 영국의 식민통치 기간이었다. 젊은 풍기(Pongi:스님을 지칭하는 말)들은 반식민 투쟁에 있어서 최초의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1908년에 청년불교도협회가 창설되었고, 일반불교도협회가 1911년 조직되어 반영(反英)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양한 인종집단과 계층을 통합, 연결시킨 것도 불교였다.
식민지배하에서 그들은 종족의 이해관계는 달라도 불교라는 공통점에 뭉쳐 서구의 침략세력에 대항했던 것이다. '버마인이 되려면 불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버마가 영욕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정부를 세우면서 열렬한 불교신자인 우 누가 수상에 취임했고 그의 영토하에 승가조직이며 사찰법이 제정정비됐다.
1951년 버마정부는 6백30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불교대학, 도서관을 건립했고, 랑군 교외에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세계평화사원을 축조했다.
버마는 태국 스리랑카와 함께 세계불교연맹(W.F.B) 창설의 주역을 맡기도 했고 54년 12월에는 성대한 세계불교대회를 주최하기도 했으며 1961년에는 불교가 헌법상 국교로 공식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소수종교의 반발 등 여러 원인이 복합돼 버마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62년 3월 2일 네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정지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불교도이면서 사회주의자인 네윈은 불교사회주의(Socialism Dharmigue)라는 독특한 이념을 정립시켜 버마를 장기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통치와 쇄국 정책이 계속되면서 미얀마는 인권, 국가경제, 외교 등 많은 분야에서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어 이웃 불교 우방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지난 '88년에는 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어 받은 젊은 승려들이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와 단식 지하운동을 전개해 무수히 투옥되기도 했다. 랑군의 봄이라 불리우는 이 운동의 영향으로 현재는 상황이 다소 호전되기는 했지만 군사정부는 여전히 미얀마를 철권통치하고 있다.
현재의 헌법에는 불교 이외의 종교를 신봉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이 나라에서 불교의 승려는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3종파로 구성된 미얀마의 불교에는 1백만 명의 승려가 수행하고 있는데 이 들중 장기 출가승이 10만명이다. 이 가운데 경율론 삼장을 통달한 삼장법사가 1백 명에 이른다.
앞으로 불교와 사회주의를 내건 군사통치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슬기로운 조화를 이뤄낼 것인가에 미얀마와 미얀마 불교의 앞날이 달려있기에 전세계의 이목 특히 불교신자들의 관심이 미얀마로 쏠리고 있는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