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함께한 동물 식물] 바나나와 쥐

2018-08-21     심재관

 

바나나

바나나는 동아시아에서 파초芭蕉, 인도에서는 카달리Kadalī라 불렀다. 우리에게 이 식물은 영양과 맛이 있는 과일로 기억되지만, 불교에서 바나나는 환상이나 허깨비, ‘본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대변하는 매우 은유적인 식물이다. 

불교에서 바나나 나무는 세상의 모든 것에 본질이 따로 내재해 있지 않다는 것을 비유하기 위해 자주 예로 들었던 나무였다. 거듭 껍질을 까도 알맹이가 없다는 비유를 현대인은 양파를 통해서 하지만, 불교에서는 바나나가 양파를 대신했던 것이다. 바나나 나무를 가르면 그 속은 마치 잎이 감겨있는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삼매왕경Samādhirājasūtr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뜨거운 한낮에 목마름에 시달리다가 길을 잃으면 연못을 보는 신기루를 보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이 이러한 줄 알라. 마치 본질을 찾으려는 사람은 바나나 나무의 기둥을 두 동강내서 살피는데 그 나무의 안이나 밖에나 본질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릇 모든 것을 이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바나나 나무의 은유는 『상유타 니카야Sam.yutta Nikāya』 경전에서 거의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다. 갠지스강변에서 석가모니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 있다. 

인도네시아, 자바 중부 지역의 민가에 심어진 바나나

“어떤 사람이 나무의 심재心材부분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나무의 심재를 찾을 생각으로 도끼를 들고 숲으로 가겠지. 그리고 그 사람은 숲에서 큰 바나나 나무를 보게 되겠지. 둘레도 크고 위로 엄청나게 곧게 뻗은 그 바나나 나무를 보고 좋은 심재를 얻을 생각에 도끼질을 하겠지. 먼저 뿌리 위를 잘라내고 그다음 나무 머리 부분도 잘라낼 거야. 양쪽을 잘라내고는 바깥쪽 껍질을 벗겨내겠지. 하지만 껍질을 벗겨내고도 심재 부분은 고사하고, 바로 껍질 아래 드러나는 변재邊材부분도 찾을 수 없는 거야. 좋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나무를 지켜보고, 관찰하고, 제대로 검사하겠지, 어떤 나무인지 말이야. 그런 사람에게 그 나무는 본질이 없는 채로, 심재가 없는 채로, 텅 비어있는 나무라는 것을 알았을 게지. 도대체 바나나 나무에 어떤 심재가, 어떤 본질이 있겠는가? 바로 이와 같이, 과거와 미래, 현재를 잘 살피는 수행자가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이 공하고 본질 없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걸세. … 색色은 기포 덩어리와 같으며, 수受는 거품, 상想은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다. 또한, 행行은 마치 바나나 나무의 중심과 같은 것이며, 식識 환상에 지나지 않네.” 

바나나 나무의 비유를 들고 있는 이 경전들은 후대에 중관학파의 불교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난다. 13세기경 티베트의 카르마파 랑중 도르제Rangjung Dorje는 다시 바나나 나무를 들어 윤회의 세계를 설명한다. 

“바나나 나무를 가른다 해도 그 나무의 본질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열매는 익으며 먹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윤회의 세계를 분석한다 해도 본질이라는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윤회라는 것조차도 단지 사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유라는 것도 본질을 갖지 않으며 꿈이자 신기루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번뇌의 그물에 사로잡힌 의식, 그것을 윤회라 부른다.”

오랜 시간동안 불교인들의 무아 혹은 공의 비유가 되었던 바나나 나무는 사실, 현대의 식물 분류상 나무가 아니다. 물론 나무라 부를 수도 있지만, 이것은 풀이다. 풀과 같이 실제로 줄기가 없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나무와 같이 부피 생장을 하지 않는다. 대신 입이 촘촘하게 겹겹이 감겨있어서 나무 기둥처럼 보일 뿐이다. 이것을 ‘헛줄기(pseudo-stem)’라고 부르는데, 새순으로부터 겹겹이 잎이 말려 올라오다가 나중에 펴지기 때문에 마치 나무의 줄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새순은 어미 바나나의 뿌리줄기를 통해 땅에서 돋아나며 이것을 잘라 다시 심어서 어린 바나나를 재배한다. 바나나는 열매를 수확하면 죽게 되기 때문에 새순을 다시 심어서 키워야 한다. 

옛 불교인들은 이러한 바나나의 속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바나나 나무가 헛줄기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열매를 맺으면 곧 나무가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바나나의 생태는 또 다른 불교의 비유를 만들어낸다. 악한 행위의 결과가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경우, 이 바나나 나무를 들어 그렇게 비유하기도 한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에서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데바닷타提婆達多의 악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저 데바닷타가 그와 같이 많은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자신과 그를 따르는 비구들까지 함께 해를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비구들아, 비유하자면 마치 바나나 나무(芭蕉)가 열매를 맺으면 즉시 말라 죽는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을 해치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데바닷타가 그렇게 이익을 얻는 것은 마치 대나무와 갈대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곧 말라 죽는 것과 같고, 또 나귀가 새끼를 가져 그 새끼를 낳고 나면 곧 죽는 것과 같으니라.” 

 

인도네시아, 자바 동부의 페나타란Penataran 사원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쥐의 장식 조각. 14세기경. 세부.

쥐는 불교에서도 제법 지혜롭고 부지런한 동물로 그려진다. 물론 한때 석가모니의 전생으로 그려질 때도 있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에는 석가모니가 쥐로, 데바닷타가 족제비로 그려지는 전생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한때 석가모니가 쥐로 태어났을 때, 큰비가 멈추지 않고 7일 동안 내렸다. 동물들은 동굴로 피하게 되었고, 그곳을 지나던 쥐와 뱀, 족제비도 비를 피해 한 동굴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자 족제비가 쥐를 잡아먹으려 하니, 뱀이 족제비를 말리면서 싸움을 하기보다는 쥐에게 먹을 것을 구해올 것을 청한다.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씨의’ 쥐는 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동안 동굴 속의 족제비는 쥐가 먹을 것을 구해오지 못하면 대신 쥐를 잡아먹자고 뱀을 설득한다. 뱀은 족제비가 쥐를 잡아먹을 생각인 것을 간파하고 쥐에게 몰래 이 이야기를 전한다. 쥐는 그 말을 듣고도 더욱 열심히 뱀과 족제비를 위해 먹을 것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쥐는 결국 뱀에게 이별을 고하고 자리를 떠난다. 경전에서는 이 쥐가 석가모니의 전생이며 족제비가 데바닷타의 전생이었다고 전한다.  

이 경에는 쥐의 지혜와 용기를 전하는 또 다른 석가모니의 전생이 나타난다. 이 이야기에서도 석가모니는 쥐의 왕으로, 데바닷타는 고양이로 전생에서 적대적 관계로 묘사된다. 

한때 오백 마리의 쥐를 거느리던 쥐의 왕이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그 주변에 늙은 고양이도 살고 있었는데, 젊어서 쥐라는 쥐는 모두 잡아먹던 사나운 고양이였다. 나이가 든 고양이는 주변에 사는 쥐들을 잡아먹고 싶어서 꾀를 내었다. 수행자 고양이로 흉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쥐들이 사는 굴 근처에 자리를 잡고 한 다리를 접고 한 다리로 선 채로 두 팔을 모았다. 그리고 입은 벌린 채 태양을 쳐다보고 합장을 하였다. 이는 전형적인 고대 인도 고행자의 모습이었다. 고양이의 모습을 본 쥐들은 왜 입은 벌리고 있는지, 왜 한 다리로 서 있는지 고양이에게 물었다. 고양이는 쥐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 허공을 날아다니는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입을 벌리고,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생명들을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한 다리로만 서 있노라 대답한다. 쥐들을 고양이를 대단한 수행자인 양 섬겼다. 그리고 한 줄로 서서 고양이를 세 번 오른쪽으로 돌아 경배한 다음 매일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고양이는 맨 뒤쪽의 쥐들을 한 마리씩 몰래 낚아채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로 쥐의 왕은 쥐들이 한 마리씩 적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양이가 살이 찌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리고, 고양이의 똥 속에 쥐의 털이 섞여 나오는 것을 보고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쥐의 왕은 쥐들의 거주처를 은밀하게 다른 곳으로 모두 옮긴 다음, 마지막으로 고양이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줄을 맞추어 갔다. 쥐의 왕은 가장 뒤쪽에 서서 경배를 했다. 예상한 대로 고양이는 쥐의 왕을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었고 쥐의 왕은 고양이를 피해 고양이의 목덜미에 올라타 그를 물었다. 다른 쥐들도 자신들의 왕을 도와 고양이를 공격했고, 고양이의 위선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때의 쥐의 왕은 석가모니였으며, 고양이는 데바닷타였다. 

이 불교의 전생 이야기 속에는 쥐에 대한 고대 인도인들의 일말의 신뢰와 애정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는 힌두인들의 종교적 삶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인도 라자스탄에는 카르니 마타Karn.ī Mātā라는 힌두 사원이 있다. 힌두여신을 모신 사원이지만, 일명 쥐의 사원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수천 마리의 쥐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신을 모신 힌두 사원에 왜 이렇게 많은 쥐들이 살고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이 쥐들에게 공양을 하기도 하고 숭배하기도 한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이 쥐들은 카르니 마타를 섬기는 신자들의 영혼들이었다고 전한다. 매우 신심이 깊었던 신자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카르니 마타 여신은 죽음의 신인 야마와 흥정을 했으나 이에 실패하자 자신들의 신자들의 영혼을 야마 신에게 맡기는 대신, 환생할 동안 임시로 쥐의 몸속에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대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쥐들을 성스럽게 여기며 공양을 아끼지 않는다. 

반드시 라자스탄의 경우는 아니더라도, 지방 곳곳에 깃들어 있는 쥐에 대한 믿음 때문에 쥐에 대한 박멸은 인도에서 쉽지 않다. 심지어 1912년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도 자이뿌르 사람들은 쥐를 몰살하는 것에 반대했었다. 동물을 죽이는 것에 대한 부자연스러움을 포함해서, 특히 쥐는 페스트를 퍼트리는 동물이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심재관
동국대학교에서 고대 인도의 의례와 신화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를 마쳤으며,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인도의 뿌라나 문헌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필사본과 금석문 연구를 포함해 인도 건축과 미술에도 관심을 확장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오스트리아, 파키스탄의 대학과 국제 필사본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인도 뿌네의 반다르카 동양학연구소 회원이기도 하다. 저서 및 역서로는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세계의 창조 신화』, 『세계의 영웅 신화』, 『힌두 사원』, 『인도 사본학 개론』 등이 있다. 현재 상지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